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아직 안 갔나?
한국의 영화 감독을 만나본 외국, 특히 할리우드의 영화 감독들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첫 번째로, 감독에게 거의 전권이 부여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국은 감독이 스태프를 지정하는 것부터 배우를 다루고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총체적인 권한을 부여받는다.
반면.
할리우드의 경우 어지간한 명성의 감독이 아닌 이상 프로듀서와 권한을 양분하며.
그 명성 높은 감독이라 할지라도 전권을 쥐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촬영 시간의 문제다.
한국은 애석하게도 여전히 스태프들에 대한 노동 착취가 빈번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를 문제 삼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유는 간단하다. 예전부터 그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은 다르다. 근로계약서는 물론 정해진 근로 시간 외 근무는 거의 없고.
만약 하게 되더라도 반드시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
그건 배우도 마찬가지.
때문에 할리우드의 감독들은 한국 감독들을 만나면-
묘하게 부러워하면서도 혐오감 어린 시선을 내비친다.
자신들도 촬영을 더 이어가지 못해 아쉬워하는 순간이 존재하나.
왜 촬영을 더 해서는 안 되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비정상적인 촬영 환경에 거부감을 드러내는 셈.
여하튼 이런 의미들로 미루어볼 때.
도윤은 총감독 크리스의 마음에 쏙 드는 인재였다.
“뭐? 네 시간?”
“네. 주차장 관리인의 말에 따르면, 네 시간 전에 배우가 탄 차량이 들어섰다고 하는군요.”
“세상에.”
본촬영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본촬영 전에 배우들끼리 리허설을 해보고 단지 세트장을 둘러보는 데 의의가 있는 일정인데.
무려 네 시간이나 일찍 왔다니.
‘뭐지? 시각을 잘못 알려줬나?’
그렇게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총감독이 물었지만.
“혹시…….”
“시간을 착각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와서 세트장도 둘러보고, 이상한 기색 없이 기다렸다고 하니까요.”
“혹시 심심해서 그랬던 건 아닐까.”
“그랬다면 LA의 풍부한 놀거리를 즐겼겠죠. 어떻게 보면 체류자 아니겠습니까?”
“그야 그렇긴 한데…….”
크리스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가운데.
도윤이 다가와 크리스에게 인사했다.
“감독님.”
“오, 도윤. 일찍 왔다면서?”
“그냥 호텔에만 있기 답답해서 왔습니다.”
진짜였다.
시간을 착각한 게 아니었다니.
‘아시아인 특유의 성실함인가?’
이것도 색안경이라면 색안경이라지만-
솔직히 말하면 인종 불문 이런 성실함과 노력은 ‘좋은’ 색안경을 끼게 만든다.
상대가 예뻐 보이는 색안경 말이다.
사실 뭐, 일찍 오는 게 얼마나 대수냐만…….
‘멀리서 와서 이렇게 노력하는데 대수롭지 않을 리가 없지.’
덕분에 크리스는 첫 미팅 때 도윤에게 감명받은 이후 또 한 번 감명을 받았고.
“참, 릭이 아주 칭찬하던데. 사격 훈련을 훌륭하게 소화했다면서? 듣기로는…… 한국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고?”
“네. 2년 정도 받았습니다.”
“훌륭해. 역시, 준비된 인재였어.”
크리스의 극찬에 씩 웃는 도윤.
이전처럼 칭찬에 겸양을 떨거나, 지나친 겸손을 보이진 않는다.
그게 오히려 자신을 너무 낮게 보이게 만들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참, 오늘은 리허설이야. 초반부만 한번 맞춰보고 세트장을 둘러볼 예정이야. 아주 기가 막히게 만들어졌으니 기대…… 아, 미리 봤다고 했었나?”
“훌륭하던데요. 물론 감독님이 직접 소개해 주시면 더 훌륭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크리스가 씩 웃고.
옆에 있던 조연출은 어깨를 으쓱인다.
크리스가 이렇게 신나 하는 모습은 처음 본다는 듯이.
하기야.
조연출인 자신이 봐도 성실함과 노력은 알아줄 만하다.
직접 연기하는 모습을 못 봐서 아쉽긴 하지만-
크리스의 말에 따르면 그만한 수준의 연기자는 찾기 힘들 거라고 하니.
더군다나, 아직 완벽하진 않은 발음이지만 대사를 잘 소화해 내 오히려 디테일이 살아난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래서인지.
연출자로서 상당히 기대되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네슬리 씨는 오늘 늦는다는군요.”
“뭐?”
“어제 친구들과 파티가 있었다고 합니다. 으음, 뭔가 구구절절하게 적혀 있는데…….”
“쓸데없는 소리 말고, 첫 리허설부터 지각이라 이거군.”
미국이나 한국이나.
시간 관념 없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건 동일하다.
그 증거로 크리스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누구는 무려 네 시간이나 일찍 왔는데.
누구는 무척이나 당당하게 지각한다고 알려온다?
“빌은 이 사실을 아나?”
“모르겠죠. 하지만 곧 귀에 들어갈 겁니다.”
“그렇지. 빌은 모든 걸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 상황을 지켜보던 도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주연 배우가 늦든 말든.
자신은 자신의 연기를 하면 그만이다.
누군가 자신을 건드리지 않는 한 말이다.
이건 도윤이 연기를 시작했을 때부터 지켜 온 일종의 신념.
상대가 늦는다고, 자신마저 짜증을 품을 필요는 전혀 없다.
“아무튼 가자고. 이제 30분 남았군. 또 누가 늦는지 한번 봐야겠어.”
이런 가운데.
크리스는 이참에 도윤을 본보기 삼아.
배우들을 한번 장악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첫 희생양은 바로.
리엄이었다.
* * *
안드레아 로드리게스.
<데드 로드>의 주연 4인방이자, 4인방 중 홍일점.
우루과이 출신의 안드레아는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우연찮게 캐스팅 담당자의 눈에 띄었고, 미국으로 건너와 차지한 첫 조연에서 상당한 인상은 남겨 주목받는 신인으로 선정되었다.
그 결과 <데드 로드>의 주연 중 한 명으로 발탁되었고, 리엄 네슬리라는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와 러브라인을 보장받기까지.
하지만.
안드레아는 불안했다.
안드레아는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수많은 배우들이 캐스팅을 확정 짓고 하차하거나 드라마 중간에 대뜸 배역이 ‘사망’하는 일을 많이 봐 왔다.
미국의 독특한 환경에 기인한 일이지만.
여하튼 아직도 ‘이방인’이라 스스로를 생각하는 안드레아에겐.
불안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다.
안 그래도 본국 우루과이에서는 안드레아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안드레아는 이번 작품을 반드시 해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까지.
더군다나.
자신만을 바라보는 가족 및 친지들을 생각하면…….
‘깊게 생각하지 말자.’
물론.
이렇게 아무리 주문을 되뇌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더더욱 불안이 찾아올 뿐.
특히, 사격 훈련에서 별달리 성과를 보이지 못한 이후로 안드레아는 자신감을 꽤 상실한 상태.
“안드레아,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총 그거 좀 못 쏜다고 네 매력이 사라지는 게 아니야.”
“하지만 존, 여기는 미국이라구요. 미국인들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총을 못 쏘면,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괜찮아질 거야. 정 안 되면 감독에게 총을 천천히 배워가는 배역으로 바꿔 달라고 해도 되는 거고.”
“그게 가능했으면 진작 이야기했죠.”
그러면서 안드레아는.
같은 처지의 ‘이방인’이면서, 자신보다 이미 몇 발은 앞서 나가는 듯한 한 배우를 떠올렸다.
자신처럼 이미 한 작품을 한 것도 아니고.
고작 두 달 전에 미국에 왔다는데.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보이는 신뢰감은 장난이 아닌 그 배우 말이다.
“저 사람은…… 한국에서 왔다고 했었죠?”
“그렇다는데. 왜?”
안드레아는 매니저 존의 물음에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나보다 나은 것 같아서.”
“안드레아, 제발. 모두가 널 주목하고 있다고. 잘 생각해 봐. 여기서 너보다 재능이 뛰어난 배우가 도대체 어디 있겠어? 둘러보라고. 너는 고작 조연 한 번에 엄청난 주목을 받고…….”
“저 사람은 조연 한 번 안 하고 바로 주연을 맡았죠.”
“…….”
존의 말문이 막힌 가운데.
안드레아는 여전히 흥미롭다는 시선으로 도윤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에 대한 관심은 거기까지였다.
어차피-
방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모를 일.
안드레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고.
그 생각은 리허설이 시작될 때도 유효했다.
“안드레아, 오늘 끝나고 뭐 해? 내 친구들 좀 소개시켜 줄까?”
거기다 틈만 나면 추근덕대는 리엄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것도 있고 말이다.
여하튼.
안드레아는 도윤이 자신에게 어떤 깊은 인상을 남길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리허설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게 잡지 말고 가볍게 갑시다. 의상도 준비 안 됐고, 어차피 리허설이니까요. 느낌만 보는 겁니다. 느낌만.”
크리스는 주연 4인방을 불러모은 뒤 특정 씬에서 감정을 살려줄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리엄은 영 마음에 안 드는지.
“그래서 언제 끝납니까?”
뭔가 심술이 난 듯한 표정이다.
안드레아가 자신에게 별다른 호감을 안 보여서인지.
아니면 얼마 전부터 눈에 거슬리기 시작해 오늘도 자신과 시선조차 안 섞는 도윤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여하튼.
기분이 나쁜 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잘못 걸렸다.
“꽤 바빠 보이는군.”
“네. 제가 좀.”
“그럼 좀 일찍 오면 좋았을 텐데.”
“…….”
크리스의 예상지 못한 반격에 리엄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뭐야?’
리엄은 애초에 크리스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프로듀서의 눈에 잘 들고.
자신의 타고난 연기력만 선보이면 된다고 생각했던 일.
대본만 충실히 따르면 아무 문제 없을 거라 생각한 셈.
“내 말이 틀렸나?”
그리고 재차 물어오는 크리스의 말에.
리엄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다 대답했다.
“그게…… 아시다시피 제가 좀 바빠서.”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바쁜데.”
“설마요. 저보다 바쁘려고.”
그리고 나온 대답은 가관이었고.
크리스의 눈썹은 그 덕분에 열심히 꿈틀거렸다.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까.
프로듀서가 캐스팅한 녀석이지만-
그렇다고 총감독이 고분고분하게 따라야 할 이유는 없다.
크리스가 초보 감독도 아니고 말이다.
“그럼 가는 게 좋겠군.”
“네?”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 배우의 편의를 봐줘야지. 이봐! 와서 리허설 대본 좀 수정하라고! 이번 파트는 네슬리 씨 빼고 갈 테니까!”
“지금 뭐라고…….”
“뭐야, 아직 안 갔나?”
그리고 나머지 세 배우는.
각각 다른 반응을 보였다.
리엄을 어느 정도 아는 사미르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고.
안드레아는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내다 이내 거두었으며.
도윤은.
무표정하게 대본을 보고 있었다.
마치 신경도 안 쓴다는 듯.
그리고 그 모습은 안드레아에게 퍽 흥미로운 인상을 남긴 모양이다.
그 이후부터.
안드레아의 시선이 도윤에게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모습은 지금 이 당황스러운 상황과 맞물려 리엄의 허세를 이끌어냈고.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급기야 크리스와의 전쟁을 선포해버렸다.
물론.
크리스는 콧방귀도 안 뀌고 응수했다.
“뭐 하는 짓이냐니? 바쁘다는 배우 보내주겠다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그게 아니라…….”
“잘 생각해 보라고, 네슬리 씨. 늦게 와서 일찍 끝내달라고 말하는 게 과연 맞는 건지.”
“일정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 스트리퍼들이랑 호텔에서 노는 일정?”
“지, 지금 뭐라고…….”
“이상하다. 난 아까 그렇게 들었던 것 같은데. 아, 미안해. 목소리가 너무 커서 안 들을 수가 있어야지.”
그 말에 안드레아가 다시 리엄에게 시선을 돌려 혐오감 어린 눈빛을 보냈고.
사미르는 결국 고개를 돌려버렸다.
도윤은 역시.
신경조차 안 쓰고 있었지만.
이내 힐끗, 리엄과 시선을 마주하더니 순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마치.
비웃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