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오늘 신났네요
할리우드 진출과 관련된 이슈가 있었지만.
그리고 관련 이슈가 사실상 무산된 것 같았지만.
도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도윤은 초심을 잃지 않았다.
다시 연기를 하고 싶은 것.
그 생각은 아직도 유효했고-
그래서,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연기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이 바닥에서 쫓겨나고.
사실상 없는 사람 취급당하다 10년 만에 간신히 단역 기회를 얻었던 회귀 전을 생각하면.
아직도 꿈 같은 나날이었으니까.
또한.
‘그 정도면 나도 갈 이유 없지.’
아무리 할리우드가 기회의 땅이고.
산업 규모 자체가 다른 만큼.
거기서 두각을 드러내면 비교할 수 없는 부와 명예를 얻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자신의 연기를 선보일 수 있겠지만-
글쎄.
지금 하는 이 촬영 약속을 깨면서까지 갈 이유가 없을까?
현재에 집중하는 것.
회귀 직후부터 도윤이 품어왔던 마음이자 신념이다
그래야.
미래도 볼 수 있을 테니까.
또한.
현재에 집중하기만 해도.
행복했으니까.
“오, 최 배우님. 오늘 연기 정말 좋은데요?”
“감사합니다, PD님.”
“항상 좋았지만, 오늘은 더 좋으신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도윤은 일말의 아쉬움조차 느끼지 않은 채 <달이 비춘 너울> 촬영에 즐거운 마음으로 임하고 있었다.
“도윤 씨, 이거 합 좀 맞춰볼까?”
“아, 네. 선배님. 그럼 저쪽에서 하시죠.”
다른 배우와 리허설 전 적극적으로 합을 맞춰보는가 하면.
“저…… 선배님?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 이 부분 조언을 좀 구할 수 있을까요?”
“어디 봐요.”
자신의 연기를 꼼꼼히 살피는 와중에도.
후배들의 부탁에 흔쾌히 응했다.
심지어.
아주 친절하게.
“저만큼의 반만 저한테 친절했으면…….”
성호의 중얼거림에 민주가 어김없이 태클을 걸었고.
“너는 너한테 친절하고 싶겠어?”
“아뇨. 사실 형이 친절하게 굴면 무서울 것 같아요.”
성호는 점점 납득이 빨라지고 있었다.
“근데 형은 안 아쉬워 보여요.”
“뭐, 할리우드?”
“네.”
“그거 아쉬워할 사람이었으면 지금쯤 미국에 있겠지.”
“그거야 그렇긴 한데…… 제가 형이었으면 좀 더 고민해 봤을 것 같아요.”
“그렇지. 대부분은 그랬겠지. 근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도윤 오빠잖아?”
민주의 그 말에.
성호는 또 한 번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요. 형이니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성호가 지켜본 도윤은.
말 한마디를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다.
조금 무섭고, 가끔 가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거 같아도.
거의 대부분 사실이고, 그게 선언이라면 무조건 지켜진다.
얼마 전 이사를 마친 성호의 집을 구해준 것만 봐도 알 수 있고.
민주가 차를 고르자마자 그날 바로 회사에 부탁해 해당 차종의 풀옵션 계약을 마친 것만 봐도.
도윤이 일단 내뱉은 말은 지킨다는 걸 알 수 있다.
하물며-
배우에게 전부나 다름없는 촬영은 오죽하겠는가.
‘하긴, 할리우드 안 가도 이미 잘 나가는데.’
더 큰 명예를 얻는 건 배우라면 누구나 바라마지않는 일이겠지만.
그 전에 할 도리를 다하는 것도 중요하다.
나중에 실패하고 돌아올 때를 대비한다기보다는-
그냥 당연한 일을 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오늘 시마이합시다. 고생들 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도윤은 오늘도 깔끔하고 완벽한 촬영을 마친 뒤, 후배들의 선망 어린 시선과 인사 속에서 카니발로 돌아왔고.
“오늘 둘 다 시간 비면 술이나 한잔할까.”
휴대폰을 슬쩍 살피더니 둘에게 물었다.
굉장히 오랜만에 꺼내는 술 이야기에 성호는 흠칫했다.
‘역시…… 형도 사람이구나.’
성호는 도윤이 그래도 차마 아쉬움을 모두 떨쳐내지 못해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
“마음에 걸리셨나 보네요.”
“뭐가?”
“할리우드요.”
그 말에 도윤은 피식거리더니.
“아닌데.”
“에이, 맞으면서.”
도윤은 대답하는 대신 휴대폰을 건네줬다.
뭔가 싶어 휴대폰을 받아든 성호는 경후에게 와 있는 톡을 확인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윤아!!! 그쪽에서 너 보러 온대!!! 이거 보면 연락해!]
[(웃는 라이온 이모티콘)]
“혀, 형. 설마 그쪽이라는 말이…….”
“봤으면 내놔. 전화하게.”
도윤은 바로 휴대폰을 낚아채곤 경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곧장 들려오는 기쁜 목소리.
-야! 도윤아!
“잘 들려요. 귀먹습니다.”
-좀 먹으면 어떠냐! 그쪽에서 너 보러 온다는데! 무려 한국까지!
“잘됐네요. 일정 비는 날에 잡아주세요.”
-거, 자식. 되게 덤덤하게 말하네. 사람 무안하게.
“뭐든 만나 봐야 아는 거죠.”
-됐다. 너 반응 기대한 내가 바보지. 그래도 아무튼! 이건 엄청 긍정적인 신호야! 우리가 안 가겠다니까 온다고 한 거라고!
“그러네요. 아, 저 오늘 그리고 술 한잔하고 들어갑니다. 아마 회사 안 들를 거예요.”
-야! 야! 괜히 니 돈으로 긁지 마라. 법카 써, 법카! 어딜 가든 되니까 가서 뭐든 마음껏 긁어!
법인 카드로 긁으라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죠, 뭐. 고생하셨어요, 팀장님.”
-오냐. 그럼 난 메일 보내러 간다! 잘 마시고 들어가라!
통화가 끝나고.
도윤은 성호를 바라봤다.
“출발 안 해?”
“아, 네. 갈게요!”
슬며시 통화 내용을 엿듣고 있던 성호는 다급히 시동을 걸며 물었다.
“그럼 형 진짜…….”
“가서 말해. 민주야. 어디 갈까.”
“법인카드 쓰라고 하셨으면 최대한 긁을 곳으로 가는 게 예의죠.”
역시.
화끈한 민주답다.
민주는 휴대폰으로 빠르게 지도를 열고 성호에게 말했다.
“성호야. 불러주는 주소 내비 찍어.”
“옙.”
이런 와중에도 도윤은 덤덤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했지만.
곧.
창에 비친 도윤의 입꼬리는.
천천히 말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아, 제기랄! 지랄맞게 덥잖아!”
빌은 공항에서 나와 첫발을 떼자마자 보란 듯이 외쳤다.
그 바람에 몇몇 사람들이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지만 빌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끔찍한 습기였다.
빌이 살던 LA는 한국 못지않게 기온이 높긴 해도 사막과 비슷한지라 실제 체감 온도는 여기에 비할 바가 아니다.
아마 빌이 ‘사우나’의 존재를 알았다면 곧바로 떠올렸을 것이다.
“한국 기후가 원래 그렇습니다.”
이런 가운데 빌이 한국에 있는 동안 안내 및 통역을 맡은 ‘이든 박’이 따라 나와 한마디를 하자-
“그걸 왜 이제 말해주는 거야!”
빌은 폭발해 버렸다.
8월.
하필이면 해가 미치도록 쨍쨍한 오늘은.
한국인들조차도 밖에 나가는 대신 에어컨 아래 있을 만큼 더웠으니까.
“그래서 안 갈 건가요?”
“안 간다는 게 아니라…… 망할. 날을 잘못 골랐어. 비가 자주 온다고 해서 기대했는데.”
참고로 로스엔젤레스는 연 평균 기온이 상당히 높으면서 강수량이 상당히 적어 사막과 비슷한 환경인 곳.
그래서 한국에는 8월이면 비가 자주 온다기에 기대를 했는데-
이런 끈적한 폭염이라니.
빌은 내리쬐는 태양에 기겁하며 그늘로 들어오는 한편.
‘미팅 전에 샤워라도 해야겠어.’
어서 호텔로 가서 찬물에 몸을 씻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아, 저기 택시 많네요.”
다행스럽게도 공항에는 택시들이 줄을 서 있었고, 빌과 이든은 차에 타자마자 느껴지는 에어컨 바람에 감탄했다.
“오! 외국인? 웨어 아 유 고잉? 벗 유 퍼스트 페이 머니. 아 유 오케…….”
“한국말 할 줄 압니다. KW 호텔로 가주세요.”
“아, 그. 어…… 한국인이었네. 예에, 출발합니다.”
유창한 한국말에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는 택시기사.
그렇게 두 사람이 탄 택시는 쏜살같이 달려 호텔 앞에 도착했고.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로비로 달려 들어가며 시원한 바람을 만끽했다.
“이거지, 후. 살 것 같군. 젠장, 다음에 올 때는 이 시기를 피해야겠어.”
“동감합니다. 참, 체크인 도와드릴 테니까 먼저 올라가서 짐 푸세요. 저는 잠시 선물 좀 사러.”
“오케이. 그렇게 하자고.”
그때 문득.
빌은 호텔 로비에 보이는 광고를 발견했다.
주얼리 광고인 것 같은데…….
“엉?”
뭔가.
너무 익숙한 사람 한 명의 사진이 보였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그러기를 잠시.
“테일러 씨? 객실까지 모시겠습니다.”
빌은 마침 들려온 호텔 직원의 말에 고개를 돌려 버렸고.
엘리베이터에 도착한 뒤에야 자신이 본 그 광고 모델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도윤!”
“꺄악!”
순간 호텔 직원은 기겁하고 빌은 당황해서 사과했다.
“미, 미안해요. 사실 오늘 아까 그 광고의 주인공을 만나러 온 거라서…….”
“네? 광고의 주인공이요? 혹시 로비에 있던 최도윤 광고 말씀하시는 건…….”
“오, 맞아요! ‘도윤’ 맞습니다! 잘 아는 배우인가요?”
흥분해서 묻는 빌의 모습에 직원은 당황했지만, 이내 침착하게 답했다.
“어…… 개인적으로 당연히 알지는 못하지만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배우죠. 아니, 엄청나게 유명합니다.”
“역시!”
빌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뭔가.
알고는 있었지만, 한국에 와서 그 사실을 한국인에게 확인받으니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게 증명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찌는 듯한 더위로 가라앉았던 빌의 마음이 다시 요동쳤고.
빌은 시계를 바라보며 어서 미팅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 * *
미팅 시각은 밤 10시였다.
정확히 도윤이 촬영을 마치고 돌아올 시각.
가급적 낮에 볼 생각이었지만.
빌 측에서 상관없다며 무조건 일찍, 그리고 도윤의 시간이 빌 때 보고 싶다며 말한 결과, 정해진 시각.
사실 언제 만나든 상관은 없었다.
중요한 건.
할리우드의 유명 프로듀서가 자신을 보러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
그래서 도윤은 처음 빌에게 메일이 날아온 건으로 이야기하던 때와 달리, 이번에는 꽤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형 오늘 신났네요.”
성호는 오랜만에, 아니 거의 처음 보는 듯한 도윤의 ‘들뜬’ 모습에 흥미롭다는 표정이다.
사실, 일반적인 사람 기준으로 ‘들떴냐’고 물어보면 그건 아닌 게…….
들뜬 사람이 뭐 저렇게 무표정할까 싶지만.
성호가 보기엔 확실했다.
저건 들뜬 게 맞다.
그 증거로-
방금 성호가 실수로 바닐라 시럽을 ‘무려 한 펌프나’ 더 넣은 도라떼를 건네줬는데.
아무런 말도 없이 열심히 홀짝이고 있었으니까.
‘평소였으면 바로 난리 났을 거야. 암, 그렇고말고.’
그 까탈스러운 성격으로 미루어.
분명히 한 모금째, 아니 냄새만 맡고도 눈치를 채는 게 정상인데 저러는 걸 보면.
둘 중 하나다.
정말 들뜬 나머지 눈치를 못 챘거나.
아니면 눈치채고도 기분이 좋아 아무 말 안 하거나.
어쩌면.
전자였다가 후자로 바뀌었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드물게도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 확실하다.
다른 사람이 보면 똑같아 보이겠지만 말이다.
이런 가운데.
“성호야. 가서 슬슬 대표님 모셔와.”
“벌써요? 40분 넘게 남았는데?”
민주의 말에 성호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40분밖에 안 남은 거야. 가서 모셔와. 그러다 10분 후에 도착하면 어쩌려고?”
“에이, 30분이나 일찍이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기야.
일찍 모셔온다고 나쁠 건 없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벌써 왔다는데? 민주야, 성호야. 부탁 좀 할게. 대표님 바로 콜 때려! 나 내려간다!”
경후가 막 이든으로부터 도착한 문자를 보며 당황하더니 바로 뛰어나갔고.
민주는 그것 보라는 듯, 성호에게 시선을 던졌다.
빨리 안 가고 뭐 하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