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톱배우가 선택한 작품
한국의 촬영 환경이 그리 합리적인 편은 아니라지만.
그 환경이 서서히 개선되어가고 있는 건 맞는 말이다. 효율을 추구하며 전체적인 촬영 기간도 줄고 여러모로 여유가 생겨가는 셈.
그런 의미에서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톱배우, 도윤이 한국에 머무르는 시간은 꽤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니까.
제작자들에게 말이다.
[<데드 로드> 시즌2 출연 확정 지은 최도윤, 한국에서 작품 찍고 갈까?]
[최도윤, 한국에 얼마나 머무르나?]
이미 한국에서 정상을 찍었고.
미국에 가서 찍은 첫 작품으로 엄청난 반향을 부른 배우가 한국에 왔다.
그렇다는 건 제작사들이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과연.
도윤을 캐스팅할 수 있을까?
아니, 캐스팅이라는 단어도 이제는 조금 이상하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는 자신들이 찾아가서 읍소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됐으니까.
“이게 다 뭔데요.”
“제작사에서 보낸 선물들.”
때문에 지금 이엔 엔터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택배가 날아든다.
도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와 무슨…….”
“도윤이 오니까 난리도 아니다, 그치?”
“최도윤 씨 지금 고향 가 있잖아요.”
“그치. 그래서 더 문제지. 오늘 올라오긴 하는데, 나도 걔 속을 잘 모르겠다. 작품을 할 건지 안 할 건지도 모르겠으니까.”
그래서 경후는 더 죽을 맛이다.
도윤이 아직까지도 답을 안 주고 있었으니까.
사실 뭐, 스케줄을 확정 짓고 한국에 들어온 건 아니다.
아무리 소속 배우라지만 도윤은 아예 사정 자체가 다른 배우니까.
그래서 도윤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자마자 2주 동안 팬미팅을 다니더니 이틀 휴가까지 내버렸다.
소개팅에서 바람을 맞으면 이런 기분일까.
‘도대체 뭘 하려는 건지.’
사실 한국에서 쉬기만 하다가 미국에 돌아가도 할 말은 없다.
최도윤이니까.
굳이 작품을 하거나 광고를 찍지 않아도 이미 이엔 엔터에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다 주고 있고, 그쯤 되면 배우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맞다.
아니, 법인 하나 만들어 독립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
보통 이쯤 되는 배우들은 아예 법인을 차려서 단독으로 회사를 꾸려버리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쉽다.
<데드 로드> 시즌2 촬영 전까지 한국에 괘 오랜 시간 있을 텐데.
그사이 가만히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휴식이라면 휴식이겠다만…….
결국 경후도 생각하길 포기한 가운데.
“뭐야.”
도윤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슬슬 사무실에 왔어야 할 시간인데.
전화가 걸려왔다는 건…….
“에이 설마.”
휴가 연장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경후는 알고 있다.
도윤이 그렇게 말하면.
자신은 들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결국 경후는 불길한 예감을 애써 억누르며 눈물을 머금은 채 전화를 받았고.
“어, 그, 그래. 출발했냐?”
침착하게 물었다.
그런데.
-네. 저 지금 강미나 작가님 만나러 갑니다.
“누, 누구?”
예상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고.
-미팅 좀 하러요. 공식적으로 하는 건 아니고, 개인적으로 만나는 거긴 한데 말씀은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야! 얼마든지 만나고 와도 돼! 법카 써, 법카! 아니다, 내가 갈까? 한정식집 예약해 줄까?”
경후는 그만 흥분해버렸다.
* * *
첫사랑을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첫사랑’이 맞긴 하다.
미나는 도윤을 통해 자신이 쓴 텍스트가 가장 완벽하게 구현되는 장면을 목격한 바 있으니까.
쉽게 말해.
미나에게는 최고의 배우.
‘페르소나’라는 단어까지는 좀 그렇지만.
미나에게는 페르소나나 다름없는 배우다.
여하튼 미나는 도윤을 만나기로 한 장소에 무려 30분이나 일찍 도착한 것도 모자라 아메리카노를 두 잔째 마시고 있었으며-
마침내 도윤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도윤이…… 맞지?”
로맨스 드라마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물었다.
물론 도윤의 대답까지 그러진 않았다.
“오랜만이에요, 강 작가님.”
“누나라고 부르라니까.”
“잠깐 아메리칸 스타일로 있다 와서.”
“설마 미국병 걸렸니?”
“그럴지도요.”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편안하게 말을 건넨 도윤은 미나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그나저나.
“근데 더 멋있어졌다?”
거의 1년 가까이 안 보다가 다시 본 도윤의 모습은 이전보다 더 매력적이었다.
더 넓어진 듯한 어깨.
아무렇게나 길렀지만 은근히 어울리는 수염.
은은하게 풍겨오는 좋은 향까지.
‘이게 뭐람.’
“아, 수염을 길러서 그런가. 그냥 이제 수염이 좀 익숙해져서요.”
턱을 매만지며 웃는 도윤의 모습은 아주 멋있어 보였고.
덕분에 미나는 반드시 도윤을 붙잡겠다고 결심했다.
“다른 게 아니라, 오늘 보자고 한 건…….”
“알아요. 작품 때문이신 거.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연락이 늦었어요. 혹시 제가 변한 거라고 생각하셨다면, 저 서운할 거 같은데.”
“그, 그럴 리 있겠니?”
솔직히 생각하긴 했다.
급이 높아진 배우들이 이전과 태도가 달라지는 게 어디 드문 일도 아니고 말이다.
여하튼.
“일단 지금 편성은 거의 확정이야. 아마 일주일 내로 결정될 것 같고, 내용적인 면에서 간섭도 없을 거고. 만약 원한다면 대본 수정도…….”
“전 작가님, 아니 누나 믿어요. 그리고 대본 수정까지 하면서 작품 할 거면 차라리 제가 작품을 썼죠.”
도윤은 한마디로 미나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고.
“할게요. 이번 작품.”
동시에 미나가 그렇게나 원하던 대답을 꺼냈다.
미나는 순간 울컥할 뻔했고.
“아마 한국 있는 시간 동안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도, 도윤아…….”
“저 미국 다녀왔다고 달라진 거 없어요. 누나 작품 보자마자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쪽 제작사랑 일정 조율하느라 결정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도윤이 그간 연락을 주지 못한 사정을 설명하자 얼굴을 붉혔다.
“난 그것도 모르고…….”
“아니에요. 괜히 이야기 새어 나갔다가 위약금이라도 물면 파산이라서요.”
농담이 아니다.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적당히 퉁치는 계약이 아니었으니까.
괜히 한국에 들어와서 공수표 남발하다가 시즌2 참여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도저히 미래를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
도윤은 아직 미국에서 이제 막 인지도를 높여가는 신인 정도지, 모든 걸 좌지우지할 만큼의 배우는 아니다.
물론 그런 배우였다고 해도 도윤이 제멋대로 굴 리는 없겠지만.
“그, 그럼 아무튼 한다는 거지? 한다고 했다?”
“본부장님께 아직 말씀은 안 드렸는데, 아마 한다고 하면 좋아하실걸요.”
“야호!”
미나의 환호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근데 드라마 찍어도 되는 거야? 시즌2 찍는 데 지장은 없고?”
“그걸 왜 이제 물어보세요?”
“지금이니까 물어보지. 괜히 물어봤다가 안 한다고 하면 어쩌려고?”
도윤은 어이가 없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안 한다고 할걸.”
“늦었어. 구두 계약도 계약인 거 알지?”
“코 꿰었네요. 어쩔 수 없죠.”
출연료도, 촬영 일정도, 추가적인 광고 등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었지만.
일단 도윤은 미나의 신작, <악의 재림> 출연을 확정 지었다.
알려지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호하고.
소수의 사람들-제작자-이 실망할 일이 벌어진 셈.
이런 와중.
“혹시 상대역은 정해졌나요?”
“왜, 싫어하는 배우라도 있어?”
“아뇨. 그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사실 지금 네가 첫 캐스팅이야.”
“네?”
도윤은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아연실색했고.
“너 뽑기 전에는 아무도 안 뽑을 생각이었거든.”
미나의 수줍어하는 모습에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럼…….”
“이제부터 뽑아야지. PD님 아마 엄청 바빠질 거야. 너 하는 드라마면 뭐, 사람 몰리는 거야 예정된 일이고…….”
미나의 말마따나.
도윤이 <악의 재림>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각 제작사는 어떻게 해서라도 소속 배우들을 드라마에 참여시키기 위해 갖은 애를 쓸 테고.
아마 공개 오디션에도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몰릴 것이다.
이미 미국에서조차 선구안이 증명된 도윤이다.
여기에 강미나라는 이름값까지.
사람이 안 몰릴 수 없는 셈.
그리고.
소식이 하나 더 있었다.
“참, PD도 곧 정해질 것 같아. 하겠다고 나선 PD들이 많은데, 그중 한 명이 제일 열정이 좋으시더라고.”
“제가 아는 분인가요?”
“응. 백제운 PD님. 알지?”
도윤은.
<알고 있는가>로 함께한 제운을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지금은 근황조차 들려오지 않는 서태주도 떠올렸다.
그래서일까.
역시 좋은 기억밖엔 떠오르지 않는다.
“좋네요.”
도윤은 씩 웃었다.
* * *
<악의 재림> 출연을 확정 지은 소식은 들불처럼 번졌다.
언론에서는 ‘왕의 귀환’이라며 보기에도 민망한 수식어를 붙이기도 했고.
몇몇 제작사들은 제발 <악의 재림>이 동시간대에 편성되지 않기를 간절히 빌고 있었다.
일단 나왔다 하면 시청률이 보장되는 데다.
스토리야 어떻든 역량 하나만으로 극을 이끌어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니.
심지어 <그 남자의 메모리> 이후 오랜만에 맡은 악역.
제목부터 악역 느낌이 물씬 풍기는 데다, 제작사에서 뿌린 보도자료에 ‘악역’이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던 것.
아무튼.
이엔 엔터는 축제 분위기였다.
“오늘 전 직원 회식이나 할까?”
“그거 좋죠.”
동민이 자신의 카드를 직접 하사할 만큼 말이다.
단 한 작품, 아니 단 한 개의 광고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익을 안겨주는 배우가 시간을 쪼개 작품을 찍겠다는데 어떻게 안 기쁠까.
“근데 진짜 괜찮은 거 맞지? 거기 프로듀서랑은 이야기된 건가?”
“테일러 씨도 흔쾌히 오케이했습니다. 뭐, 사실 마다할 게 없죠. 심지어 <악의 재림> 그거, 지플릭스 작품입니다.”
“지플릭스, 그렇지. 그래서 오케이됐군.”
거기다 <악의 재림>은 글로벌 진출에 매우 유리한 지플릭스 작품.
일단 공개되기만 하면 굳이 까다로운 판권 판매 및 현지화 절차 없이도 전 세계 모든 시청자들이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안 그래도 <데드 로드>는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플랫폼인 지플릭스를 통해 도윤 주연의 드라마가 공개된다면,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셈.
“도윤이 머리 잘 굴렸네.”
“지플릭스 작품이라 한 것보다는…… 그냥 작품이 좋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아무튼 잘된 일이잖아, 그치?”
“네. 그리고 이제부터는 저희 다른 배우들도 지플릭스 드라마에 적극 투입시켜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이지만, 앞으로 케이블과 지플릭스가 뜰 것 같거든요. 지상파 검열이 점점 심해지고, 여전히 로맨스만 강조하는 윗선을 생각해 보면…….”
미래를 아는 도윤이 들었다면.
훌륭한 선구안이라 평했을 경후의 예측.
아닌 게 아니라, 현시점에서도 이미 지상파는 한물갔다는 평을 듣고 있었고.
이름값 높은 작가와 PD를 모셔가기 위해 케이블이 거금을 뿌리는 건 별달리 이상한 일이 아니게 됐다.
“그쪽은 우리 박 본부장한테 맡길 테니까 잘해보라고.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 말하고.”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단 하나.
도윤에게만 집중할 때.
최고의 배우가 복귀했다.
경후는 피가 끓는 기분이었다.
벌써부터 고생길이 훤한 느낌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 맛에 일하는 거고.
더 열심히 일할 이유가 생겼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