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29화 (129/200)

129.드디어 출발할 시간

도윤의 기자회견은 상당한 반향을 불렀다.

[한동안 한국에 돌아올 일은 없을 겁니다.]

어떻게 보면 일부, 아니 몇몇은 매우 건방지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발언.

곡해하기에 따라서는 이제 한국 시장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는 그 말.

그래서, 최도윤의 콧대가 너무 높아진 거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떠돌 정도.

“미친 거 아니냐?”

“가서 실패한 애들이 몇 명인데.”

“이제 돈 좀 벌었다고 자기가 다 할 줄 아는 거지.”

물론 도윤을 아는 사람들은 도윤이 절대 그럴 리 없다며, 그냥 자신감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일반 사람들은 어디 그렇게 받아들이겠는가.

현장에 있던 기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도윤의 발언을 타이틀로 뽑아 자극적인 기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사정 모르는 이들은 도윤을 욕하기 바빴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도윤이 쟤는 원래 한다면 하는 애였어.”

“니들도 좀 그래 봐라, 응? 리나랑 동하 너희 둘 학점이 그래서 졸업하고 어디 취직은 하겠니?”

“아니, 어머니.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가십니까.”

“이래서 오빠 옆에 있으면 손해를 본다니까.”

도윤의 가족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어릴 때부터 한다면 하는 녀석이란 인식이 있었으니.

다들 ‘도윤이가 저렇게 말했으니 맞는 거겠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것이다.

“거, 그래도 미국 간다는데 너무 태평한 거 아니야?”

물론 아버지는 약간은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지만.

“무슨 걱정이에요? 도윤이 영어도 잘하고 연기도 잘할 텐데.”

“하긴, 도윤이 걱정을 해서 뭐 해. 이놈들 걱정해도 모자랄 판인데.”

“아빠까지 그러면 어떡해!”

곧 걱정을 거둬버렸다.

이런 가운데.

“너답다, 너다워.”

도윤이 기자들 앞에서 처음으로 도발적으로 말했는데도 경후는 별달리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화내실 줄 알았는데.”

“화를 왜 내? 맞는 말 했는데. 솔직히 네가 그렇게 말 안 했어도 너 실패할 거다, 가서 망할 거다, 보나 마나 중도 하차하고 돌아올 거다, 이렇게 기사 쓸 놈들이었어.”

오히려 할 말을 했다며 칭찬해 준다.

도윤은 그런 경후를 보며 과연 수철의 뒤를 이어 이엔 엔터의 공식 워커홀릭-라고 쓰고 노예라 읽는다-이 될 만하다고 느꼈다.

“이제 일단락됐으니까 도윤이 넌 가서 할 일에 집중해. 국내 일정도 거의 마무리됐고, 이제 우리도 그쪽 서포트할 팀 따로 만들었으니까.”

“팀을 따로 만들어요?”

“그럼, 거기서 들려오는 소식 보도자료 꾸리고 돌발상황에 대처도 해야 하고, 미국에 사람 상주도 시켜야 하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경후의 반응에.

도윤은 새삼, 배우가 혼자 일하는 직업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실망 안 시켜드릴게요.”

“이거 봐라. 난 네 입에서 그런 말 나오니까 무섭다. 너도 긴장한다는 뜻이잖아?”

도윤은 그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거렸다.

“제가 무슨 로봇입니까?”

“아니었어? 연기하는 기계?”

오그라드는 그 별명에 도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한편.

“대표님은 좀 어때요?”

“기자들 만나고 PD들 만나느라 정신없지. 이번 기회에 다른 배우들 좀 꽂겠다고.”

“열심이시네요.”

“내년 중으로 상장 목표시랜다. 내년에 나 안 보이면 하얗게 불타서 사라진 줄 알아라.”

역시나.

동민도 그렇고.

각자의 목표를 위해 열심히 달린다.

그러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가서 성공하는 것.

최소한.

실패는 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가서 아무 생각 말고 연기나 열심히 해라. 상장이든 대응팀이든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성호한테도 단단히 말해뒀으니까 걱정 말고.”

“그렇게 보여도 그놈 일 잘해요. 가끔 개겨서 그렇지.”

“그것도 다 애정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니겠냐. 그리고 난 나중에 봐서 성호 실장급으로 올릴 생각이었는데, 이래서야 원.”

도윤은 그 말에 성호와 장난 반 진심 반으로 구두 체결한 종신계약을 떠올렸다.

글쎄.

이제는 가라고 등 떠밀어도 안 갈 녀석 같다만.

‘나중에 물어는 봐야지.’

홀어머니를 모시는 상황에서.

계속 현장으로 담당 배우를 따라다니는 로드 매니저를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여하튼.

“참, 민주는 미국 먼저 갔다면서?”

“아, 네. 내일 돌아온다던데요. 누구 보러 갔대요.”

“걔도 참 대단해. 솔직히 너랑 같이 일하는 상황에서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스타일리스트라 하기엔 좀 대단하지?”

“그럼요. 그래서 꽉 잡으려구요.”

도윤은 빙그레 웃는 한편.

경후의 입에서 언급된 둘의 존재에.

든든함을 느꼈다.

솔직히.

어딜 가나 둘만 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두려울 것 같진 않았다.

아.

하나 더 있다.

이번에 도윤의 부탁을 듣자마자 오케이하한 또 한 명의 사람.

바로.

장두칠이었다.

플로리스트가 적성에 맞다더니.

도윤이 부르기만 하면 바로 달려오는 녀석.

‘형님, 미국은 말입니다. 일본하고는 차원이 달라요. 물론 일본도 총 쓰는 야쿠자같은 놈들이 있긴 한데 거기는 불법이고 미국은 합법이란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 정도 되는 사람이 가줘야 형님이 안심하고…….’

누가 들으면.

근육으로 총알을 막을 것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두칠.

아무튼 뭐.

경호원으로는 제격이기 때문에, 도윤도 가서 안전 관련 걱정을 덜게 되었다.

그 정도 덩치라면-

마초이즘이 만연한 미국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을 테니.

오히려 그들과 친구가 되어 도윤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하튼 준비는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이제.

도윤은 곧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참, 알아서 잘 하겠지만 가기 전에 사람들 자주 만나라. 시간 쪼개서라도 만나. 서운하게 만들지 말란 소리가 아니야. 가기 전에 감사 인사라도 꼭 표해. 그게 예의니까.”

경후는 굳이 말하진 않았지만.

‘보험’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나중에 일이 잘 안 되어 돌아왔을 때도, 아무 문제 없이 배우 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일종의 보험.

물론 도윤은 굳이 그러지 않아도 워낙 이 바닥 사람들 사이에서 평이 좋지만…….

그래도, 해서 나쁠 건 없다.

“안 그래도 오늘 저녁에 오강선 감독님 만납니다. 수철 형님이랑 같이요.”

“또 그 양미리집?”

“어떻게 아셨어요?”

“오 감독님이 양미리에 환장하는 거 이 바닥 사람이면 다 아는데.”

도윤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리는 한편.

“이제 미국 가면 양미리도 못 먹겠네요. 한동안은요.”

“그래, 다시 못 먹을 것처럼 양껏 먹고 와. 알겠지?”

“그럼요.”

고개를 끄덕이는 도윤의 얼굴엔.

웃음과.

어딘가 모를, 결연함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알지? 다른 쪽에서도 제안 엄청 들어오는 거.”

“모를 리가요.”

“타이밍이 어쩜 이렇게 절묘할까 싶긴 한데…….”

당연하게도.

미국 진출은 선언했지만 지금도 도윤에겐 여러 제안들이 쏟아지고 있다.

그중 특기할만한 건-

역시 아시아 쪽이다.

특히, 일본과 중국.

<협조>의 개봉으로 도윤에 대한 인지도가 단숨에 수직상승하면서.

‘아시아 스타’를 대접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

생각해 보면 이게 조금 더 나은 길일 수도 있다.

일단 대접해 주겠다는 쪽이고, 어마어마한 출연료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주는 팬들까지.

심지어 비슷한 문화권이라 적응도 수월할 테지.

특히 중국으로 가면 그야말로 월드스타 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을 테고, 거기서 성공하면 어마어마한 부를 거머쥘 수도 있다.

하지만.

도윤은 그냥 마음으로 품기만 했다.

미국에 가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다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 된 셈.

그래도.

제안이 왔다는 사실에 의미 자체는 충분하지 않을까.

“가서 성공하면 나중에 더 큰 제안으로 돌아오겠지. 생각하지 말고 잘 갔다 와라.”

“네, 대표님.”

“그리고 이제 슬슬 형님이라 부를 때 안 됐냐? 나 서운하다. 수철이한테는 형님이라 불러주면서…….”

도윤은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 그 모습에 웃으며 그만-

“네, 형님.”

동민이 원하는 단어를 꺼내주었다.

* * *

다시 한 달이 흐른 후.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미국에 간다는 사실을 알리고.

마침내 준비를 마친 도윤은, 짧게나마 정들었던 집을 둘러보았다.

“진짜 별거 없네.”

민주가 애써서 가구를 채워 넣어줬는데, 거의 써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침대에서 잠이나 잤지.

사실 대부분의 가구들은 도윤보다 동하나 리나가 더 많이 썼다.

언젠가 놀러 오겠다며 온 녀석들에게 무심코 비밀번호를 알려줬더니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쁠 것도 없는 일이다.

어차피 한동안 이 집은 비어 있을 테고.

그사이 누군가의 손이라도 타면 온기가 유지될 테니까.

“짐은 다 챙겼고…….”

도윤은 가방을 열어 짐들을 한 번 더 살폈고.

문득.

“내가 이걸 챙겼었나?”

자신이 단역으로 처음 출연했던 드라마 대본을 발견했다.

스윽, 슥.

도윤은 <그대 내 품에> 촬영 시점으로 회귀했으니.

따지고 보면 무려 10년을 훌쩍 넘은 대본이고, 다시 말해 10년이 넘는 시간 만에 마주하는 대본이다.

새록새록 살아나는-

첫 연기 당시의 설렘과 떨림.

대본 가득 쓰인 분석과.

해질 대로 해져 조금만 힘을 주면 찢어질 것 같은 낡은 대본.

하지만.

도윤은 이 대본을 처음 받아들었을 당시의 기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

초심이었다.

연기를 막 시작할 때.

뭔가 해내 보이겠다는 초심.

“성호 녀석…….”

도윤은 이 짐을 챙겨준 사람이 성호임을 떠올리며 옅은 웃음을 머금었다.

뭐, 예전의 성호였다면 분명히…… 대충대충 챙기다가 딸려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겠지만.

지금의 성호는.

여전히 뺀질거리고 가끔 개기긴 해도 민주와 더불어 도윤이 신뢰하는 사람 중 한 명.

“가기 전에 소고기라도 먹여야 하나.”

안 그래도 살이 많이 빠져서.

요새는 안쓰럽기까지 할 지경인데.

생각해 보면 또 괘씸하다.

빼라고 할 때는 그렇게 안 빼더니, 미국 간다니까 단식까지 선언한 녀석.

그래도 뭐.

빼긴 뺐으니, 타박할 생각은 없다.

스윽.

도윤은 다시 대본을 가방에 넣은 뒤 지퍼를 잠그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둘러보는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계속 비어 있진 않을 테고.

언젠가는 돌아올 곳이다.

‘어머니랑 아부지한테도 말씀드려놔야겠다.’

도윤은 언젠가 부모님이 서울에 올라오실 일이 있으면 그때 쓰라고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동하와 리나가 쓰긴 해도.

둘만 뒀다간 도대체 무슨 사달이 날지 알 수 없으니.

“슬슬…….”

여하튼 도윤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가방을 집어든 뒤 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집 앞이야?”

-10분 후 도착이요. 시간 넉넉하니까 천천히 나오세요. 그리고 두칠 오빠도 그쯤 맞춰서 온대요.

“어, 알았다.”

전화를 끊고.

도윤은 심호흡했다.

미국으로 가기 전.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이제는 드디어.

출발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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