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우디 쇼
파티가 열렸다.
정확히는-
주연 배우들끼리 작은 자리를 마련했다.
“이게 작은 자리라고?”
물론 안드레아가 멍하니 중얼거린 것처럼 스케일이 ‘다소’ 크긴 했다.
고작 넷밖에 참여하지 않는 ‘파티’에 수십 가지의 음식이 동원되고-
오늘 파티의 주최자 칼은 자신의 와인 셀러를 개방해 수백 가지의 와인을 선보였다.
“내가 아는 와인 셀러가 아닌데.”
“우리 중에서도 급이 다르잖아. 뭐든 논리적으로 생각하려고 하면 진다고.”
안드레아의 말에 사미르가 적절한 답변을 보냈고.
도윤은.
“오, 시동 거셨군.”
칼의 와인 셀러로 다가가 가장 눈에 띄는 와인을 골랐다.
그리고 칼은 감탄했다.
“역시 눈이 좋아. 그건 프랑스에서도 최고로 치는 브랜드라고. 무려 30년산.”
도윤은 어깨를 으쓱이곤 옆에 있던 사람의 도움을 받아 와인 한잔을 받더니 디캔딩을 마치고 조용히 맛을 음미했다.
그리고 내놓은 감상은.
“너무 써.”
상당히 솔직했다.
그 덕에 칼의 웃음이 터져버렸다.
“너무 정확한데?”
칼은-
지금까지 와인을 맛보고, 어떻게든 멋있고 있어 보이는 평을 내놓으려는 자칭 ‘와인 전문가’들을 많이 봐왔다.
쓰면 쓰다.
달면 달다.
뭐, 이 정도만 해도 누가 뭐라 할 게 아닌데.
꼭 얕잡아 보이는 게 싫어서 그렇게 평가한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도윤의 평가는 너무도 솔직해서 좋았다.
아니, 도윤의 이미지가 좋은 나머지 저런 말조차 ‘건방지다’라기보다는 ‘솔직하다’라고 생각한 걸 수도 있겠지.
“칼, 다른 건 없어?”
“아, 있지. 뭘 좋아해?”
기대감 어린 칼의 물음에.
도윤은 간단히 답했다.
“단 거.”
“취향 확실하네. 기다려보라고.”
그렇게 칼이 다른 와인을 꺼내오고, 서서히 파티 분위기가 시작되는 사이.
“도윤, 이제 촬영도 끝났는데 넌 어떻게 할 거야?”
사미르가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안드레아와 칼도 마찬가지였다.
<데드 로드>의 시즌1 촬영이 모두 끝난 상황에서.
도윤의 거취 문제는 이 세 배우뿐만 아니라 촬영장의 모두가 주목하고 있었으니까.
특히.
‘도윤을 잘 꼬셔보라고. 다음 작품에도 들어갈 수 있게.’
프로듀서 빌의 특명을 받은 칼은 어떻게 해야 도윤을 다음 작품에 붙잡아둘까 고민하고 있었다.
아무리 이 바닥이 돈으로 돌아간다지만-
그래도 배우가 작품을 택하는 기준에는 같이하는 사람도 분명히 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칼은 이제 한 달 뒤에 캐스팅 미팅을 진행할 영화, 에 도윤을 추천할 생각이다.
액션 블록버스터의 거장이 10년 만에 복귀해서 내놓는 그 작품.
‘어울리지. 딱 어울리지. 드라마 휴식기에 찍기도 좋고, 할리우드 환경을 경험하는 데 그만한 장르도 없으니까.’
칼은 도윤 정도라면 아시아계의 편견과 벽을 부수고 충분히 성공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쪽에서도 충분히 먹히는 마스크와 체구, 수염을 길렀을 때 풍기는 마초적이고도 섹시한 느낌.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는 연기력까지.
자신이 프로듀서였어도 분명히 탐을 냈을 만한 인재다.
여기에 듣기로…….
‘한국에서는 이미 톱을 찍었다지.’
찾아본 결과 도윤의 한국 내 위상은 엄청난 수준이기도 하고, 그 위상은 더더욱 대단해질 것이다.
<데드 로드>는 3화가 방영된 현시점에서 올 한 해 HBU 방영 드라마들 중 최고점을 찍고 있었으니까.
여하튼.
어떻게 할 것이냐는 사미르의 물음에 도윤은 이렇게 답했다.
“아직 확정된 건 없어.”
“오, 좀 튕기는데?”
“튕기기에는 일정이 너무 많지. 그것부터 소화해 보고 결정할 생각이야.”
도윤의 말마따나.
토크쇼를 비롯한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해야 하는 일정이 산더미다.
기어이 미국까지 날아온 한국 기자나 잡지 에디터와의 인터뷰도 계속 예정되어 있었고.
그 외 드라마와 관련은 없지만, <데드 로드>의 인기 덕분에 출연하게 된 프로그램까지.
참고로 지금.
도윤은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동양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엄청난 시선을 받고 있었다.
도윤이 연기한 ‘강석’이 풍기는 분위기나 극중 비중, 그리고 설득력 넘치는 연기가 화제를 불렀던 것.
특히, 유학을 왔다가 고립되어 어쩔 수 없이 아포칼립스 세상에 적응해간다는 점에서 비슷한 처지의 유학생이나 체류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어쩌면.
이 세상은 아직 아포칼립스가 아닐지 모르지만.
이방인에게 타국은 때론 아포칼립스와 같은 느낌을 주곤 하니까.
“잘 생각해 보라고. 도윤, 넌 굳이 한국에 갈 필요가 없어.”
“아직 안 정했다니까?”
“곧 갈 것처럼 그러니까 그렇지.”
“글쎄.”
도윤은 적어도.
미국에서의 일정을 모두 소화하기 전까지는 한국에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다만-
다음 작품에 대해서는 고민해 볼 생각이었다.
일전에 빌이 지나가듯 언급한 이 어떤 작품인지도 알아봐야 하고, 감독도 만나봐야 하니까.
그리고-
‘기왕이면…….’
현재 제작 논의 단계에 있다고 들은 <어론 바탈리언(Alone Battalion)>이란 영화가 궁금하다.
2017년에 개봉해서.
전 세계적으로 큰 흥행 수익을 올린 2차대전 배경의 전쟁 영화.
‘되기만 한다면야.’
도윤은 거기 등장하는,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과 애매한 감상을 남긴 동양인 배우 한 명을 떠올리고 있었다.
2차대전을 배경으로,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미군 주인공을 도와주던 일본군의 부역자로 살아가던 조선인.
중반부터 등장해 후반까지 제대로 된 대사 하나 없이도 큰 인상을 남겼었던 그 배역.
반대로, 그 연기가 너무 어색하고 같은 한국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도대체 뭘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던지라.
아쉬움을 느낀 것.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아냐. 아무것도.”
“그럼 술이나 마시자고. 내일은 우리 넷 다 아무런 일정도 없고, 그저 편하게 쉬면 되니까.”
하지만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걸 할 수도 있고.
그걸 하면서 다른 걸 할 수도 있고.
이제 도윤에게-
선택지는 어마어마하게 넓어졌으니까.
* * *
[<데드 로드>, 초반 거센 흥행…… ‘아시아의 한계’ 넘은 최도윤?]
[OSN, 긴 협상 끝에 <데드 로드> 판권 수입…… 이제 한국에서 정식으로 <데드 로드> 본다]
[최도윤, <데드 로드>에서 보여준 강렬한 연기와 풍부한 분량!]
[이제는 ‘월드스타’? 섣부르나 행복하다!]
<데드 로드>.
이미 미국에서도 큰 화제를 끄는 드라마의 인기는 한국으로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단순히 한국 배우가 꽤 높은 비중의 배역을 맡았고, 심지어 호평까지 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지금이야 살짝 사그라들었긴 해도 ‘미드 열풍’이란 현상이 있었을 만큼 미드 애청자들이 많았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미드에 대한 관심이 순식간에 되살아난 것.
물론.
도윤의 연기가 좋았고.
시즌2 출연도 거의 확정되었을 까다로운 미국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는 사실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여하튼.
이런 이유로 <데드 로드> 촬영을 마친 도윤은 각종 광고에 출연하거나 다른 배우들과 함께 토크쇼에 나가는 등, 한국에 있을 때 못지않은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고.
“도윤, 시즌2에서 혹시 죽을 것 같습니까?”
“제작진의 의지에 달렸죠. 저는 개인적으로 ‘강석’이 죽을 만한 인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시즌2 출연에 대한 의지를 은근히 피력했다.
사실.
이미 <데드 로드> 촬영이 끝나고 첫방이 끝난 시점에 도윤은 시즌2 출연 제안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지금 출연 중인 이 <우디 쇼> 촬영 직전에 빌과 만나 사인까지 마친 상황.
“도윤, 한국에선 당신을 최고의 배우 중 하나로 꼽더군요. 우리 <우디 쇼>에서 기회를 드릴 테니 미국 시청자들에게 어필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음, 전체 배우로 봤을 때는 모르겠지만 현재 20대 배우들 중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죠. 근데 혹시 이거 편집되나요?”
“오, 죄송하지만 전 도윤 당신의 분량은 절대 편집하지 않겠다고 방금 막 맹세한 참입니다.”
“끔찍한 쇼네요.”
이런 한편으로 한국에 있을 때와 달리 자신감을 가득 품은 대답을 하는 등.
도윤은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바라보던 성호가 걱정할 만큼.
“한국에서 건방지다는 소리 듣는 거 아닐까요? 형 예전 모습 나오려나.”
“오빠 예전 모습? 저번에 말한 그거?”
“네.”
반면 민주는 성호와 달리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랑 다르잖아?”
“뭐가요?”
“그때는 안하무인으로 굴면서 자기한테 취해서 건방졌다면…… 지금은 좀 다르지 않나?”
민주의 말처럼.
지금의 도윤은 조금 달랐다.
“그냥 오빠 정도 되니까 할 수 있는 말처럼 느껴지는데.”
“그런가요?”
“저 정도로 불편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냥 다른 20대 배우 팬이거나, 아니면 매일 유교 경전을 읽는 사람이거나.”
“한국 들어가면 기자들이 물어뜯을 텐데.”
그래도 그치지 않는 성호의 걱정.
하지만 민주는 그런 성호를 간단히 안심시켰다.
“오빠가 언제 기자들 신경 쓰는 거 봤어?”
그러는 사이.
“도윤, 으음. 익명의 제보에 따르면 당신과 함께 여기 온 사람들도 상당한 재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중 인상 깊은 사람 한 명이…… ‘한국의 더 락’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데, 맞습니까?”
“그런 별명은 잘 모르겠지만 ‘미국의 더 락’에 밀리지 않는 체구인 건 확실해 보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조사한 건지 <우디 쇼>에서는 도윤의 모든 것들을 낱낱이 파헤칠 각오로 질문을 던져댔다.
도윤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대목.
그런 와중.
“혹시 노래도 잘합니까?”
진행자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고.
“어, 어어?”
“안 되는데.”
성호와 민주가 경악했다.
하지만 도윤은…….
“제가 노래 좀 합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자기가 한국에서 유명한 가수라도 된 양.
참고로 이건 사전 안내가 없었던 대목이었다.
어느 쇼에 가나 진행자의 성향이나 상황에 따라 돌발 질문이 나오긴 해도…….
이건 막아야 한다.
노래만큼은!
그런데.
“어, 어쩌죠?”
매니저가 손날로 목을 긋는 제스처를 아무리 다급하게 하더라도 알아서 잘라줄 PD도, 작가는 없었다.
여기는-
미국이었으니까.
덕분에 성호는 물론, 어지간해서는 표정 변화가 없는 민주조차 당황해서 방법을 찾아보려던 그때.
“자, 그럼 이제 도윤의 노래 쇼를 보시겠습니다!”
기어이 진행자의 선언 속 명곡 중 하나인 의 인트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역시나 예상대로 도윤은.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역시나 핫한 스타답습니다. 노래 하나도 그냥 부르질 않아요!”
웃기게도 이 모습은 진행자를 완벽하게 만족시켜 버렸다.
음정도 제대로 안 맞고, 고음은 물론 박자조차 중간중간 놓쳤는데…….
“원래 이렇게 부르는 게 더 힘들거든요. 이런 자리에서도 정말 센스가 돋보이는군요. 이로써 도윤은 아주 노래를 잘한다는 결론이 나온 것 같은데, 맞습니까?”
“보통은 다들 그렇게 생각하더라구요.”
오히려.
이걸 다른 쪽으로 오해한 모양이다.
그래서 지켜보던 성호와 민주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고.
“……잘 된 거 맞죠?”
“그런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