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54화 (154/200)

154.그럼 내가 두 판이지!

<악의 재림> 본촬영은 순조로웠다.

총 10부작.

완결성 때문에 시즌2 제작은 없고.

100% 사전제작으로 만들어지는 드라마.

지플릭스 공개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제운은 전에 없던 여유를 부리며 제작에 몰두하는 한편-

“최도윤 배우님.”

“이름 편하게 부르셔도 된다니까요.”

“거, 입에 잘 붙어야 말이지. 후광이 이렇게나 번쩍거리는데!”

“…….”

“큼, 크흠. 아무튼 말이야, 여기 이 테이크 연출 말인데…….”

놀랍게도, 배우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었다.

연기는 배우의 영역이고.

연출은 감독의 영역이라는 점을 항상 확실히 하던 제운의 모습을 생각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일.

여기에 도윤도.

“이 부분은 좀 더 타이트하게 잡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대본을 보면…… 감정이 고조되고 이후 대사에서도 평이한 어조보다는 높낮이가 계속 존재하니까요.”

“타이트하게, 오케이. 아무래도 그게 좋겠군. 고마워, 최도윤…… 아니 도윤 씨.”

“필요하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제작 기획 단계부터 이야기해 볼 걸 그랬다니까.”

적극적으로 제운을 도왔다.

도윤이 연출에 재능이 있는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배우의 시선에서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확실한 실력을 갖췄기 때문.

또한 따지고 보면 캐스팅에 관여한 도윤 역시 제작자였기에, 이렇게 연출을 논의할 명분은 충분하다.

그리고…….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누가 도윤에게 뭐라고 할 수 있을까?

현재 3화 촬영이 진행되는 <악의 재림>에서 원톱 주인공으로서 어마어마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배우인데 말이다.

거기다.

신인 배우들뿐만 아니라 말단 스태프 처우 개선까지 신경 쓰는 이미지가 생겨나며 이제는 뭐…….

“킹도윤이라는데요.”

“갓도윤이 어감 더 좋지 않을까.”

“확실한 건, 둘 다 형 앞에서 이야기했다간 욕먹을 별명이라는 거죠.”

성호의 말마따나.

본인이 들었으면 분명히 눈을 흘겼을 별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갓도윤이니, 신도윤이니, 짱도윤이니…….

보나 마나, 만나는 팬 중 한 명은 분명히 도윤의 귀에 대고 속삭였을 그런 별명들 말이다.

“형은 나중에 대체 뭐가 되려고 저러는 걸까요.”

“또 무슨 이상한 소리니.”

“그렇잖아요. 이 정도면 한동안 쉴 법도 한데, 뭐 매일 저렇게…….”

“그건 오빠가 알아서 할 일이고, 우리는 우리 할 일 하면 그만이고.”

“그래도…….”

“오빠가 행복해 보이잖아. 그럼 된 거지.”

성호는 결국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다.

배우 본인이 행복해하는데.

매니저나 스타일리스트가 무슨 권리로 막겠다는 건가.

그렇다고 건강이 안 좋은 것도 아니고, 촬영 환경도 여유로우니 건강을 챙길 시간은 충분하다.

다만.

도윤이 그런 여유를 안 가지고.

매번 대본에 빠져 지내 성호가 걱정하는 것뿐.

무엇보다.

“이젠 연애 좀 했으면 좋겠는데. 아니, 기자들이 이제 연락도 안 한다니까요?”

“오빠는 생각 없는 것 같던데.”

성호는 도윤이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퍽 신기한 모양이다.

“내가 저 얼굴이면 하…… 진짜 인생 슬프다. 누구는 저 얼굴로 연애는 관심도 없고 누구는 이 얼굴로 연애하고 싶어서 미치는데.”

물론, 억울하기도 한 모양이다.

“때 되면 알아서 하겠지.”

“그게 아니라, 형 저러다 평생 못할까 봐.”

“너만 할까.”

“…….”

쓸데없는 걱정에 일침을 가한 민주는.

마침 쭈뼛거리며 다가온 신인 배우들을 발견하고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오늘 코디랑 분장 받으셔야 하죠? 이쪽으로 오세요.”

“네, 네엡!”

“저 배우 아니에요. 긴장 푸세요.”

“그래도 최도윤 선배님 스타일리스트분이 저희 코디랑 분장 봐주시는 건데…….”

“제가 도윤 오빠 스타일리스트지 배우는 아니잖아요.”

민주는 늘 그렇듯 심드렁하게 답하더니 성호에게 고개를 돌렸다.

“성호야, 거기 박스.”

“네, 분장실로 옮기면 되는 거죠?”

오늘은.

다름이 아니라 신인 배우 몇몇의 촬영이 있는 날.

신인 배우들은 대부분 매니저도 없고, 스타일리스트는 당연히 없는 관계로 분장을 직접 준비해 오거나 현장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는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몇 번 되지 않는 출연 기회인 만큼.

도윤이 민주에게 부탁해 비는 시간에 이들의 분장을 좀 도와달라고 한 것.

물론.

그만한 추가급여는 분명히 약속했다.

민주도 흔쾌히 수락했고 말이다.

‘대박…… 손 완전 빨라.’

‘소문 장난 아니던데, 진짜 대박이구나…….’

‘분장이랑 코디랑 다른 영역 아니었나?’

덕분에 오늘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신인 배우들은 민주의 신들린 손놀림에 입을 쩍 벌렸고.

마침내 거울을 봤을 때 완벽히 달라진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형 하실 때보다 더 빠르네요.”

“금방이야. 근데 넌 커피 언제 사 왔니?”

“아까요.”

“너도 저번보다 빨라졌네.”

그리고 성호는.

누구도 모르게 커피를 사서 돌아와 신인 배우들에게 한 잔씩 돌리고 있었다.

‘우와, 완전 빨라…….’

여러 의미로.

성호도 민주 못지않게 유명한 모양.

여하튼.

민주의 분장 스킬과.

성호의 적절한 아메리카노 제공에 한결 용기를 얻은 신인 배우들은 아까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현장에 나섰고.

이를 지켜보던 도윤은.

씩,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요?”

-이번에는 DBS. 출연료 회당 2억 5천까지 부르던데.

“제작비가 썩어나나 보네요.”

-너니까 그렇게 부르는 거지.

“그래도 안 될 것 같은데요. 저 이거 끝나고 미국 갔다가 다시 한국이랑 일본 왔다 갔다 해야 해서.”

-그럼 T텔레콤 광고는? 거기는 3년 전속에 중간 모델 교체 없이…….

도윤은 툭하면 걸려오는 경후의 전화에 상당히 고심하고 있었다.

제안들은 여전히 쏟아지고.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다.

뭐, 안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지만.

여유가 분명히 있는데 기왕 들어온 제안을 다 차 버리는 것도 좀 그렇지 않은가.

자고로 돈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도윤은 돈에 얽매인 사람은 아니지만.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돈이 많으면.

좀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으니까.

“DBS 제안은 안 될 것 같고, T텔레콤은 할게요. 미국 가기 전이죠?”

-‘간’ 후라고 해도 거기서 무조건 ‘전’으로 맞춰줄 거야. 거기 홍보 쪽 담당자가 목숨 건 모양이던데.

“그거까진 사정 봐주기 어렵고, 여하튼 할게요. 네, 진행해 주세요.”

-오냐, 바쁜 것 같은데 끊는다.

“바쁠 때만 전화하시잖아요.”

-네가 데뷔하고 안 바쁜 적이 있었냐?

피식거리는 소리와 함께 전화는 끊겼고.

도윤 역시 피식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제 다시.

연기를 하러 갈 시간이다.

* * *

서서히 연말이 다가왔고.

어김없이.

시상식에 대한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이번에는 누가 상을 받을 것인가?

올 한 해 두각을 보인 신인상 후보들도 언급되고.

뒤늦게 빛을 본 중견급 배우들도 조명된다.

물론.

가장 화제가 되는 건 역시 대상 부문이다.

<달이 비춘 너울>.

연초의 화제작.

보통 연말에 방영된 드라마 출연자들이 각 수상을 쓸어가는 걸 생각해 보면 다소 특이하다고 할 수 있지만.

최도윤이 출연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최도윤이 미국에서 올 한 해 큰 임팩트를 터뜨렸고 오자마자 지플릭스 공개 예정작 <악의 재림>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다는 점에서 언급이 안 될 리 없었고.

무엇보다.

<달이 비춘 너울>은 올 한 해 방영된 그 어떤 드라마보다 시청률이 높다는 점에서.

도윤의 대상 수상은 굉장히 유력했다.

“첫해에 신인상, 두 번째 해에 대상이랑 최우수상, 그리고 세 번째 해는…….”

“또 대상이지.”

“이번에는 서이솔이 받지 않을까?”

“그놈의 서이솔은. 야, 유동하. 서이솔 출연한 드라마가 시청률 5%도 안 나온 건 알고 있냐?”

“내 마음속에선 이미 대상이야.”

물론 동하는 아닌 모양이다.

리나와 함께 도윤의 집에 얹혀살면서 말이다.

“솔직히 도윤이 집 아니라 내 집이었으면 이미 벽 서이솔 포스터로 도배했다. 인정?”

“지랄. 넌 이런 집 못 사.”

“너는 그게 오빠한테 할 소리냐?”

“응, 할 소리야~.”

이런 가운데.

삑, 삑, 삑.

막 도어락을 열고 집에 들어온 도윤이 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니들은 맨날 싸우냐?”

“그치? 이상하지? 오빠랑은 어릴 때부터 한 번을 안 싸웠는데 유동하랑은 맨날 이렇다니까?”

“도윤아, 나 진짜 얘 데려간다는 남자 있으면 업고 지구 한 바퀴 돌려고.”

“업을 힘은 있냐?”

도윤은 핀잔을 던지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고.

둘을 바라보며 눈을 흘겼다.

“니들 자꾸 그러면 내가 집에 이른다.”

“아, 왜에!”

“왜긴. 곧 방학인데 생산성 없이 노니까.”

“……오빠는 대학생의 슬픔을 몰라.”

“나 얼마 전까지 대학생이었는데.”

“……자퇴생은 재학생의 슬픔을 몰라.”

도윤은 점점 쪼그라드는 리나의 목소리에 피식거리며 물었다.

“취업 준비는 잘하고 있냐?”

“어떻게 엄마랑 똑같은 질문을 하지?”

“휴, 다행이다. 난 아직 3학년이라서.”

“넌 공시 준비한다면서.”

“……졸업하고.”

여하튼.

영락없는 평범한 대학생인 둘을 보고 있으면.

집에 온 기분이다.

“근데 오빠, 이번에도 대상 받으면 뭐 좋은 거 있어?”

“트로피?”

“상금 같은 거는?”

“야, 쟤는 상금 받아서 뭐 하냐? 돈이 이미 썩어날 정도로 많은데.”

동하의 말마따나.

사실 트로피랑 이력이 중요한 거지.

돈은 이제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다.

이런 집을 몇 채나 사고도 무리가 없을 만큼 많은 돈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도윤에게는 요즘 고민이 생겼다.

이 돈을.

과연 어떻게 써야 할까?

회귀 후.

다시 한번 삶을 허락받은 도윤은 돈에 대한 집착을 보인 적이 없었다.

연기에 대해 집착하면 집착했지.

거기에 자연스레 딸려 오는 돈에 대해서는 어떻게 사용할지 단 한 번도 고민해 보지 않았던 것.

누군가는 주식을 해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땅을 사보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집을 사보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두 흥미가 없었다.

‘나중에 내가 뭐 나라 하나 만들 것도 아니고.’

물론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건 사실이지만…….

“회사를 만들어볼까.”

“응?”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문득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뒤 놀라 대충 얼버무렸지만.

도윤의 머릿속엔 이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어렴풋이 생각해 왔던 배우 아카데미.

자신의 재능은 전수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재능 있는 배우들이 어떤 선택을 하도록 도와주는지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아직은 구체적이지도, 상세하지도 않은 초안에 불과한 계획.

그러나-

한번 시동을 건 도윤의 머릿속은.

이미 맹렬하게 회전하는 상태였다.

결국 도윤은.

“나 방에 간다. 부르지 말고. 저녁 니들끼리 먹어.”

“어어? 피자 벌써 시켰는데? 세 판이나?”

“알아서 먹어.”

“야, 내가 두 판 먹을 테니까 니가 한 판 먹어.”

“뭔 소리야! 그럼 내가 두 판이지!”

도윤은 투닥대는 둘을 뒤로한 채.

방으로 돌아와.

노트와 펜을 들었다.

슥슥슥…….

그리고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노트로 옮기기 시작했다.

맹렬한 손놀림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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