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제가 잘 못 들어서
도윤은 난데없는 소란에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 있나 본데요, 형.”
“기자들이 많은데.”
“오늘 뭐 인터뷰한다고 하진 않았는데, 이상하다.”
스케줄표를 찾아보는 성호.
하지만 오늘 현장엔 촬영 외 별다른 스케줄이 없다.
그때.
무표정하지만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황을 살피던 민주가 입을 열었다.
“국회의원 온 것 같은데요.”
“응?”
“저기, 가슴에 배지 단 사람이요.”
도윤은 그 말에 창문으로 민주가 가리킨 곳을 바라봤고.
정말 그런 사람을 발견했다.
물론 민주의 말이 없었다면 절대 보지 못했을 만큼 먼 거리다.
“넌 그게 어떻게 보이냐?”
“그게 어떻게 안 보여요?”
도윤은 민주의 말에 대답하길 포기하고 상황을 살폈다.
그때.
똑똑.
누가 창문을 두드렸다.
현장 스태프였다.
“절대 나오지 마시고 차 돌리세요!”
다급한 목소리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이미 낌새를 챈 기자들과 의원 수행단이 이쪽으로 다가왔고.
“어, 어어? 왜 이쪽으로 온대요?”
성호의 화들짝 놀란 표정.
민주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고.
도윤은.
“차 빼지 마.”
“네?”
“내릴 거니까.”
간단하게 생각했다.
피하지 않기로.
* * *
최형곤은 드디어 열리는 문을 보고 생각했다.
‘그래, 어디 광대가 날 피해?’
비서관은 마침내 열리는 문을 보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제운은 기어이 열리는 문을 보고 생각했다.
‘시말서, 시말서 어떻게 쓰는 거였더라?’
미나는 뜬금없이 열리는 문을 보고 생각했다.
‘아니, 쟤가 미쳤나?’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차에서 내린 도윤은…….
“아이고, 최도윤 배우님. 처음 인사드립니다. 3선 국회의원 최형곤이라고 합니다. <악의 강림>…….”
“<악의 재림>입니다, 의원님.”
“큼, 크흠. 나도 알아, 농담 좀 해본 것 가지고…… 아무튼 국격을 높일 드라마 찍으시느라 수고가 많으십니다. 언제 한번 꼭 뵙고 싶었는데.”
최형곤을 힐끗, 바라보더니.
“죄송하지만, 무슨 일이신지 모르겠지만 사전에 약속되지 않은 인터뷰는 하지 않습니다.”
난데없는 말로 최형곤을 당황시켜버렸다.
비서관이 다급히 나섰다.
“저, 최도윤 배우님. 방금 말씀드렸지만 여기 계신 이분은 최형곤 의원님…….”
그런데.
도윤은 그 말 도중 귀로 손을 가져가더니 무언가를 꺼냈다.
바로 무선 이어폰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못 들어서.”
“…….”
비서관이 입을 쩍 벌리고.
최형곤이 당황스러움과 분노로 손을 떠는 가운데.
“무슨 일이신지 모르겠는데, 제가 촬영하러 가 봐야 해서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전에 약속된 스케줄 아니면 인터뷰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
당신들이 누군지 잘 모르겠고.
난 스케줄 잡은 적 없으니.
가봐야겠다는 뜻.
“최도윤 배우님, 지금 이분이…….”
비서관은 다시 한번 다급하게 나섰지만.
“가보겠습니다.”
도윤은 자신을 둘러싼 기자들을 능숙하게 지나쳐 자리를 뜨려 했다.
웃긴 건.
안면이 있던 기자 몇몇이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해줬다는 것이다.
기자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있을 테니.
무엇보다.
두 사람이 악수하고 화기애애하게 웃는 장면을 찍는 것보다-
이렇게 돌발적인 상황을 찍는 게 더 많은 관심을 끌 걸 알고 있기에 기자들도 적당히 상황을 만들어준 것.
물론.
최형곤은 이 난생처음 받아보는 대접에 황망한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저, 저 미친…….”
“의, 의원님. 일단 진정하시고…….”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저 광대 새…… 아니, 날 무시했다고! 격려하려고 굳이 시간 내서 왔더니 뭐? 사전에 안 잡으면 안 된다고?”
그때.
제운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이미 결심을 마친 듯한 얼굴이었다.
“당신은 또 뭐야!”
“여기 현장 책임자이자 <악의 재림> 총괄 PD를 맡은 백제운이라고 합니다.”
“PD면…… 감독이란 말…… 이십니까?”
금세 사그라드는 목소리.
3선 의원답게 최형곤의 머리는 빠르게 돌아갔고.
이미 자리를 뜬 도윤 대신 여기 있는 이 PD라는 인간과 악수하고 사진이라도 찍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최형곤만의 착각이었다.
“사전에 연락도 없이 오셔서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촬영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뭐라고?”
“죄송하지만, 이만 가주시면 좋겠습니다.”
제운 역시 더 말을 듣지 않고 몸을 돌렸고.
마치 최형곤이 들으라는 듯 현장 스태프들에게 외쳤다.
“니들 미쳤어! 입구 관리 똑바로 안 해? 정신 차리고 지키라고! 보고 따박따박 똑바로 하고!”
기자들은 이 모든 모습들을 사진에 담았고.
최형곤이 게거품을 물기 직전.
상황을 파악한 비서관이 결국 결단을 내렸다.
“가시죠, 의원님.”
“이, 이…… 이런 개 같은…….”
“가서야 합니다.”
“오냐, 이 새끼들 내가 당선만 되면…….”
최형곤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돌아갔고.
바로 옆에 있던 기자에게 말했다.
“박 기자, 돌아가는 대로 기사 좀 부탁할게. 이 새끼들 아주…….”
“맡겨주십시오, 의원님.”
* * *
[최도윤, 현장 찾은 국회의원 무시…… 태도 논란?]
[최도윤, 상대가 말하는데 이어폰 끼고 무시?]
[최도윤, 톱스타 인성 드러났나?]
당연하게도.
기사가 났다.
다분히 의도적인, 그리고 악의적인 기사들투성이.
“이게 무슨…….”
덕분에 상황을 전해 듣고 기사를 접한 이엔 엔터는 발칵 뒤집혔다.
“그쪽에서 기어이 찾아간 모양인데, 도윤이는…….”
“알아. 성격상 악수했을 녀석도 아니고.”
“일단 반박 보도자료는 준비시켰습니다. 전화 한 통이면 뿌려질 겁니다.”
경후의 말에 동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장을 앞두고 있고.
온갖 중요한 일들이 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소속 배우를 지키는 것.
그런데.
묘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음…… 이거 생각만큼 걱정 안 해도 되겠는데요?”
“응?”
“벌써 기자들이 알아서 반박 기사 내기 시작했습니다.”
“뭐?”
“도윤이랑 친한 기자들 같은데요.”
어지간해서는 연예인과 척 지는 일이 더 많은 연예부 기자들이 도윤을 위해 기사 몇 건을 내주기 시작했고.
벼르던 도윤의 팬들이.
불을 붙이기 시작한 것.
“허어.”
“팬들 무섭네요, 진짜.”
여기에 안 그래도 이미지가 좋지 않던 최형곤인지라.
오히려 욕을 먹는 건 도윤이 아니라 최형곤이었다.
-ㅋㅋㅋㅋ 이새끼 또 숟가락 얹으러 갔네 ㅋㅋㅋㅋㅋ
-지지율 떨어지니 똥줄타쥬??
-아주 국개의원이라면 치가 떨린다 떨려 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좀 창의적으로 하면 안 되나 ㅋㅋㅋㅋㅋ
-악수 안 해줬다고 기사 내서 징징 ㅋㅋㅋ 무슨 애냐? 애야?
-약속도 없이 찾아가 놓고 지맘대로 안 되니까 기사 내서 언플 ㅋㅋㅋㅋㅋㅋㅋ
욕이란 욕은.
다 얻어먹는 최형곤.
“이거 역풍 맞겠는데?”
“역풍이라면…….”
“이 정도면 낙선하겠다고.”
“아하.”
다시 잘 생각해 보면.
안 그래도 이미지가 안 좋던 국회의원이 괜히 쓸데없이 국내 최고의 인기 배우를 건드릴 거고.
그 배우의 인성은 평소에도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즉.
오죽하면 최도윤이 무시했겠냐는 반응들이 줄을 잇는 것.
평소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건 바로 이런 대목 때문이겠지.
최형곤의 이미지는 더욱 처박혔고.
도윤의 이미지는 더욱 상승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라고 해야 할까.
“도윤이 녀석.”
결국 아무 일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자 동민은 피식거렸다.
도윤이.
기특하기도 하고.
최형곤이.
웃기기도 해서 말이다.
이런 한편.
도윤은.
잠시 벌어진 ‘사건’에도 불구.
별다른 티를 내지 않고 촬영에 임했다.
아니.
아예 신경조차 안 쓴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러다 가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기자들이 도윤을 만나 질문을 던져도.
“그날 저한테는 정해진 일정이 있었습니다. 사전에 약속이 됐다면 아마 만났을지도 모르죠.”
가볍게 답하고 넘어갔다.
물론 스케줄을 잡아줬을지 안 잡아줬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여하튼.
최형곤은 당 대변인을 통해 일련의 사건에 대해 ‘사과’하는 것으로 결국 일이 마무리됐다.
[당 대변인, “최 의원의 행동에 사과드린다”]
그야말로.
엄청난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몇몇 언론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국회의원들이 격려를 핑계로 군부대를 방문해 장병들을 힘들게 하거나.
운동선수들의 영광스러운 시상 자리에 찾아가 숟가락을 얻는 행태를 비판했고-
그래도 이전과는 달리 그런 ‘보여주기식’ 선거 운동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며 국회의원들이 순간 몸을 사리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건 모두.
도윤이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데다, 평소 이미지까지 좋은 사람이 오죽하면 그랬겠냐는 반응이 줄을 이었으니까.
여하튼.
사건의 크기에 비해 도윤에겐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물론 최형곤이 속한 당의 극성 지지자들이 도윤을 비난했지만…….
그건 대세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늘 그랬듯, 도윤은 촬영에 임하고.
자신의 연기를 펼쳤다.
지금처럼.
“요새 바질란테라는 놈이 더럽게 말썽이야.”
“바질란테?”
“그래. 염병할 바질란테.”
‘석주’의 친구, ‘준호’의 직업은 형사다.
그리고 ‘준호’는 지금 ‘석주’ 앞에서 현재 경찰 내부에서도 서서히 그 존재가 알려지고 있는 ‘바질란테’의 존재를 알린다.
물론.
‘석주’는 이를 모른 척한다.
“듣기로는 얼마 전에 국회의원이 당한 것도 그놈 짓이라고 하던데. 골치야.”
‘준호’는.
극중 긴장감을 부여하는 역할이다.
‘석주’의 적이라 할 수 있는 ‘형사’가 가장 가까이 있는 친구라는 점에서 말이다.
때문에.
극 초반부에서는 단순히 ‘석주’ 옆에서 바질란테 이야기를 하면서 시청자들에게 약간의 긴장감을 주지만.
극 중반으로 흐르면서-
‘준호’가 아주 우연한 계기로 ‘석주’를 의심하기 시작하며 그 긴장감은 빠르게 증폭된다.
때문에.
제운이 지금 원하는 건 ‘석주’가 느끼는 묘한 긴장감이었다.
“매일 야근이겠네.”
“요새 비번도 없고, 정신도 없고, 애인도 없고…….”
“형사는 왜 했냐?”
“범인 붙잡으려고 했는데, 이제는 내 인생 붙잡는 것 같다. 제자리에 말이야.”
한탄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며.
묘한 시선을 보내는 ‘석주’.
당장 어제도-
악인 하나를 대신 벌하고 왔다.
물론 ‘준호’가 언급한 그 국회의원에 비하면 ‘벌’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지만…….
어쨌건.
어제까지만 해도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바질란테’로 활동하던 자신이 무려 형사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하지만.
활동에 대한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 비밀이 오래 가기만을 바랄 뿐.
“에휴, 난 간다.”
“벌써?”
“내일 출근이야.”
“그런 놈이 술 마시자고 불렀냐?”
“술이라도 안 마시면 출근 못 할 것 같아서.”
보통 반대 아닐까.
하지만 이해는 된다.
지금 그놈의 바질란테 때문에 비상이 걸렸다고 하니.
정확히는.
자신 때문에 말이다.
“그래. 알았다.”
‘석주’는.
묘한 죄책감 속에서 친구를 배웅했고.
비척거리며 걸어가는 ‘준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몸을 돌렸다.
미리 준비한.
마스크를 쓰면서 말이다.
“오케이, 좋습니다!”
그리고 떨어지는 오케이 사인.
이제는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완벽한 ‘석주’의 모습이다.
이중생활.
이미 <그 남자의 메모리>에서 이중인격을 연기해냈기 때문일까.
도윤은 미묘한 심리 따위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완벽한 연기를 해냈고.
제운에게서 박수까지 끌어냈다.
“고생했어요, 최 배우. 이거, 이러다 시즌2 이야기 나오겠는데요.”
“대본만 준비된다면야, 얼마든지요.”
“정말? 강 작가한테 한번 말해볼까요?”
“저 여기 있는데요.”
“어우, 깜짝이야. 큼큼. 그래, 말 나온 김에…… 혹시 시즌2 생각 있어?”
미나는 난데없는 말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그거야 뭐, 우리 도윤이가 해주기만 한다면?”
“그렇다는데요?”
그리고 도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못할 건 없죠. 근데 이번 작품, 완결성 있게 마무리하시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음…… 미국 히어로 코믹스처럼 2대 바질란테, 뭐 이런 걸로 할까?”
“에이, 너무 뜬금없다. 그냥 10부작으로 끝내자.”
“나 참, 아까는 시즌2 어쩌구 하더니.”
여하튼.
둘은 말이야 저렇게 해도 딱히 시즌2 생각은 없는 듯했다.
도윤도.
이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고 말이다.
2대 바질란테가 나오자니 스토리가 뻔하고.
1대 바질란테를 2대로 옮겨가자니.
이미 확정된 스토리가 있다.
‘바질란테’는 결국 한국 사회라는 틀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제시될 수 있는 개념.
그런 의미에서.
‘석주’가 결국 ‘준호’와 대립하는 후반부 스토리와 아직 공개되지 않은 결말은…….
바꾸기 어려울 만큼 매력적이다.
그리고 사실.
시즌2 제작이 된다고 해서 도윤의 스케줄상 바로 찍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시즌2는 됐고, 이거 끝나면 강 작가 신작이나 기대해 보자고.”
“흥, PD님이랑 안 할 거거든요?”
“어이구, 그래. 나도 무서워서 안 한다.”
“흥!”
도윤은 아이처럼 싸우는 둘을 보며.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