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40화 (140/200)

140.누가 있겠어?

미국에는 분명히 놀거리가 풍부하다.

당장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들을 돈만 주면 ‘합법적’으로 즐길 수 있다.

흔히들 생각하는 그렇고 그런 거 말이다.

물론 도윤은 거기에 큰 관심이 없었다.

한국보다 파파라치가 많은 곳이 미국이며-

지금이야 뭐, 알아보는 사람도 없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도윤의 성격상 ‘그런 것’들을 즐길 리 없다.

오죽하면 성호가 제발 나가서 좀 놀아보라면서 무슨 엄마라도 된 것처럼 이야기할까.

그만큼-

도윤은 한국에서도 그렇고.

미국에서도 나름 ‘금욕적’인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약? 그런 거 왜 해.”

“글쎄, 난 관심 없어서”

“오, 다들 도윤 앞이라고 이렇게 말한다 이거지? 좋아. 나도 관심 없어.”

촬영 내내 붙어 다니던 칼, 사미르, 안드레아 모두 그런 쪽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뭐, 아닌 척하는 걸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할리우드 배우들이 약을 하면서 질펀하게 노는 거야 익히 알려진 사실이니.

주(州)에 따라서는 대마초 따위 약으로 취급도 안 해주는 게 바로 미국이란 나라니까.

여하튼 그런 의미에서 4인방은 죽이 꽤 잘 맞았다.

끝나고 각자 아는 바에 가서 한잔 기울이는가 하면-

“죽이는데.”

“와우.”

이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돈이 많고 가장 많은 작품을 찍은 칼의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놀러 가 밤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생각 이상으로 건전했고, 아무리 ‘불건전’해 봐야 도수 높은 브랜디 정도뿐이었지만-

도윤에게 이 정도는 충분했다.

물론 유혹이 아주 없던 건 아니다.

“헤이, 한국에서 왔다면서? 좋은 거 하나 해볼래?”

언젠가는 촬영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잠시 밖을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알아본 건지 누군가 접근해 도윤에게 약봉지를 살살 흔들어 보이기도 했고.

“크흠, 거…… LA 한인회장이 한번 보고 싶어 하는데 말입니다.”

대뜸 한인회에서 왔다는 사람이 은근히 떡고물을 바라는 눈치여서 말없이 돌려보내기도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두칠이 꽤 활약했다.

“형님, 원래 미국이라는 나라가 이런 곳입니다. 눈 뜨고 있어도 코 베어 간다구요. 일본이랑 또 다른 세상이죠.”

“무슨 전문가처럼 말한다.”

“일본에서 알고 지내던 야쿠…… 아차차, 친구가 말해준 건데, 미국 애들이 제일 무섭답니다.”

“너보단 덜 무섭게 생겼을 것 같은데.”

“아이 참, 형님. 생김새가 아니라 하는 짓이요.”

“아무튼 덕분에 살았다.”

“이제는 무조건 저 데리고 나가세요. 혹시 저한테 무슨 일 생기면 성호라도. 여기는 말입니다, 잃을 게 없는 애들이 많아요. 어느 나라나 다 그렇겠지만요.”

그래도 뭐.

두칠 외 프로듀서 빌이 붙여준 경호원들도 있으니.

안심이라고 해야 할까.

총알 날아오는 것도 막을 기세였으니.

아무튼 촬영이 거의 끝나가는 가운데 어느 정도 미국 생활에 적응한 도윤은 서서히 일상을 즐기고 있었고.

슬슬 한국 소식도 찾아볼 여유를 갖추게 되었다.

‘유준이는 잘 돌아가서 신작 촬영 들어갔고, 해영이도 잘 찍고 있고, 한올이는 미팅 중이고…… 선우는 아직 전역하려면 멀었구나.’

그리고 그 외 다른 사람들의 소식까지.

[오빠! 나 미국 가면 촬영장 구경시켜줌?]

[넌 못 들어가. 못생겼다고 쫓아낼걸.]

[-지는.]

[오빠한테 지는이 뭐냐?]

[데이터 아깝다. 톡으로 그만들 좀 싸우렴.]

언제나 시끌벅적한 가족들과.

[도윤아, 힘든 일 있으면 꼭 말해라. 알았지?]

물가에 자식 내놓은 사람처럼 잘 적응하고 있다고 말해도 걱정투성이인 수철.

여기에-

[도윤 씨, 한국 언제 와요?]

[미국에도 소주 팔아요?]

[도윤아, 너 없으니까 드라마 찍을 맛이 안 난다.]

지금까지 함께했던 PD, 감독, 작가들의 연락까지.

성과를 내고 돌아가야 할 이유들이.

그야말로 한가득이다.

부담감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욕망은 있다.

그래서 도윤은.

방영이 얼마 남지 않은 오늘도.

대본을 들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 * *

도윤이 미국에 있는 사이.

동민과 경후는 이엔 엔터의 IPO(기업공개), 그러니까 주식시장 상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윤을 시작으로 추진력을 얻었고, 이후 이름값 있는 배우들과 포텐 좋은 신인들을 대거 영입하며 현재 높은 실적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

물론 상장이라는 게 단순히 매출이 높다고 반드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업종 특성상 상장하는 편이 성장에 좀 더 유리하고.

앞으로 도윤의 경우처럼 미국 시장에 진출해 다른 기업과 연계할 일이 많을 때를 고려하면.

상장이 필요한 건 분명한 일.

그래서 상장예비심사를 위해 회사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장외주식으로 이미 배분한 주식을 가진 내부 주주들의 머릿속도 복잡해졌다.

물론 이엔 엔터의 지속적인 성장이 예측되는 만큼 대부분은 들고 있겠지만.

몇몇은 상장 효과로 ‘떡상’할 게 분명한 주식을 팔아치울 생각도 있으리라.

여하튼 뭐.

이런 상장 준비의 일환이자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아 총괄본부장으로 승진한 경후는 하루하루 미치도록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오케이, 목요일 저녁 9시? 다시 확인해 봐. 한국 시각도 체크하고. 어, 도윤이 지금 촬영 중? 어, 어. 촬영 끝나면 전화해 달라고 해줘. 그래. 끊을게.”

한국보다 약 16시간 느린 LA 시차에도 굴하지 않고 새벽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업무를 이어가는가 하면-

“아, 최도윤 배우 스케줄이라면…… 조금 더 고려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네, 아시다시피 아직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언제 돌아올지도 저희도 예측이 안 되는 상황이라서요. 네, 네. 알죠. 근데 아마 상황이 좀 여의치 않게 되면 돌아와서 광고는 찍더라도 작품 촬영은 아마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래도 PD님 작품은 꼭 전달하겠습니다. 네, 조만간 한잔하시죠. 네, 네. 감사합니다.”

도윤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를 대비해 스케줄도 조율하고 있었다.

사실 하루에 걸려오는 전화의 반이 도윤의 스케줄에 대한 문의였다.

대부분은 팀장급에서 적당히 쳐낸다고 하지만, 원래 이 바닥이 다 그런 만큼 경후에게 다이렉트로 걸려오는 전화의 양도 상당했다.

한편으로는 안도감도 든다.

‘그래도 미국 갔다고 죽은 건 아니네.’

흔히들 미국 진출한 배우들은 서서히 잊히기 마련인데-

<데드 로드> 촬영이 순조롭게 이어지고 이제 슬슬 방영할 때가 되어서일까.

도윤에 대한 러브콜은 정말 끝도 없었다.

몸값이 얼마든 상관없다고 말하는 건 예사고.

잠깐 출연이라도 좋으니 얼굴만 비춰달라고 하는 감독이나 PD도 부기지수.

짧은 시간 동안 찍을 수 있는 광고 촬영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도윤과 이야기해서 광고 몇 개는 미국 현지 스튜디오를 빌려 찍는 식으로 진행하긴 했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야, 도윤이 첫방인데 좀 쉬어라.”

“도윤이 덕분에 쉴 수가 없네요. 그래도 보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동민과 경후는 마침내 첫선을 보이는 <데드 로드>를 시청하기 위해 대표실에 모여 있었다.

물론 경후는 여전히 바쁜지 서류들을 한가득 늘어놓고 검토하고 있었으며.

동민 역시 경후에게 넘겨받은 서류들을 체크하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심사를 앞둔 상황이라 둘의 시선은 TV 쪽으론 가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시작한다.’

‘시작하는군.’

그래도 도윤의 작품이라서일까.

드라마 오프닝이 나오고.

마침내 드라마가 시작되자.

둘의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조금씩 TV로 향한다.

처음에는 서류와 TV를 번갈아 보더니.

20여 분이 지나고 도윤이 처음으로 등장하자 아예 TV 쪽으로 고정되었다.

와드득!

죽은 자들을 도끼로 내리치고, 으깨고, 목을 날리는 화끈한 연기에 저도 모르게 눈을 떼지 못하더니.

[그워어어어어!]

다 ‘죽은’ 줄 알았던 죽은 자 하나가 되살아나 덤비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내려앉았다.

“후우.”

그리고 ‘강석’이 위기를 벗어나자 사전에 이야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하…….]

죽은 자들을 모두 처리하고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쉬는 ‘강석’의 모습에는.

“좋은데?”

“이야…….”

이제는 새삼스레 할 필요도 없을 줄 알았던, 도윤의 연기에 대한 감탄을 쏟아낸다.

그리고.

이 감탄은 어렵사리 케이블을 우회하거나 비싼 돈을 들여 해외 채널이 나오도록 기계를 설치한 시청자들도 마찬가지.

[데드 로드 마이너 갤러리]

-와 연기보소 ㅋㅋㅋㅋㅋㅋㅋ

-ㄹㅇ 드라마 존잼인데 여기에 최도윤까지 끼얹네 ㅋㅋㅋㅋ

-1화만 보면 일단 역대급 좀비드라마 맞음 ㄹㅇ루 ㅋㅋㅋ

뭐, 이렇다 해도 대부분은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보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결국 미국 시청자들의 반응이다.

그리고 그 시청자들의 반응은.

아주 훌륭했다.

“좋아. 아주 좋아.”

빌이 콧노래를 부를 만큼 말이다.

“광고주들 반응도 좋고, 신규 광고 타진도 계속 들어오네요. 역시 냄새를 잘 맡는 것 같습니다.”

레이첼의 보고처럼 시즌1 1화가 끝나기도 전에 쏟아져 들어오는 문의.

한국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광고를 위해 드라마가 존재한다’라는 말이 있는 미국 드라마 시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다.

물론.

“‘초퍼’와 ‘미닉스’에서 PPL 문의도 들어왔네요. ‘초퍼’ 쪽에서는 굶주린 주인공 일행이 자기네 사탕을 발견하고 먹는 장면을 넣어달라고 하는 것 같고, ‘미닉스’는…… 좀 무리네요. 발전기를 돌려서 자기네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하는 장면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초퍼’는 받고 ‘미닉스’는 좀 더 논의해 보자고. 그나저나, 어차피 넣어 봐야 시즌2일 텐데.”

“그걸 예상하고 하는 것 같습니다.”

“미리 해둬서 나쁠 건 없지만, 좀 더 보자고. 그때 가면 지금 값이 아닐 테니까.”

덕분에 프로듀서 빌의 머리는 팽팽 돌아가고 있었고.

특히.

“예상대로 이쪽에서도 광고가 많이 들어오네요.”

한국 쪽에서 쏟아지는 문의에 빌은 상당히 인상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패션 브랜드에 주얼리에 식음료에…… 자동차도 있군?”

“주인공 일행이 잠시 타고 다니는 차에 자신들 브랜드를 사용해 달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원한다면 자기네들 프리미엄 브랜드 차량도 주연 배우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는군요.”

“지금까지 문의 들어온 회사들 중에서 자동차 쪽은 있었나?”

“한국 쪽이 처음입니다.”

그리고.

결정도 빨랐다.

“그럼 그거 받자고. 우리 주연 중 한 명 체면도 살려줄 겸.”

“괜찮을까요? 분명히 앞으로 더 좋은 브랜드에서도 들어올 텐데. 지금 포드와 혼다에서도 곧 메일을 줄 것 같긴 합니다만.”

“이런 큰 건은 먼저 준 쪽으로 보자고. 그리고 말했잖아? 우리 주연 배우 한 명 체면 살려주자고.”

레이첼은 그 말에 일부는 동의하지 않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너무 그렇게 의문 가지지 말라고. 내 예상대로라면…… 이번 <데드 로드>의 라이징은 그 녀석이 될 테니까.”

“도윤 말입니까?”

레이첼의 물음에.

빌은 피식거렸다.

“그럼 그 친구 말고 또 누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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