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이것이 배우다(3)
리허설 일정은 길지 않았다.
이후 도윤을 비롯한 모든 배우들이 한 번씩 돌아가며 짧은 토막씬들을 촬영했고, 대부분은 만족스러운 연기를 펼쳤다.
공들여 캐스팅한 보람이 있었던 셈.
더군다나 3차 리딩까지 거치며 조정에 조정을 거쳤으니, 사실 리허설에서 불만족스러울 일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리허설 중간, 식사 시간 동안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러 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밝았다.
몇몇만 제외하면 말이다.
‘뭐 먹지?’
이주아는 고민했다.
오늘 업체 사정으로 도시락 공수가 되지 않아 밖에서 각자 해결하고 오라는 스태프드들의 공지사항이 있었다.
하지만.
이주아는 무리 그 어느 곳에도 끼지 못했다.
이주아는 정말, 정말 신인 배우다.
무슨 말이냐면-
‘이주아 씨는 지금까지 어떤 작품에도 출연한 경력이 없네요?’
오디션에서 제운이 놀라서 되물었을 정도다.
사실 말이 신인 배우지, 대부분은 어떤 식으로든 출연 경력을 지닌다. 아역으로든, 혹은 알려지지 않은 영화의 단역이든.
하지만 이주아는 정말 아무런 출연 경력이 없었다.
그저 집에서 혼자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감상하며 작품을 분석한 뒤 홀로 연기를 공부했을 뿐.
그런 의미에서 이주아의 재능은 분명히 엄청난 수준이라 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래서 현장이 처음인 이주아가 지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다는 것.
‘일단 나가자.’
그래서 이주아는 일단 패기 좋게 나왔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일단 세트장이 있는 이곳에서 뭔가 이것저것 고를 수 있는 곳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차량이 필요하고.
아직 소속사도 없어 혼자 다니는 이주아에게는 매니저가 없었으며.
결국, 주변을 헤매다 간신히 찾아낸 허름한 백반집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장사를 하는지조차 의문인 그런 곳 말이다.
하는 수 없었다.
스태프들이나 배우들 대부분이 차에 올라 각자 출발하는 가운데.
이주아는 홀로 터덜터덜 걸어 백반집으로 향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제운이 식도락을 좋아하는 나머지 점심시간이 1시간 30분으로 꽤 길다는 것 정도?
‘먹고 대본이나 다시 봐야겠다.’
이주아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은 신인이고.
아직 누군가와 어울리기보다는 자신의 연기에 집중하는 편이 좀 더 좋은 인상을 심어주겠지.
그러다 보면 인정도 받고, 다른 사람들과도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조금 슬펐지만 말이다.
‘어쩔 수 없지. 원래 오는 날도 아니었는데.’
사실 이주아는 오늘 리허설 자리에 오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굳이 먼 길을 대중교통을 갈아타며까지 왔다.
때문에 슬픔도 잠시였다.
‘끝나면 8시쯤 되니까…… 막차는 탈 수 있겠지?’
그렇게.
이주아는 백반집 문을 열고 들어갔고.
“어서 오세요!”
안에 아직 손님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괜히 아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어색했을 테니까.
“김치찌개 하나 주세요.”
“조금만 기다려요. 맛있게 끓여줄게.”
퍼져오는 찌개 냄새 속.
이주아가 숟가락을 꺼내던 그때였다.
딸랑.
“어서 오…… 어머!”
문 여는 소리가 들려 나온 주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혹시 그 드라마에 나온 배우 아니에요?”
“아, 예. 맞습니다.”
이주아는 설마 싶었다.
지금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자신이 아는 그 사람의 것이 맞나 싶어서.
“맞네, 맞아! 어서 앉아요! 어, 그럼 방금 들어온 아가씨도…….”
“네?”
“여기요, 여기.”
이주아는 자신을 가리키는 주인의 모습에 고개를 슬쩍, 돌렸고.
볼 수 있었다.
도윤의 모습을.
* * *
“…….”
“혹시 가시방석이고 뭐 그런 건 아니죠?”
“아, 아니에요! 그, 그게…… 너무 떨려서…….”
“미안해요. 사실 차 타고 어디 나가기 귀찮아서 여기 왔는데, 그냥 매니저 말 들을 걸 그랬네요.”
도윤과 이주아는 마주 앉아 있었다.
식당엔 둘 외엔 아무 손님도 없었고.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다.
그래서.
도윤의 제안으로 자연스럽게 앉게 된 것.
물론 이주아는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무슨 할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혼자 먹으러 온 거예요?”
“네, 네에. 사실 오늘 리허설 안 와도 되는데 굳이 온 거라서…….”
“잘 왔어요. 덕분에 밥도 같이 먹게 됐잖아요? 저도 혼자 안 먹어도 되고.”
“그, 그러네요.”
이주아는 도윤의 너스레에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여전히 꿈 같다.
방금까지 리허설에서 엄청난 연기를 보여주던 배우가 지금 눈 앞에 있다니.
그것도 같이 밥을 먹는 자리에서 말이다.
“드세요. 저 신경 쓰지 말란 말은 못 하겠네요.”
“그, 그 신경…….”
“안 쓰인다구요? 그럼 다행이네요.”
도윤은 약간의 장난을 치며 이주아의 긴장을 조금 풀어주었고.
이주아는 간신히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고 찌개 한 숟가락을 뜰 수 있었다.
이런 와중에.
“어?”
맛있다.
왜 다른 사람들이 이 집에 안 왔나 싶을 정도로.
“맛있죠? 저는 왜 사람들이 다 차 타고 다른 데 가나 싶던데.”
“지, 진짜로 그러네요…….”
음식 맛 덕분일까.
이주아는 체할 걱정 없이 열심히 밥을 먹었다.
혹시 긴장해서 체할까 아침부터 비어둔 속이 끊임없이 밥을 외쳤고.
어느새 이주아는 평소보다 더 빨리 밥을 먹고 있었다.
도윤도 마찬가지.
열심히 된장찌개를 먹는 한편.
먹는 속도가 조금 느린 이주아를 힐끗 바라보더니 숟가락질 속도를 늦춘다.
도윤은 미국에 돌아온 후, 자신의 위치가 어느 정도 되는지 체감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위아래가 있다고 하면 조금 슬픈 일이지만, 이 바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이주아가 혹시나 불편할까 싶어.
이렇게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다.
물론 이주아는 정신없이 먹느라 바로 눈치채지 못했고.
자신이 숟가락을 내려놓은 직후.
도윤도 바로 숟가락을 내려놓은 걸 보고 깨달았다.
“어, 벌써 다 먹었어요?”
그리고 능청스레 묻는 도윤의 모습도 말이다.
“앞으로 여기서 촬영할 텐데, 종종 같이 와서 먹어요.”
“네, 넵. 감사합니다, 선배님!”
“혼자 먹는 게 나쁜 건 아닌데, 혼자 먹는 버릇만 들면 안 좋더라구요.”
이런 말을 해주는 도윤은.
회귀 전, 사건이 터지고 매번 혼자 밥을 먹어왔다.
그래서 익숙해져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아졌지만…….
한편으로는 그립기도 했다.
누군가와 대화하며 밥을 먹는 그 일상적인 행복함.
물론 그런 말을 해주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건 아니지만 말이다.
도윤도.
어쩌다 보니 오늘은 그냥 혼자 생각할 게 있어서 밥을 먹으러 들어왔다가-
이주아를 만난 거니까.
‘뭐, 내가 캐스팅에 관여하긴 했지만.’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도윤은 캐스팅한 이후 한 번도 대화해 본 적 없던 이주아와 이렇게 대화할 자리가 생겨서 만족스러웠다.
그런 한편-
도윤이 단순히 여기는 이 대화에.
이주아는 큰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나중에 후배 생기면 잘 해주세요. 연기하시는거 봐선…… 금방 생길 것 같은데요?”
이주아는 도윤의 난데없는 칭찬에 어버버했고.
그사이 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밥값을 계산한 뒤 음식점 밖으로 나섰다.
햇살이 따스한 게.
날씨가 아주 좋은 것 같았다.
* * *
<악의 재림> 본촬영이 시작되었다.
지플릭스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시작된 본촬영은 모든 게 완벽하고 부족함이 없었다.
제작비가 충분했기에 스태프들의 처우도 좋았고.
식사는 매 끼니 단순한 도시락이라 불리기엔 너무도 풍족한 수준으로 제공되었다.
그뿐인가.
단역 배우들에게도 무려 휴게실이 제공될 정도였으니.
“미쳤네, 내가 진짜 10년째 엑스트라 하면서 이런 현장은 처음이야.”
“내 말이. 야외에서 드럼통에 불 피우는 대신 온풍기 있는 휴게실은 처음이라니까.”
호평이 곳곳에서 나오고.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의욕이 올라간 건 자연스러운 일.
그리고 이런 대부분의 처우 개선은-
도윤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우리가 좀 잘못 생각했던 것 같네요.”
미나의 말에 제운도 떨떠름하게나마 고개를 끄덕인다.
“좋긴 좋네.”
“그냥 좋은 게 아니라 아주 좋은 것 같은데요.”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은 이런 인식 자체가 없다.
주‧조연 배우와 아역, 그리고 몇몇 높은 위치의 제작진을 제외하면 ‘대우’를 해줘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당연하다.
그렇게 지금껏 봐 왔으니까.
물론 언론에서 몇 번 기사가 나오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배우나 스태프들의 폭로로 이슈가 된 적은 있었지만.
그건 잠깐 스치는 이슈에 불과했다.
그래서 제운도 그렇고, 미나도 그렇고 그냥 주요 배우들 대우나 잘 해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잘못 생각한 모양이다.
“지플릭스에서도 현장 실사 나온다고 하긴 했지만…… 솔직히 도윤이 아니었으면 안 했겠죠?”
“부끄럽지만, 아마도 그랬겠지.”
도윤은-
촬영에 합류하는 조건으로 다소 특이한 걸 이야기했다.
바로.
단역 및 모든 스태프들의 촬영 환경 개선이다.
이를테면 냉방, 난방이 제공되는 쾌적한 환경이라든가.
잠시 쉴 수 있는 공간.
최소한의 퀄리티가 보장되는 식사 등.
어찌 보면 당연한, 그러니까 도윤이 할리우드에서 일상처럼 보고 느낀 것들을 제안한 것이다.
그러면서.
만약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합류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아두었다.
어지간해서는 눈 하나 깜짝 않는 제운이 당황할 정도로 단호하게 말이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도윤의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촬영장 분위기는 눈에 띄게 좋았다.
물론 스태프들이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다니는 건 여전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눈에는 이전에 없던 생기가 감도는 것 같다.
사실 어느 나라를 가나 법으로 못을 박아두어도 사람을 노예처럼 부리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일.
쉽게 말해-
인식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바뀌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인데…….
이번 경우는, 도윤이라는 큰 영향력을 지닌 배우가 나섰고.
그 결과 많은 변화가 있었다.
단 한 사람의 제안이.
정말 많은 변화를 일으킨 셈.
“우리도 바뀌어야겠지만, 저렇게 행동하는 배우가 있을까 싶네요.”
“많이 배워야지. 미국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여기보다 나은 점은 분명히 있을 테니까.”
제운이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끼며 중얼거리는 사이.
도윤은 오늘 이주아와 본촬영에 앞서 대사를 맞춰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조금 더 힘을 빼세요. 네, 그 대사는 강세를 약간 낮추는 게 좋겠네요. 네, 들이쉬듯. 감정은 아주 좋습니다. 대사 처리 다시 가 볼까요?”
“네, 네, 선배님!”
자연스럽게 연기도 지도하고 있었다.
도윤이 직접 캐스팅한 만큼.
이주아의 잠재력은 뛰어났다.
리허설 때 호흡을 맞춘 배주호 못지않게 말이다.
물론 이번 <악의 재림>에서 맡은 배역 비중은 상당히 낮은 편이지만…….
도윤은 지금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이주아를 보며 속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번 작품이 끝나면.
이주아는 분명히 주목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올만큼은 아니어도.
성장의 기회를 분명히 거머쥐게 될 것이다.
회귀 전, 아주 어렵사리 데뷔에 성공하고도 작품을 잘못 골라 결국 빛을 보는 데 실패했던 이주아를 생각하면.
꽤 빠른 기회인 셈.
물론.
그 기회를 잡는 건 배우 본인의 몫.
그런 의미에서 이주아는…….
망망대해에 빠진 채 떠밀려온 판자를 붙잡기 위해 애쓰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주 간절하게 말이다.
“좋네요. 그대로 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오케이 사인 떨어지면 듣죠.”
도윤은 고개를 꾸벅 숙이는 이주아를 향해 씩 웃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촬영하러 갑시다.”
“넵!”
힘차게 외친 이주아는.
도윤의 뒤를 따랐다.
아까보다.
한결 가벼운 발걸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