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57화 (157/200)

157.그럼요, 형님

신년의 들뜬 분위기 속.

<악의 재림> 신년 촬영 회의가 열렸다.

“현재 8화 촬영 기준 분위기는 아주 좋습니다. 제작비 부족한 거 없고, 데드라인 충분히 맞출 수 있고, 예상되는 큰 변수 역시 없습니다.”

PD 제운의 말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참석자들.

그중에는 도윤도 있었다.

아예 정식으로 제작진에 참여한 도윤 말이다.

“그리고…… 배우들 중에서 단 한 명도 NG 머신이 없는 게 좀 놀랍네요. 한 명쯤은 구멍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런 가운데 배우들의 퍼포먼스가 언급되었고.

시선은 자연스레 도윤에게 옮겨갔다.

이번 <악의 재림> 캐스팅에 혁혁한 공을 세운 도윤 말이다.

주연급들 몇몇이야 사전 미팅을 마치고 미리 캐스팅을 확정 지었지만, 조연 및 단역들은 그게 아니라 공개 오디션을 치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도윤이 픽한 수많은 배우들이 제운과 미나를 비롯한 기존 제작진들을 놀라게 만든 것.

“통상 촬영 현장에 구멍이 한둘쯤은 꼭 있고, 신인들 고생하는 거 생각하면…… 최도윤 배우님이 정말 잘 고르셨다고 봐야죠.”

미나가 맞장구쳤고.

“최도윤 배우 제안으로 신인들 챙겨주고 한 게 도움이 된 것 같기도 하고요.”

제운은 도윤의 제안으로 하나둘 바뀐 촬영 현장을 언급하며.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몸 둘 바 모를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도윤답게.

“감사합니다.”

담백한 대답으로 넘겼고.

“제안은 제안이고, 실행은 실행이죠. 제가 한 게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결국 전 배우니까요.”

아울러 제운과 미나에게 슬쩍 공을 돌리며 분위기를 더욱 좋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화기애애한 회의의 표본이었다.

그러나.

“근데 이제 이거 끝나면 한동안 못 보겠지…….”

미나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도윤이 <악의 재림> 촬영을 마친 뒤 한동안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이다.

<데드 로드> 시즌2.

그리고 일본에서 드라마 촬영까지.

모두 합쳐 1년은 걸리는 긴 시간.

그동안 미나는 다른 작품을 준비하겠지만-

솔직히 미나 입장에서는 도윤을 꽁꽁 묶어다가 자신의 작품 출연 계약서에 사인을 하게 만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도윤이…… 아니 최도윤 배우님 덕분에 다른 배우 눈에 들어올지 걱정이네요.”

물론 제운은 이제 지겹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에 같이 한 것도 감지덕지로 알라고.”

“저도 알아요. 근데 아쉬운 걸 어떡해요.”

“하기야.”

그리고 도윤은 씩 웃으며 한마디했다.

“다음에 한국 오면 같이하겠습니다.”

“대본 보고?”

“그야 당연하죠.”

“좋아. 보자마자 바로 사인하자고 만들 테니까 기대해.”

미나의 포부에 모두의 웃음이 터졌고.

회의가 끝난 뒤.

도윤은 곧바로 회사로 향했다.

“후우.”

도윤은 대표실 앞에서 심호흡했다.

오늘은.

드디어 이야기를 하는 날이다.

이엔 엔터를 떠나.

회사를 설립하는 그 계획을 말하는 날.

안 떨린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제 더 이상 마음의 채무는 없지만…….

그래도.

이엔 엔터니까.

도윤의 머릿속엔 말쑥한 차림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 명함을 건네주던 수철의 모습과.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맞아주던 동민.

도윤이 <그대 내 품에>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뛸 듯이 기뻐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스쳐 갔다.

하지만.

이제는 추억을 뒤로하고 각자의 길을 갈 시간이다.

똑똑.

“들어와.”

도윤은.

마침내 대표실로 들어가 동민과 수철, 그리고 경후를 마주했다.

그리고 꽤 긴 시간에 걸쳐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세 사람이.

최대한 서운해하지 않도록.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너랑은 회사 망할 때까지 같이 갈 줄 알았는데.”

동민은 한숨을 쉬었고.

“하긴. 솔직히 지금까지 여기 계속 있던 것도 신기했었지.”

수철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며.

“도윤가 지금까지 하겠다고 한 거, 모두 했으니까…… 이제 우리는 마음의 준비를 하면 되는 건가요?”

경후는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

모두가.

서운해하는 표정.

예상했던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언제부터 생각했던 거냐?”

“꽤 오래전부터요. 정확히는, <알고 있는가> 촬영할 때부터였습니다.”

도윤의 대답에 동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하려는 마음은 당연히 있었지만.

지금까지 도윤이 결정을 내렸던 걸 생각해 볼 때-

“설득은 의미가 없겠네요, 형님.”

“그래. 여기서 도윤이 말 타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 있어?”

있을 턱이 없다.

도윤이 자립 이야기를 꺼내면서 한 말들은 모두 반론을 펼 수 없을 만큼 타당했으니까.

물론 배우로서의 도윤과 사업가로서의 도윤은 분명히 다르겠지만-

사업은 어려운 거라는 말을 하며 설득하기엔.

도윤의 포부와 꿈이 너무도 확실하다.

감히 하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그래서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

여기서 설득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당연히 계약 기간은 채우고 마무리할 겁니다. 앞으로 정확히…… 1년 남았네요.”

“그래, 1년이지. 1년. 앞으로 1년…….”

1년이란 단어를 되뇌는 동민의 눈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아쉬움이 가득하다.

왜 입에 담을 수 없냐면.

도윤이 이 회사에 해준 게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안다.

여기 있는 세 사람이 알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안다.

이엔 엔터가 지금 상장이 거의 확정적일 정도로 성장한 건.

도윤 덕분이다.

<그대 내 품에>를 시작으로 <알고 있는가>, <기적의 레시피>, <그 남자의 메모리>, <협조> 등의 작품을 연달아 히트시켰고.

그 결과 이엔 엔터는 천 명에 이르는 직원들이 일하는 회사가 되었다.

그러니.

도윤에게 아쉽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때문에 동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생각보다 짧았다.

“잘해라.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후회 없이 살아.”

당장에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남아달란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래서 동민은 이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도 어렵사리 함께 꺼냈다.

“그리고 이제…… 대표 말고 형이라 부르면 안 되겠냐?”

도윤의 대답 역시.

담백했다.

“그럼요, 형님.”

이것으로.

마침내 도윤은.

자립해서 회사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세 사람에게 밝혔고.

그건 다시 말해.

이엔 엔터와 최도윤이라는 배우는 더 이상 계약 연장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때문에 경후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고민했다.

‘시기가 상장 이후라 다행이긴 한데…… 도윤이 나가면 주가 좀 떨어지긴 하겠군.’

물론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멍청한 우를 범하진 않았다.

여하튼.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1년 후엔.

도윤은 이엔 엔터 소속 배우가 더 이상 아니게 될 것이다.

동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도윤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물었다.

“오늘 저녁에 시간 되면 소주나 한잔하자.”

아쉬움을.

털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당연히.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형님.”

* * *

네 사람은.

당장 내일 세상이 망할 기세로 술잔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1시간 정도가 지나 테이블에 쌓인 빈 술병이 10개가 넘어갈 즈음-

“형님, 그거 기억나요? 도윤이 저놈 처음 회사 구경시켜줬을 때 멍때리던 거요.”

“야, 기억난다. 아마 오자마자 도망치고 싶었을 거야. 회사는 무슨 반지하에 있지, 엔터 회사라더니 직원은 둘뿐이고, 대표라는 놈은 똥차 타고 다니고.”

“이거 수철 형님이 맨날 이야기하던 ‘라떼’ 아니에요? 라떼는 말이야, 응? 축축한 반지하에서…….”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옛 추억 이야기를 꺼내며 웃음꽃을 피웠다.

어떻게 보면-

긴, 성장의 시간이었다.

동민과 수철,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이엔 엔터를 만들고, 도윤을 만나 성장하기까지의 이야기.

“진짜 그랬었죠. 그때 도망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었는데.”

참고로 이렇게 말하는 도윤은.

그때 이엔 엔터 외에도 엔터 회사 두 곳 정도의 제안을 추가적으로 받은 상태였다.

그래서 계약을 맺으러 온 이엔 엔터의 행색이 생각 이상으로 심각한 걸 보고 고민하다 계약을 맺은 것.

“어우, 그때 사실 믹스커피 딱 한 잔 남아 있었는데 그것마저 없었으면…….”

“도윤이 놓쳤겠죠.”

“그때 놓쳤으면 우리 지금 뭐 하고 있었으려나?”

“솔직히 아직까지도 반지하는 아닐 것 같고, 음 그냥 근근이 하루하루 먹고살지 않았을까요?”

“야, 그래도 니가 열심히 했을 텐데 그건 좀 심하다.”

도윤이 동민과 수철의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없어도 잘했을걸요. 정 안 되면 수철이 형님이 다시 연기했겠죠.”

“야, 그게 말이냐 방구냐? 내가 너 아니었으면 카메라 쳐다나 봤을 것 같아?”

“그건 맞다. 도윤아, 내가 너 오기 전에도 수철이 보고 제발 연기 좀 다시 하라고 몇 번을 이야기했는데 들은 척도 안 하더라.”

쭈욱.

소주를 들이켜고.

양미리 하나를 반으로 뚝 잘라 입에 쏙 넣은 동민이 우적우적대며 말을 이었다.

“어으, 솔직히 말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도윤이 네가 잘한 게 수철이 연기 다시 시킨 것도 있다고 생각하거든.”

“맞는 말입니다, 대표님. 수철 형님 연기 다시 시작한 덕분에 제가 승진했죠.”

“오, 그런 의미도 있지.”

동민과 경후는 낄낄거렸고.

그사이 수철은 도윤의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그런 의미에서 내가 축하주를 한 잔 타주지.”

“제가 타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어, 그런가?”

은근히 취한 듯, 멍한 표정으로 허둥거렸다.

하기야.

그 짧은 사이 각자 2병 이상은 마셨는데.

벌써 눈이 안 풀리는 것도 이상하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셋은 순식간에 거나하게 취해버렸다.

“야, 야. 4차 가자, 4차!”

“지금 5찬데요!”

“아니! 지금 2차거든!”

첫 술자리에서 말이다.

역시나.

추억은.

사람을 빨리 취하게 만든다.

여기에 모두가 애써 감추고 있는 아쉬움과 서운함이.

이들을 더욱 빨리 취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어지간해서는 술에 취하지 않고 자제하는 도윤마저도.

오늘만큼은 마시고, 또 마셨다.

그래야 하는 날이었으니까.

“도윤아…… 야 이 짜식아…… 내가 임마, 응? 내가 임마…… 너 데려올 때가 아직도 이렇게 생생한데…… 언제 이렇게 커서…… 으음…….”

“형님…… 다음에…… 배우 은퇴하면…… 저랑 같이…… 으음.”

“안 해! 무슨 은퇴야…… 내가 어떻게 다시 카메라 앞에 섰는데…….”

그러다.

2차, 3차를 지나 4차쯤 달려 넷 모두 거나하게 취했을 무렵.

“형 이렇게 취한 건 처음 보네요.”

“그러게. 성호야, 옮기자.”

“넵.”

이쯤 되면 넷 다 엄청 취했을 거라며, 한번 가보라고 한 민주의 말에 달려온 성호와 두칠은.

“엿차.”

“거기, 머리 조심해.”

“넵.”

네 사람을 차례차례 들어 호프집 앞에 대 놓은 카니발에 차곡차곡 실었고.

“휴우. 끝났네요. 테이블 주변 싹 살펴서 놓친 거 없나 봤고, 계산 마쳤고…….”

“고생했다. 내일 세차 불러야겠다.”

“누가 오바이트만 안 하면 좋겠는데. 출발하겠습니다.”

“오냐.”

여섯 사람, 아니 두 사람과 네 명의 꽐라를 실은 카니발이.

골목 어귀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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