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45화 (145/200)

145.돌아온 악역(1)

도윤은 원래 한국에 있던 것처럼 착실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언론의 인터뷰 요청.

광고 촬영.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국회의원 비서실 연락까지.

그리고 그 외 수많은 요청들이 있었으나-

도윤은 단 하나.

<악의 재림> 대본에만 집중했다.

톱배우라는 이유로, 적당히 해도 시청자들이 봐주고 계약금이 입금되었다는 이유로 대충대충 하는 건 프로로서 자격이 없다.

도윤은 늘 그래왔듯-

신인 때 그랬던 것처럼 대본을 읽고 또 읽었으며, 그 넓은 자신의 방이 가득 차도록 자료를 모았다.

“와,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덕분에 옆에서 그걸 바라보던 동하는 혀를 내둘렀다.

도윤이 미국에 가 있는 사이 종종 들르더니 방학인 지금은 거의 여기서 살고 있는 동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집을 비워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도윤아.”

“…….”

“얘 또 이러네.”

불러도 도저히 듣지 못할 만큼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어릴 때도 그랬다.

뭘 하든 푹 빠져서는 귀에 대고 크게 소리치지 않는 이상 절대 돌아보지 않았던 녀석이다.

그래서 동하는 살며시 문을 닫고 나갔고.

도윤은 동하가 왔다 간 것도 모른 채 대본 분석에 집중하고 있었다.

‘느낌 좋네.’

<악의 재림>.

제목에서 물씬 풍겨오는 강렬함과-

주인공 ‘석주’의 캐릭터성.

이 모든 게 마음에 든다.

경후의 말처럼, <악의 재림>이 지플릭스에서 하건 미나의 작품이건 그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대본.

그리고 캐릭터.

이 두 개가 충족되지 못하면.

그 어떤 유명 감독도, 유명 작가도 도윤을 유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석주’는 마음에 든다.

사회가 만들어낸 ‘악(惡)’.

불우한 어린 시절을 이겨내고 간신히 사회에 자리를 잡았지만.

결국 과거에 발목을 잡히고야 만다.

하나뿐인 연인이 죽었고, 범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무엇보다 법은 약자의 편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자경단(vigilante)이 되었다.

악을 멸하는 악.

설득력 있는 사연과-

“세상은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거든.”

마음에 콕콕 틀어박히는 대사.

돈 있고, 명망 있는 자들만 지켜주는 법을 대신해 악인을 처벌한다는 점에서 액션씬도 상당수다.

그래서 빌이 만약 대본을 봤다면 걱정했을 거란 생각도 들었지만.

꼭 하고 싶다.

벌써부터 피가 끓는 기분이었다.

‘원래대로였으면 이런 작품은 절대 안 쓰셨을 텐데.’

그리고 자신으로 인해 새삼 미래가 바뀌었다는 것도 느껴진다.

미나는 로맨스 쪽에만 치중하던 작가였고, 그래서 <그 남자의 메모리>와 같은 작품들은 원래 도윤이 아는 미래에선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악을 멸하는 악이라…….”

한편으로는 방영되면 큰 이슈를 부르리라는 것도 짐작된다.

사적제재는 언제나 첨예한 대립을 부르는 화두.

법이 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개인 혹은 집단이 결정하는 모든 종류의 폭력과 제재.

찬성하는 측에서는 법이 제 기능을 못 하고 돈 있는 자들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으니 필요하다고 말하며-

반대하는 측에선 사적제재를 허용하는 순간부터 국가와 법의 의미가 사라진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아무리 봐도 사적제재의 정당성이 아니다.

드라마는 예술작품이고.

예술작품은 때론 사람들에게 많은 화두를 던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 <악의 재림>이 말하고 싶은 건 아마도…….

“법에 의한 정당한 처벌과 최소한의 평등이 존재하는 세상이겠지.”

안 그래도 최근 ‘고무줄 형량’으로 말이 끊이질 않는다.

같은 죄를 저질러도 돈 있는 자에게는 이런저런 핑계로 낮은 형량을 주고.

돈 없는 자에게는 엄벌을 준다.

또한 국민적 이슈가 되지 않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건들이 있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재미와 사회적 메시지를 챙길 수 있는 드라마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알고 있는가>가 직장인들의 진한 공감을 자아내며 한동안 신입들에게 ‘강 대리 앓이’를 부르거나.

이른바 ‘꼰대’라 불리는 상사들이 몸을 사린 것처럼 말이다.

아무튼.

미국에 돌아가기 전에 좋은 작품을 하나 찍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배고픈데.”

도윤은 고개를 힐끗 들어 시계를 바라봤다.

벌써 10시.

분명히 점심을 간단히 때우고 방에 들어왔던 것 같은데.

9시간 넘게 지나 있었다.

“차라리 담배를 다시 피울 걸 그랬나.”

도윤은 인상을 쓰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담배라도 피웠다면 밖에 나가며 허리라도 펼 수 있었을 텐데.

이건 뭐, 작품 들어가기 전까지는 폐인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애써 끊은 담배를 다시 피울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도윤은.

사락.

거의 일주일 만에 대본을 내려놓고 방을 나서더니.

“야, 소주나 한잔하러 가자.”

소파에 늘어져 TV를 보고 있던 동하에게 말했다.

그런데 동하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동하는 슬며시 몸을 일으키더니 굉장히 심각한 얼굴로 도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얼굴로?”

“왜?”

“너…… 가서 거울 좀 보고 와라.”

“뭔 소리야?”

도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휴대폰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살피다.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혹시 어느 문파에서 오셨소, 노인?”

아무렇게나 길게 자라난 수염.

뒤집어진 머리.

퀭한 눈.

누가 봐도.

진짜 폐인이었다.

“…….”

이런 와중 동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근데 세상 참 불공평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 얼굴로 클럽 가도 먹힐 것 같아서.”

“됐고, 씻으러 간다. 나갈 준비나 해.”

“오냐.”

* * *

도윤이 대본에 빠져 수염이 얼마나 자라나는지도 모르고 있었던 사이-

<악의 재림> 캐스팅은 아주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주연도 결정됐겠다, 이제는 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

하지만 난관이 하나 있었다.

“그냥 오디션 하지 말걸 그랬나요.”

“그러게.”

바로 <악의 재림> 출연을 위해 몰려든 어마어마한 숫자의 배우들 때문이다.

제운은 조연 하나에도 경쟁률이 1,000:1을 넘어가는 수치에 혀를 내둘렀다.

“이건 뭐…… 한 달 동안 해도 안 끝나겠는데?”

“저희 한동안 철야네요.”

“한동안이 뭐야. 촬영 기간 생각하면 촬영 끝날 때까지 철야지.”

하지만 어쩌겠나.

해야 하는 일.

배역은 누가 맡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

때문에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몰려도 캐스팅을 대충대충 할 수는 없는 노릇.

“괜찮은 배우들 많네요. 신인도 있고.”

“근데 너무 많아. 음, 어쩔까…….”

이런 와중.

제운이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최 배우 한번 불러볼까?”

“도윤이를요?”

“응. 내가 알기로 눈 좋다고 들었거든. 작품 고르는 눈 말고, 배우 보는 눈.”

그 말에 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 처음 듣는데요?”

“당연하지.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니까.”

제운은 그러면서 일전에 자신의 작품에 출연한 채한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도윤이 직접 이엔 엔터 오디션에 참가했고.

도윤의 강력한 추천으로 한올이 이엔 엔터와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 말이다.

“진짜요?”

“그것만 있는 게 아니라니까.”

그리고 종종 이엔 엔터에서 배우 공개 모집을 할 때 참여해 한두 번 슥 보고 고른 배우들이 모두 계약에 성공했고, 지금 업계에서 꽤 주목을 받는다는 사실까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래요?”

“나도 궁금해. 나중에 회사 차리려나?”

제운은 그러면서 휴대폰을 들곤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튼 물어나 보자고. 기왕 이렇게 된 거, 돈 더 챙겨줄 수 있으면 챙겨주고.”

“배우 겸 제작자로 넣자는 이야기신가요?”

“최 배우 정도면 못 할 것도 없지. 아, 물론 대본이나 촬영에 관여하지는 않는 선에서. 애초에 그럴 배우도 아니고 말이야.”

“가능만 하다면야…… 근데 한다고 할까요? 알잖아요, 배역 들어가고 리딩 전까지는 집에서 안 나오는 거.”

“그러게.”

그래도 일단.

밑져야 본전.

지플릭스 한국지사와 이야기된 사안은 아니지만.

아마 도윤이 캐스팅에 관여하는 것 정도야 그쪽에서 오히려 환영할지도 모른다.

혹시 아는가?

이번에 좋은 신인 하나 발굴할지.

“일단 해볼게.”

제운은 드디어 도윤에게 전화를 걸었고.

곧.

또 다른 난관에 부딪쳤다.

“……전화 안 받는데?”

“엥?”

* * *

도윤이 경후로부터 제운이 애타게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형은 도대체 왜 작품 들어가기만 하면 연락이 안 되는 건데요?”

“그러게.”

참고로 제운의 부탁을 경후가 들었고 경후는 그걸 또 성호에게 부탁해서 성호가 직접 집으로 찾아온 것.

도윤은 드물게도 멋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캐스팅 자리에 좀 참여해 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요.”

“날짜는?”

“되는 날 언제든요. 형 대본 분석 방해된다면 안 해도 된다고 하던데요.”

“흠.”

못 갈 이유는 없다.

도윤이 대본 분석에 미쳐 있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아예 주변을 못 둘러볼 만큼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집중력이 미치도록 좋을 뿐.

“몇 명이나 온다는데?”

“형 진짜 뉴스 안 보시는구나.”

“본론만.”

“조연도 기본 천 명 이상이요.”

“대단한데.”

“그게 다 형 때문인데요.”

“나 때문에?”

도윤의 모습에 성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히 형 때문에 이렇게 몰리는 거죠.”

“PD님이랑 작가님 때문이 아니고?”

“그것도 있겠지만, 형 선구안 좋다고 소문났잖아요. 형 하는 작품은 무조건 뜬다 이거죠.”

도윤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지금까지는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세상일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작품도 아니고 배우를 보고 지원자가 이렇게 몰린다는 말인가.

“뭐, 그런 것도 있을 텐데 중요한 건 글로벌 스타 최도윤이랑 같이 연기하느냐는 거죠.”

“글로벌 스타는 좀 빼자.”

“요샌 다들 그렇게 불러요.”

“그럼 뭐 어쩔 수 없고.”

“……요새 좀 뻔뻔해지셨네요.”

여하튼 뭐.

이유야 어떻든.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렸고, 그 바람에 제운과 미나가 도윤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사실.

“뭐, 못할 건 없지.”

“그럼 하는 쪽으로요?”

“어. 그렇게 전달…… 아니다, 내가 직접 할게.”

그간 대본을 분석하느라 연락이 안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미 연락이 된 마당에서 다른 사람을 통해 연락하는 것도 예의 없는 행동.

“아, 네. PD님, 최도윤입니다. 죄송합니다. 대본 분석하느라 정신이 없어서요. 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참여하는 방향으로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좋습니다. 다섯 시요? 네, 그럼 그때 사무실로 갈게요. 네, 내일 뵙겠습니다.”

그리고 전화를 마친 도윤은.

“그리고 이거는 오디션 참가 신청한 사람들 이력서요.”

성호로부터 서류 한 무더기를 넘겨받았다.

사락, 사락.

받자마자 서류를 넘겨보던 도윤은 흥미롭다는 표정이다.

이번에 이를 갈았는지.

이름값과 관계없이 조연급부터는 전원 오디션으로 선발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알고 지내는 배우의 이름도 눈에 띄고-

아직 알고 지내진 않지만 이름은 들어본 배우도 있다.

그리고.

미래에 성공할 배우도 눈에 띄었다.

도윤의 손이 멈추고.

눈에서 빛을 발한 건 바로 그 대목에서였다.

‘이 사람이…… 이때 신인이었구나?’

그건 분명히…….

보석을 발견한 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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