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돌아온 악역(4)
<악의 재림> 오디션은 업계뿐만 아니라 대중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를 불렀다.
특급 PD와 작가 두 명이 출격했고.
무려 최도윤이 주연을 맡았다.
거기에.
<협조>를 기점으로 몇 달 사이에 200만 명의 한국 사용자를 확보한 지플릭스에서 독점 공개하기까지.
쉽게 말해.
누가 봐도 성공할 것 같은 작품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오디션에 엄청난 숫자의 배우들이 몰려들었고.
대중들 역시 큰 관심을 드러냈다.
그리고 대중들이 관심을 보인다는 건-
언론이 이를 놓칠 리 없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악의 재림> 오디션 현장에 나와 있는 박종화 기자입니다. 현재 오디션장 안에는 무려 수십 명의 배우들이 2부 오디션을 위해 대기하고 있으며, 현재 오디션이 열리는 장소 주차장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과연 어떤 배우가 화제의 드라마에 캐스팅될지…….”
특정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작품이 아니다 보니 취재도 거리낄 게 없다.
덕분에 이참에 인터뷰라도 해서 인지도를 높이자는 배우들이 기자들 주변을 서성이기도 했고-
이를 구경하러 온 팬들까지 더해지며 주변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거기다.
기자들 대부분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귀국 후 도무지 얼굴을 드러내질 않는 도윤의 인터뷰를 따려고 한 것.
원래 이 바닥 소문은 빠르고.
도윤이 오디션 자문위원으로 참가한다는 소식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사실 유출이라고 할 것도 없는 게, 오디션에 참가했다가 최도윤을 본 배우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여하튼 그런 의미에서 기자들은 귀국 당시를 제외하면 거의 인터뷰를 하지 않은 도윤이 어서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고.
그사이 도윤은…….
“오늘 최 배우, 제 똥차에 감사해야겠네요.”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하여간 하이에나들이야. 어떻게 저렇게 몰려들지?”
“최 배우가 워낙 뭐.”
제운의 10년도 넘은 그랜저에 타고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덕분에 기자들은 거기에 도윤이 타고 있을 거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근데 PD님 원래 이 차 아니잖아요.”
“맞아. 근데 오늘따라 타고 오고 싶더라더니.”
“덕분에 잘 빠져나왔네요.”
참고로.
뒷좌석에는 성호도 함께 타고 있었다.
나중에 차 끌고 가라고 하면 분명히 툴툴거릴 게 뻔해서.
일단 데리고 빠져나온 것이다.
하기야.
그냥 두고 차 빼라고 하면, 기자들이 당연히 그 차에 몰려들어 난리도 아닐 테니.
물론 성호는 그러거나 말거나.
“형, 저희 뭐 먹으러 가요?”
“고기.”
“와! 고기!”
고기라는 말에 그저 행복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 * *
<악의 재림> 오디션이 얼추 끝나가고.
캐스팅 윤곽이 정해진 가운데.
도윤은 마침내 긴 침묵을 깨고.
기자들을 만난 게 아니라.
“선배니이이임!”
“선배님!”
“우와! 진짜 왔어, 대박!”
“도윤이 왔냐?”
동료 배우들을 만났다.
“잘들 지냈죠?”
한올.
선우.
해영.
석준.
승원.
태규.
유나.
유준.
그리고 몇몇 배우들까지.
서로 모두가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도윤이 귀국했다는 소식에 자리가 마련되었고.
이렇게 오랜만에 왁자한 자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자리를 주선한 사람은 바로…….
“승원 선배가요?”
“나도 연락받고 놀랐다니까?”
“큼, 크흠.”
그 나서기 싫어하는 사람이.
이렇게 자리를 만들다니.
“도윤이 너 미국에서 좋아 보이더라.”
덕분에 도윤은 승원이 슬쩍 건넨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렸다.
“부러우세요?”
“따, 딱히 부러운 건 아니고…….”
부러운 모양이다.
하기야.
언젠가 듣기로, 여느 배우와 다를 바 없이 승원도 할리우드에 가길 원한다고 했으니.
왜 아니겠는가.
할리우드.
모든 배우들에게는 꿈의 무대나 다름없는데.
그리고 첫 시도부터 그걸 이루고 온 도윤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전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
물론.
‘전설’치고는 지나치게 소탈했지만 말이다.
“미국물 먹고 와서 소맥 안 마실 줄 알았는데.”
“안 그래도 거기 소주 비싸더라. 팩소주 챙겨갈 걸 후회했어.”
도윤은 능숙하게 소맥을 말더니 단숨에 들이켰고, 이어서 선우의 술을 받아 다시 소맥을 제조해 연거푸 들이켰다.
“크으.”
역시 이 맛이다.
이런 와중.
도윤은 이상하리만치 멀리 떨어져 앉은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휴가를 나온 선우와.
오늘 촬영을 마치자마자 달려온 해영이다.
‘싸웠나?’
아니면.
아직 모든 사람들에게 관계를 밝히고 싶지 않은 걸까?
그런데 그런 것치고.
둘의 표정이 썩 좋진 못했다.
‘싸웠구만.’
헤어졌으면 이야기가 들렸을 것이다.
둘이 여전히 서로를 힐끗거리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고개를 홱 돌리는 걸로 봐선…….
“싸운 거지 말입니다.”
“그런 것 같은데.”
도윤은 유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요새 잘 되는 것 같더라.”
유준이 <데드 로드>에 단역으로 출연하고 한국에서 주가가 어마어마하게 뛰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물었다.
유준은 부끄러운지 뒤통수를 긁적였다.
“헤헤, 이게 다 선배님 때문이지 말입니다. 소속사랑 재계약도 했지 말입니다.”
“잘됐네.”
유준은 확실히 떴다.
이전에도 분명히 뜨고 있었지만.
<데드 로드> 출연을 통해 그간 유준을 모르던 사람들에게서 확실한 인지도를 확보했고.
그 덕분에 각종 드라마와 광고에서 출연 요청이 쏟아지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 도윤보다 바쁜 사람이 바로 유준이었다.
“그래도 선배님 오신다는데 무조건 비워야지 말입니다.”
“그래, 고맙다.”
“어, 너무 뜨뜻미지근하지 말입니다.”
“그럼 말든가.”
“에이, 장난이지 말입니다.”
도윤이 뭐라 말하든.
강아지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유준은…….
이제 도윤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빨리, 더 크게 성공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도윤과 얽힌 다른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
유나 역시 단순 청순가련한 여주인공에서 좀 더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보유하게 되었고.
승원은 도윤을 만나 연기의 새로운 측면을 마주했다.
도윤 덕에 기존 소속사와 결별하고 이엔 엔터로 온 석준 역시 나름대로 잘 나가고 있었으며.
한올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차세대 배우로 불릴 정도다.
아무튼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도윤으로 인해 배우 인생의 전환점을 마주한 셈.
그러니 다들 바쁜 스케줄에도 도윤을 보기 위해 이렇게 모인 것이리라.
“위하여!”
“에이, 위하여는 너무 그렇다! 최도윤을 위하여!”
“그게 뭐가 다른데!”
“최도윤이 들어갔잖아!”
여하튼 분위기는 아주 좋았고.
도윤은 오랜만에 왁자한 분위기 속에서 먹고 마시고 즐겼다.
“선배님, 어디 가십니까?”
“화장실.”
“그럼 제가 경호해드리지 말입니다.”
“됐다. 비싼 몸 잘 챙겨라.”
그러다 도윤은 화장실로 향했고.
문을 여는 순간-
“……너.”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마주했다.
바로.
“…….”
서태주였다.
퀭한 눈.
푹 들어간 볼.
얼굴에 검게 그림자가 내려앉았지만.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도윤을 마주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뒤로 감추는 손까지.
어찌어찌 징역형은 피하고 집행유예를 받은 뒤 숨어서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까지는 들었는데.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술이라도 마시러 온 건가?
아니면…….
그냥 우연히?
물론.
도윤은 눈을 한번 마주친 뒤로는 그대로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기다려.”
서태주는 아닌 모양이다.
도윤은 자신의 팔목을 붙잡은 서태주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놀라울 정도로 가볍게 손을 떼어내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서로 갈 길 가자.”
“내가 너 때문에 그 뒤로 어떻게…….”
“아니지. ‘너’ 때문이지.”
그리고 확실히 못을 박아두었다.
그렇게 된 건.
내가 아니라 너 때문이라고.
“너만…… 너만 아니었어도…….”
서태주는 멍하니 중얼거렸고.
거기에 도윤이 쐐기를 박았다.
“그래, 계속 그렇게 살아. 쭉.”
그리고 그대로 지나쳤다.
옆에 아무런 사람도 없다는 듯이.
쏴아아아아…….
그리고 손을 씻은 뒤 뒤를 돌아봤을 때.
서태주는 더 이상 없었다.
마치.
신기루였던 것처럼.
또한 도윤 역시.
그저 아무렇지 않게 문을 닫고 나와.
자리로 돌아갔다.
“야, 도윤이 왔으니까 다시 말아아!”
“이분 취했네.”
“안 취했거든? 응?”
신기루는커녕.
아무런 사람도 만나지 않은 것처럼.
* * *
<악의 재림>.
그 관심이 점점 더 뜨거워지는 가운데.
도윤은 마침내 귀국 후 공식 활동을 재개했다.
처음은 모델이었다.
“아주 좋습니다! 원더풀합니다! 그렇죠. 좋습니다-!”
작가의 외침에 따라 이리저리 포즈를 바꿀 때마다.
“대박. 진짜 핏…….”
“나는 왜 이렇게 생겼을까?”
주변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감탄이 터진다.
표정, 풍기는 느낌, 소화하는 옷과 합쳐진 아우라.
모든 게 완벽했다.
이어서.
“도윤, 당신을 봐서 정말 기쁩니다. 당신을 아시아 시장의 엠버서더로…….”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명품 브랜드의 엠버서더로 위촉되는가 하면-
“최도윤 배우님이 원하시는 옵션과 색상으로 즉시 출고될 예정입니다. 말씀만 해주시면 내일 바로 자택에 탁송해두겠습니다.”
한 수입차 브랜드에서 도윤에게 앞으로 6개월 동안 자신의 브랜드 차량만 타고 다니는 조건으로 무려 무상 제공을 해주기까지.
성공이라는 건.
아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물론 도윤은 이 모든 관심과 선물에도 크게 기뻐하거나 하진 않았다.
“형, 형! 저, 저 이거 한 번만! 시트에만 앉아볼게요! 제발!”
“이거 구하기 힘든 모델인데. 오빠, 저 이거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릴게요.”
오히려 성호와 민주가 더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도윤은 성호에게는 차키를 쥐여 주고.
엠버서더로 위촉되며 받은 명품 하나는 민주에게 줘버렸다.
다만.
둘의 충성맹세를 받았지만 말이다.
“종신계약! 저 안 까먹었어요!”
“그럼요. 이제 계약 갱신됐어요.”
여하튼.
<데드 로드> 임팩트가 크긴 한 모양이다.
뭐, 미국 가기 직전에도 톱배우긴 했지만 돌아와서는 아예 다른 차원의 대우를 받고 있었으니.
그리고 그 덕분인지 이엔 엔터 상장 계획도 탄력이 붙은 모양이다.
“요새 대표님이랑 본부장님 거의 2주 넘게 집에 못 들어가셨어요. 상장 때문에 준비할 게 많으시다던데.”
성호의 말마따나.
이엔 엔터는 지금 초비상이다.
상장을 앞둔 상황이고, 심사 준비를 거의 마무리했으니까.
만약 상장만 된다면.
이미 이전에 주식을 지급받은 도윤은 당연히 큰돈을 벌겠지만.
사실 도윤은 회귀 후부터 돈에 별달리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건.
그래서 회사가 얼마나 크느냐.
회귀 전, 도산했던 과거는 이제 잊어도 될 만큼 이엔 엔터는 탄탄한 회사가 되었지만.
기왕이면 좀 더 큰 회사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를테면…….
3대 연예기획사에서 4대 연예기획사로 바뀌어 불린다든가.
‘아니면 내가 직접 차리든가.’
그리고 지금 생각처럼.
직접 차릴 생각도 하고 있었다.
물론 커다랗게 키우거나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소소하게 1인 엔터로 말이다.
경영은 적당한 전문가에게 맡기고, 도윤은 다른 배우들과 연기에 집중하는 식으로.
다만 딱히 나갈 이유도 없고, 머리 아프게 법인 설립 절차에 관여할 이유도 없으니.
여하튼 뭐.
선택지는 점점 넓어지고 있었고.
‘여유’도 생기고 있다.
적당한 심적인 여유 말이다.
미국에 갈 때만 해도 성공해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을 느꼈지만.
이제는 다르니까.
그래서 도윤은 그 어떤 작품을 시작할 때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맞이할 수 있었다.
“오늘 오빠 리딩하시는 동안 협찬사 미팅 좀 다녀올게요. 그동안 성호 부려먹으세요.”
“형! 그럼 오늘 그 차로 가요? 제가 운전할게요!”
“성호야, 원래 매니저가 운전하는 거야.”
오늘은 드디어 캐스팅이 끝나고 제작에 돌입한 <악의 재림> 리딩이 있는 날.
도윤은 호들갑을 떠는 성호를 따라 차에 올랐고.
곧.
부아아아아앙!
엔진이 거친 소리를 토해내며 두 사람이 탄 차가 빠르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