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이곳을 기자와 팬들로
굳이 소란을 떨고 싶지 않았다.
아마 이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어차피 알 사람은 다 알고, 기사도 크게 난 데다 기자회견까지 하면서 미국 진출을 알렸는데 굳이 출국하는 날까지 난리법석을 떨어야 하나 싶었다.
그래서 도윤은 정말 친하게 지내던 기자 한두 명에게만 출국 사실을 조용히 알린 뒤, 그들의 ‘배려’ 속에서 입국 게이트로 향할 수 있었다.
배려라면 배려다.
기자들 간의 커넥션이 얽히고 얽힌 이 바닥에서 자기만 아는 사실을 남에게 알리지 않는 것도 힘들 테니.
그리고.
“형님…… 다치지 말고 조심히 다녀오셔야 하지 말입니다.”
“선배님…… 조심히 다녀오세요.”
“잘 다녀와라, 도윤아. 선우한테는 내가 연락할게.”
유준, 한올, 유나, 석준, 해영…….
평소 친하게 지내던 배우들의 배웅도 받을 수 있었다.
“가서 길 닦아놓을게요. 다들 오세요.”
“됐다, 미국은 무슨. 한국에 있는 게 마음 편하지. 자신 없어서 안 가는 거 아니다. 알지?”
“그럼요.”
여기에.
“잘 갔다와라.”
“형님.”
“성공하고 와라.”
“그럼요.”
수철의 배웅도 받았다.
다만 아쉽게도.
가족들의 배웅은 받지 못했다.
도윤이 절대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것이다.
안 그래도 유명인을 아들로 둬서 마음고생이 심할 텐데.
출국하는 날까지 굳이 영주에서 인천공항까지 부모님을 부르고 싶지 않았던 것.
여하튼 그렇게 ‘조촐하게’ 출국 게이트를 통과한 도윤.
“기자들 거의 없어서 다행이네요.”
민주 역시 출국 게이트를 통과하며 기자들이 없다는 사실에 만족한 모양이다.
“나중에 기자들이 또 기사 쓰겠네요. 말도 없이 갔다고. 하여간 연예 쪽 기자들은 상종도 하면 안 된다니까.”
성호의 말에 도윤은 오랜만에 동의했다.
연예부 기자들은, 쉽게 말해 ‘필요악’이다.
연예계의 각종 소식들을 전해주면서 필요하다면 적절히 이용할 수도 있지만.
하는 짓들이라는 게 스토커나 다름없고 툭하면 ‘알 권리’를 운운하며 윤리 따위는 무시하는 저열한 행동을 보인다.
물론 도윤은 그들과 사이가 나쁘지 않다.
다만-
이번 출국 날짜와 시각을 정확히 알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관계 악화는 예정된 일.
그렇다고 도윤이 그 사실을 신경 쓰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신경 꺼. 어차피 한동안 안 볼 사인데.”
“와서 또 접대 요구하는 거 아닐까요?”
“그러든가 말든가.”
도윤은 어깨를 으쓱이는 한편.
“어? 이게 뭐예요?”
“카드잖아. 보면 몰라?”
성호에게 자신의 신용카드를 건네주었다.
멍한 성호의 표정 속.
민주는 성호의 손에 들린 카드를 재빨리 낚아챘다.
“성호야. 이쯤 되면 무슨 말인지 알아야지?”
그러면서.
민주의 손끝은 막 보이기 시작한 면세점을 가리킨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 보너스 미리 주는 거다. 한도 신경 쓰지 말고 긁어.”
“형…… 혹시 미친 거 아니죠?”
“싫음 말고.”
도윤은 카드를 빼앗으려 했지만.
민주가 성호의 옆구리를 꼬집는 걸 보고 만족스레 웃으며 손을 거뒀다.
“제가 잘 교육시킬게요.”
그리고 막 화장실에 다녀온 두칠까지.
“세상에, 형님! 정말이요? 저 그럼…… 발렌타인 20년산 사도 됩니까?”
“20년산 말고 200년산 사도 되니까 가서 좀 사.”
도윤은 그러면서 시계를 보더니.
“1시간 남았다.”
한마디 던졌고.
셋은 순식간에 도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피식거리던 도윤의 귀로 어느새 다가온 경후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쟤들은 무슨 복이 있어서…….”
“복은 제가 받았죠. 그만큼 잘하니까.”
도윤의 말에 경후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는다.
“아무리 돈 많아도 너처럼 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쟤들 복 받은 거 맞아. 아, 부럽다. 내 코가 조금만 더 높았어도 연예인 하는 건데, 까비.”
도윤은 차마 고개를 저을 수 없어.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래도 소속사 팀장인데.
대신.
다른 카드를 내밀었다.
“팀장님도 형수님 선물 좀 사세요.”
“됐다. 회사 연예인한테 이런 거 받는 거 아니다.”
“선물 싫어하는 여자가 어디 있어요.”
“아, 괜찮대두.”
말은 그러면서.
손은 도윤이 내민 카드로 슬금슬금 뻗어가더니.
“어어, 거 참. 괜찮다니까…….”
“그냥 가서 아무거나 사세요.”
“크흠, 정 그렇다면야…… 고맙다야.”
어느새 싱글벙글, 민주와 성호처럼 카드를 받아 달려간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피식대던 도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주변에 보이는 벤치에 앉더니.
대본을 꺼냈다.
‘차라리 혼자 있는 게 낫지.’
대본 보고 있으면 보나마나 잔소리를 해댈 성호.
뭐라 하진 않긴 하지만 그래도 좀 쉬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할 게 뻔한 민주.
그리고.
심심하다며 계속 말을 걸 경후.
도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한국에 머무르는 시간을 조용히 즐기기 위해.
나름대로 ‘합리적인’ 방식을 택한 셈.
물론.
그런 마당이니 대본만 보는 건 아니었다.
“아, 영어.”
도윤은 이어폰을 꽂은 뒤 영어 회화들을 재생시켰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출국 시간을 기다리며 말이다.
* * *
빌 테일러.
할리우드에서 제일 유명한 프로듀서 중 하나이자, 영화와 드라마를 가리지 않고 명작들을 뽑아내는 실력자.
많은 배우들이 그와 함께하길 원하고.
한편으로는 감독들조차 그와 함께하길 원한다.
프로듀서의 권한이 절대적인 나머지 감독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할리우드의 제작환경임에도 말이다.
심지어-
‘빌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유명 감독도 있을 정도.
여하튼.
오늘도 수많은 배우들이 연락을 기다리게 만들고 있던 빌은.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지금 공항에서 도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설마 안 오면…… 아니야. 그러면 안 돼!”
혼자 호들갑을 떠는 빌을 보며 비서가 혀를 차더니 한마디 했다.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 그렇겠지?”
“다만 두 가지 경우가 있네요.”
“뭐, 뭔데? 당장 말해!”
“비행기가 회항하거나,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후자만 아니면 좋겠는데.”
여하튼.
빌은 미국으로 돌아온 뒤 오매불망 도윤을 만나기만을 기다렸다.
이미 감독과 미팅도 마친 상태고.
시나리오 라이터들과의 협의도 진행했으며.
도윤을 위한 ‘작은 선물’도 준비했다.
“올 겁니다. 비행기도 도착했고요.”
“아, 정말 그렇군. 좋아. 만나면 어떻게 인사할까? 한국으로 ‘안녕하세요?’가 뭐였더라?”
“그냥 평범하게 인사하시면 됩니다. 아시아 배우들한테 자기네 나라 말 몇 마디로 감동 줄 수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여기가 한국이면 모를까.”
“그, 그렇지?”
“네. 그러니까 그만 시선 끌고 가만히 계시길 바랍니다.”
비서의 일침에 결국 빌은 입을 다물었지만.
“나왔다!”
도윤이 보이자마자 손을 흔들며 아이처럼 팔짝팔짝 뛰었다.
비서는 덕분에.
스윽.
빌로부터 두 발자국 정도 멀어지는 걸 택했다.
마치 모르는 사람처럼.
“도윤! 어서 와요. 오는 길이 힘들진 않았죠?”
“덕분에 편안했습니다. 퍼스트클래스로 마련해 줄 줄은 몰랐는데.”
“아시아 최고의 배우를 모셔오는데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아, 일전에 다 뵀던 분들이군요. 반갑습니다. 다시 소개하자면, 빌 테일러입니다. 쉽고 편한 이름이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하하. 빌, 빌. 아주 흔한 이름이지만 전 이 이름 덕분에(bill) 나름대로 부자가 된 거라 생각합니다. 혹시 한국은 뭐라고 말하죠? 아, 돈(don)!”
어쩐지.
한국에 왔을 때보다 말이 더 많은 것 같은 이 느낌.
“오, 여기 계신 분은 덩치가 어마어마하군요! 나중에 단역으로 나와도 괜찮겠는데요? 하하하! 반갑습니다! 빌 테일러입니다!”
도윤은 두칠에게 갔다가 다시 돌아온 빌의 말을 적당히 흘려넘기는 한편.
마침 등장해 준 구원자와 반갑게 악수했다.
“레이첼 포프라고 해요. 도윤,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야말로요.”
레이첼은 이어서 다른 사람들과도 차례로 악수했고.
늘 그렇듯, 이성 앞에서는 벌벌 떠는 성호와 악수하며 싱긋 웃었다.
“긴장 푸세요. 미국이 듣던 만큼 험악한 도시는 아니랍니다.”
미국에 와서 긴장한 게 아니겠지만.
도윤은 굳이 진실을 말해주진 않았다.
그런 한편.
도윤은 묘하게 다른 느낌의 공항 풍경을 둘러봤다.
그러니까…….
한국과는 다른 느낌 말이다.
한국이었으면.
분명히 돌아왔을 때 기자들도 득시글할 것이고 도윤을 기다리는 팬들도 있었을 텐데.
이제야.
자신이 다른 도전을 하러 왔다는 게 실감이 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두렵다거나 걱정되진 않는다.
“표정이 좋아 보이는데요, 도윤?”
“그럭저럭요.”
“다행입니다. 일단 호텔로 가서 짐부터 풀죠. 조금 쉰 다음에 총감독 만나러 갑시다. 제 이야기를 듣더니 도윤을 빨리 만나보고 싶어하더군요.”
정말 그럴까.
정말 기대를 하는 걸까.
할리우드에서 프로듀서와 감독의 관계는 배급사와 제작사의 관계와 비슷하다. 배급사(프로듀서)의 입김에 제작사(감독)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
그래서.
도윤은 그쪽에서 기대하든 말든.
자신이 가진 것들을 내보이며 만족시킬 생각이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 시간 동안 틈이 나는 대로 대본을 살피고 대사를 외운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으니까.
“아마 만나보면 마음에 들 겁니다. 제가 좋게 이야기해놨거든요.”
도윤은 빌의 말에 씩 웃는 한편.
잠시 화제를 돌렸다.
“한국에서 원하던 건 얻고 돌아가셨나요?”
“한국에서 원하던 거라면…… 아. 역시 알고 있었군요.”
“한국에서도 기사가 꽤 나서요.”
도윤은 빌이 단지 자신만을 보기 위해 한국으로 온 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듣기로…….
몇몇 한국 엔터 회사와 접촉했다던데.
“그 건은 보류 중입니다. 아무래도, 도윤을 만난 뒤에 본 배우들이라서 그런지 다들 성에 차지 않아서요.”
“과찬입니다.”
“글쎄요. 아,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충고하자면…… 여기서 그런 겸손은 딱히 좋지 않습니다. 우습게 안 보면 다행이죠.”
빌의 말에.
도윤은 잠시 멈춰서더니.
“제가 그렇게 보입니까?”
“음…… 쉽게 말하죠. 누군가의 칭찬을 거절하지 마세요.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세요. 미국은 그런 나라죠. 누군가는 자신의 칭찬을 무시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정 힘들다면 웃는 것 정도로 마무리하세요. 누군가가 자신을 추켜세워준다면, 그걸 잘 챙길 줄 알아야 합니다.”
빌의 말에.
민주는 고개를 끄덕였고.
도윤은 잠시 고민하더니 빌을 바라보며 말했다.
“틀린 말 같진 않네요.”
“그렇죠? 그럼 다시 해볼게요. 도윤, 영어를 아주 잘하는군요.”
“예, 그런 것 같네요.”
“……그건 좀 건방져 보이지만, 나쁘지 않군요. 하나의 캐릭터로 정착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도윤은 피식거리며 어깨를 으쓱였고.
한편으로-
‘민주 얘는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인 건가?’
방금 빌의 긴 말을 알아들은 듯한 민주를 보며 설마 싶었다.
그러다.
‘하기야. 이젠 별로 이상하지도 않다.’
이젠 민주가 무슨 일을 하든, 뭘 잘한다고 하든 딱히 놀랍진 않았다.
그냥.
그럴 만한 사람이 그런 거니까.
“흐음, 그럼 공항에서의 대화는 이쯤 하고…… 슬슬 갑시다. 호텔을 보면 아주 깜짝 놀랄 겁니다.”
“좋죠.”
여하튼 그렇게 일행은 출발했고.
도윤은.
공항 문을 열고 나가기 전, 고개를 돌려 공항 안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때는.
이곳을 기자와 팬들로 가득 메우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