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24화 (124/200)

124.절 해고해 주세요

사실.

최도윤이라는 배우의 필모그래피는 어지간한 베테랑 배우들도 따라가기 힘든 수준이다.

필모그래피의 절대적인 양이 아니라.

그 밀도를 이야기하는 것.

찍는 드라마마다 시청률 대박을 터뜨리고.

아직까진 두 건에 불과하지만, 그 두 건의 영화도 터졌다.

심지어 이미지까지 좋다.

쉽게 말해.

현재 활동하는 20대 배우들은 물론이고 어지간한 3·40대 배우들조차 명함을 못 내미는 위상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다고 도윤이 그들을 업신여기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런 의미에서 도윤은 지금 명실상부, 한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배우고.

그마저도 단순히 외모로만 뜬 게 아니라, 시청자며 관계자들이 입을 모아 칭찬할 만큼 좋은 연기력을 보유했다.

그뿐인가.

의도치 않게, 선구안이 좋다는 평가까지.

이제는 칭찬하기도 입 아픈 수준인지라, 그냥 ‘최도윤’이라는 말만 나오면 프리패스로 작용할 정도.

때문에 그런 도윤이.

<협조>를 통해 해외 진출 기회를 얻은 건 필연이나 다름없었다.

“지플릭스 측에서 원하는 건 두 개야. 할리우드 오디션, 그리고 차기작 역시 지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을 하는 거.”

“오디션이라면…… 그쪽에서 뭔가를 준비한다는 건가요?”

“그렇지. 할리우드에서도 지플릭스 쪽에 꽤 관심을 가지고 있고, 지플릭스를 통해서 영화를 만들 생각인가 봐. 거기에 널 합류시키고자 하는 거지.”

“제가 떨어지면요?”

“그래도 지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을 보장해 주겠다 이거지. 혹, 할리우드 쪽 제작 작품에 합류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시아 시장에서 도윤이 너만큼의 파괴력을 지닌 배우가 없을 테니까.”

하기야.

도윤은 일본에 한 번 다녀온 후 이루 말할 수 없는 돈과 명예를 손에 넣었다.

‘도사마’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심지어 어떻게 된 건지 일본 팬들이 IP를 우회해 팬카페에 가입해 일본어 글을 올릴 정도고.

여전히 NJN 측에서는 도윤의 일본 방문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촬영이 끝나는 대로 한번 일본에 들르고, 필요하면 드라마나 영화 한 작품 정도는 해볼 생각이었는데…….

<협조>가 이런 일을 부를 줄이야.

하지만.

“좀 깊게 고민해 볼 필요는 있어.”

경후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잘 알겠지만, 할리우드는 아직 아시아 배우들에게 무덤이나 다름없는 곳이라고. 스테레오 타입 배역만 주거나 그마저도 대사가 없는 경우가 허다해.”

“그야 뭐.”

도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자신 있다는 모습에.

경후는 도윤답다 싶었지만.

이내 다시 걱정을 쏟아냈다.

“한국에서 커리어 잘 쌓아놓고 가서 실패하면, 조롱거리밖에 안 된다고. 미국병 걸렸다면서.”

“그거 두려우면 평생 못 가죠. 일본도 그랬잖아요.”

“일본이랑 미국이랑 같냐? 시장 자체가 완전히 다른데.”

“크게 다를 건 없다고 봐요.”

도윤은 경후가 봐도 어이가 없을 만큼 덤덤하게 답하더니.

의외의 말을 꺼냈다.

“대신, 지금은 안 갑니다.”

“응?”

“그쪽에서 그랬다면서요. 바로 미국에 건너가자고.”

“그야 그렇긴 한데…….”

“저 아직 촬영 중입니다.”

첫 번째로.

지금 <달이 비춘 너울>이 촬영 중이라는 이유가 있었다.

지플릭스에서 원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도윤의 할리우드 스튜디오 오디션.

그것도, 지금 당장.

“아무리 타이트하게 일정 잡아도 보름 이상이라면서요. 그럼 그동안 촬영 중단되는 건요?”

도윤의 그 말에.

경후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몇몇 개념 없는 톱스타들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나.

설마 할리우드 오디션이라는 말에도 기존 일정을 고수할 줄은 몰랐던 셈.

“약속은 지켜야죠.”

그러면서 덧붙인 한마디 말에.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동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윤이 말이 맞아. 촬영은 마치고 가야지. 그게 신의를 지키는 거니까. 자기 좋다고 일정 다 캔슬하고 가면, 그건 아니지.”

경후는 한숨을 쉬었지만.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놓치기 아까운 기회라도.

‘선약’이 존재하는 한.

그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일단 그쪽에 보류 요청해 주세요. 해당 배우가 아직 한국에서의 일정을 못 마쳤다고.”

“후회 안 하겠냐?”

“신의 깨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겠죠.”

도윤은 간단하게 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가볼게요. 곧 촬영 있어서. 성호 기다리고 있을 텐데.”

“어, 그, 그래.”

멍하니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이 닫히자 다시 아쉬움의 한숨을 내쉬는 경후.

동민은 경후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아까운 건 알겠는데, 이번 건은 어쩔 수 없다. 알잖아? 저 녀석…….”

“알죠. 마음 한번 정하면 안 바꾸는 거.”

“그것도 있지만, 도윤이 저 녀석이 난 약속 어기는 거 한 번도 못 봤어. 그게 내기든, 다른 사람이랑 한 약속이든.”

동민은 그러면서 잠시 팔짱을 꼈다.

“예전에 이런 적이 있었지. <알고 있는가> 찍고 나서였나? VK에서 광고 제안이 들어온 적이 있었거든. 근데 도윤이가 그걸 깠어.”

“네에?”

경후가 입을 쩍 벌렸다.

VK라면-

재계 순위권에 드는 그룹의 이름이 아닌가.

“뭐, 그때 다른 배우 땜빵으로 급하게 도윤이랑 컨택한 거긴 한데,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었지.”

“왜요? 뭐, 도윤이가 VK 물건은 안 쓴대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집에 내려가기로 약속했었거든. 본가로.”

“……아.”

동민은 피식거렸다.

“그런 녀석이야. 덕분에 VK랑 척 져서 그쪽 광고할 일은 없겠지만, 지금 봐. 도윤이 잘 살고 있잖아?”

“그렇……네요.”

“기회는 좋은데, 너무 무리하지 말자고. 급하게 가면 주변을 못 보는 법이야.”

동민은 오랜만에 CEO다운 말과 함께 경후의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그러니까 메일은 천천히 보내고, 오늘은 소주나 한잔하자고.”

“아, 알겠습니다.”

“인상 펴. 잘하는 녀석이니까 앞으로 기회는 계속 올 거야. 그리고 도윤이는…… 내가 아는 배우들 중 제일 잘하는 녀석이고.”

그 말에.

경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 젠장. 답변이 왔군.”

할리우드 제작사, ‘이너 픽처스(INNER Pictures)’의 프로듀서 빌 테일러는 방금 막 맥북에 뜬 알림을 보며 양손을 가볍게 풀었다.

그러면서 옆에 놓인 스타벅스의 룽고(Lungo)를 한 모금 입에 머금은 뒤,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곤 에스프레소 향이 잔뜩 뒤섞인 숨을 내뱉었다.

“제발, 좋은 답변이 왔기를.”

빌은 고개를 돌렸다.

맥북 옆.

모니터에선 빌이 생전 보질 않던 아시아의 한 영화가 재생되고 있었고.

몇 번이고 돌려봤다는 것을 증명하듯, 플레이어의 재생 바에는 책갈피가 잔뜩 꽂혀 있는 상태.

“음, 좋아. 좋아.”

빌은 방금 막 흘러나온 액션씬을 보며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어디, 그럼 봐 볼까?”

다시 맥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조건이지. 거절할 리 없어.’

이너 픽처스는 할리우드의 수많은 제작사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곳.

이미 여러 블록버스터 영화를 제작해 흥행시킨 바 있고, 이제는 미국 시장을 장악해가는 지플릭스에게도 투자를 받았다.

물론 지플릭스 단독 영화는 전 세계 영화관에 개봉하는 것만큼의 파괴력을 기대하기 힘들겠지만…….

이건, 일종의 투자다.

그것도 가까운 미래를 위한 투자.

그렇기에 빌은 항상 생각만 하고 막상 제작할 수 없었던 여러 시나리오들을 골라냈고.

그중 하나를 택해-

지금 이, 라는 영화에서 자신의 시선을 사로잡은 한 아시아 배우에게 컨택한 것.

빌은 지금 이 메일을 열고 3초 정도가 지나면 자신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뭐야?”

빌은 환호하는 대신.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고.

“배우의 사정상…… 한국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친 뒤에야…… 미국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메일에 적힌 내용을 읽다가 순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에서의 촬영?”

빌은.

그렇고 그런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다.

능력만 있으면 아시아계건 히스패닉계건 일단 캐스팅하고 보는 사람이 빌이었고-

그 덕에 할리우드에서 명성을 얻은 ‘백인이 아닌’ 배우들이 수두룩했다.

빌을 두고 ‘아버지’라 부르는 배우까지 있을 지경이었으니.

때문에 빌은.

‘아시아 배우 따위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최도윤’이라는 배우가 거절한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고.

“아!”

‘한국에서의 촬영’이라는 말에 탄성을 내질렀다.

“내가 실수했군.”

빌은 도윤이 현재 드라마 촬영 중이라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이런 제안을 보낸 것.

때문에.

“까짓거, 기다리지.”

빌은 어깨를 으쓱이고 답장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타다다닥…….

키보드 타이핑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빌은 반드시 이 점찍은 배우를 잡겠다는 일념하에.

최대한 정중한 메일을 작성했다.

혹, 할리우드의 이름값으로 뭔가 건방지게 구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 한편으로는.

“역시,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

연기력을 보면서도 느꼈지만, 컨택이 쉽지 않을 거란 예상이 들어맞은 것에 묘한 희열과 답답함을 느꼈다.

‘으음, 이럴 바에야 차라리…….’

빌은 몇 가지 선택지를 떠올리다 결국 결정을 내리고, 백스페이스키를 눌러 모든 메일 내용을 지운 뒤.

타다다닥!

다시 메일을 작성했다.

빌은 메일을 다시 한번 쭉 둘러본 뒤.

“흠. 좋아.”

그제야 아주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보내기’를 클릭한 뒤, 곧장 책상을 더듬어 휴대폰을 잡았다.

누군가는.

지나치게 배우를 대우하는 빌에게 그건 할리우드 프로듀서의 자세가 아니라며 타박하지만-

빌은 아무래도 좋았다.

원하는 배우를 잡아서.

원하는 영화만 만들 수 있다면.

그까짓 자존심.

얼마든지 버릴 수 있다.

영화를 만드는 건, 빌의 일생이자 전부였으니까.

뚜르르르르…….

철컥.

“오, 바로 받는군. 나야. 혹시 한국 쪽에 아는 사람 있어? 뭐? 없다고? 아, 일본에는 있어? 음…… 그럼 일단 그쪽이라도 연결해 줘. 그리고, 혹시 너희 학교에서 한국어 잘하는 유학생 있으면 한 명 더 연결해 달라고. 응. 가급적 미국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친구로. 한국에 대해 좀 알아야 할 필요가 생겼거든. 오케이. 좋아. 그쪽 바에서 보자고.”

때문에 빌은.

아직 도윤이 오케이하지도 않았는데.

반드시 잡겠다는 일념하에 불타오르고 있었고.

“그쪽에서 곤란하다면 내가 가줘야지.”

비서에게 전화를 걸더니.

“나야. 한국행 비행기 하나만 끊어달라고. 편도로.”

-빌? 제정신이에요? 지금 한국에 가겠다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고!

“그 일을 위해 내가 레이첼 당신을 고용했지. 안 그래?”

-절 해고해 주세요.

“안 돼. 법에 걸린다고. 티켓 한 장, 아니 두 장 부탁해.”

-두 장이요?

“아, 그렇지. 다른 한 사람 정보는 곧 보내주지. 일단 알아봐 달라고. 3일 후에 출발하는 걸로. 끊을게.”

뚝.

간단하게 마무리하고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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