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또 달게 타 오면 죽는다
“오! 시작한다!”
가족들은.
오랜만에 한데 모였다.
리나와 동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어머니는 주부에.
아버지는 요새 바쁜 일정으로 매번 야근을 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네 사람이 한데 모일 수 있는 건.
바로 도윤 덕분이었다.
“도윤이도 같이하면 좋았을 텐데.”
“시간 없어서 자기 본방도 못 챙겨 보는 앤데 어쩌겠니. 우리끼리라도 봐야지. 근데 도윤이가 축구를 한다고?”
“응. <우리동네 체육대회>라는 프로그램인데, 출연진들이 종목 정해서 동네 팀이랑 경기하고 오빠는 거기 게스트로 끼는 거지.”
“게스트면 뭐 경기는 나오냐?”
“야, 유동하. 너 예고편 안 봤지?”
“오빠한테 너가 뭐냐?”
물론.
프로그램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왁자지껄한 분위기였고.
어머니는 그 광경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도윤이만 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어쩌겠는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배우라 해도 과언이 아닌 아들인데.
그래도-
이렇게나마 배우가 아닌 진짜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또, 가족들이 한데 모였다는 생각에.
슬며시 미소가 흐른다.
“오, 시작한다!”
이런 가운데 <우리동네 체육대회>가 시작되었고.
[아니, 종근이 형님! 또 흑역사 방출하시네.]
[야, 이리 와 봐. 오늘 끝장을 보자!]
출연진들이 주고받는 대화에 웃음을 짓던 것도 잠시.
게스트로 나와놓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기만 하는 아들의 모습에 가족들의 얼굴은 천천히 굳어갔다.
그러다 누군가 입을 열기 직전.
[저번에 방송에서 봤는데, 이종근 선배님이 주식하시다가…….]
도윤이 타이밍 좋게 나서서 한마디하고.
[충격], [아, 기억났다 흑역사!], [어질어질] 등 출연진에게 한 방 먹이는 자막이 흘러나오자.
가족들은 박장대소했다.
“와! 오빠 대박! 드립을 쳐도 이종근한테 치네!”
“와…… 이종근 장난 아니던데. 도윤이 살아 있나?”
“이야, 도윤이가 주식 이야기를 다 꺼내네.”
그리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도윤이 참여한 근황 토크는 도윤을 중심으로 재미있게 흘러갔고.
이어서 선발 테스트 장면이 나오자 가족들은 모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바라봤다.
“도윤이 실력 안 죽었네.”
“동하가 도윤이 축구 잘해서 학교 편하게 다녔다고 했었지?”
“오빠 축구 할 때 여자애들 다 쳐다보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가족이니만큼.
도윤이 얼마나 축구를 잘하는지는.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부모님은 축구부 감독의 끈질긴 구애에 도윤을 축구선수로 키워야 하나 고민했던 적도 있었으니.
덕분에.
“오, 골 넣었네.”
“도윤이 저놈 군대에서 축구만 하다 왔나.”
“실력 하나도 안 죽었어.”
이어진 본게임에서 도윤이 몇 골을 넣든.
가족들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해트트릭을 기록하고.
다섯 골째가 되었을 때는 다들 기뻐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출연진들이 기뻐하는 것처럼 난리 법석을 피우진 않았고.
저마다 손에 과일을 들고 와작와작, 씹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결국 경기가 끝나고.
<우리동네 체육대회> 팀이 승리를 거두자.
“뭔 헹가래까지 해준대?”
“오빠가 축구를 좀 잘해서 그런가 봐.”
“도윤이 예전이 더 잘했던 것 같은데.”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축구선수 시켰어도 대성했을 놈이야. 저 얼굴로 팬들 얼마나 모으고 다녔겠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팬들이 들었으면 명해졌을 덤덤한 감상평을 내놓는 듯.
역시나.
‘가족’다운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여기 있는 가족들만 그럴 뿐.
방송이 끝나자.
[‘우리동네’, 최도윤 활약 속 감격의 1승!]
[‘무려 7골’ 최도윤, 연예인 축구스타 탄생?]
[“호날두를 보는 줄 알았다” 감격의 출연진 소감!]
[‘7%→17%’. 무려 10%나 뛴 시청률!]
[‘일등공신’ 최도윤, 이제 스포츠 광고 시장까지 섭렵?!]
각종 채널에선 엄청난 반응이 일고 있었고.
특히, 지금까지 축구와 관련된 그 어떤 키워드도 없던 도윤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활약을 펼쳤다는 사실에 몇몇 사람들은 조작 의문을 제기할 정도.
하지만 제작진이 워낙 편집을 잘한 데다.
여러 각도에서 보여준 슬로우모션 카메라 덕에 그 논란은 쏙 들어갔고.
오히려 도윤의 실력만 부각시켜 주는 상황이 되었다.
-ㅁㅊ 이젠 축구까지 잘함
-이게 나라냐? ㅋㅋㅋㅋㅋㅋ
-(눈물 흘리는 개구리 짤)
-와.. 왜 축구선수 안 하고 배우 함?
-배우 해서 ㄹㅇ 다행
팬들의 반응이야 말할 것도 없고.
<달달한도라떼> 팬카페 회원은 더욱 늘어나는 등.
더 오를 곳이 없어 보이던 도윤의 인기는, 매일 신고가를 돌파하며 하늘을 뚫고 우주로 향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타이밍 좋게도, 아니, 제작진 측에서 의도했던 대로.
<달이 비춘 너울>의 첫 방송이 시작되었다.
[왜 자꾸 눈에 걸리느냐, 벼리야.]
[가지 말거라. 내 안에 있어라. 여기, 내 손 닿을 곳에.]
[너는 왜…… 꽃처럼 자꾸 눈에 밟히더냐.]
가상의 왕 ‘이운’으로 완벽히 변신한 도윤이 던지는 주옥같은 대사와.
PD 원섭이 엄청난 공을 들인 배경과 CG.
그리고 ‘벼리’가 간직한 마법적인 비밀이란 설정.
여기에 원섭 특유의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아름 특유의 박진감 넘치는 전개가 더해지며-
시청률은 그야말로.
폭발해버렸다.
“대박이라고! 대박!”
원섭은 시청률 집계를 마친 뒤 환호했다.
그야말로.
미쳐 날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리 준비한 케이크를 던지고.
샴페인을 터뜨리는 한편.
체면도 잊고 아름과 얼싸안고 엉엉 운다.
이제 원섭도 드디어.
‘메이저’ 반열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항상 ‘마니아틱’한 작품만 찍어와 한계가 있다고 평가받던 자신도 이제 주류 흐름에 합류하게 된 셈이고.
그건 원섭에게 평생의 꿈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작품, <달이 비춘 너울>마저 망하면.
정말 다 때려치우고 산이라도 들어갈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간 빛을 보지 못하던 원섭의 역량은 이번에 전아름과 최도윤이라는 완벽한 조력자들을 만나며 폭발했고.
“으아아아아아! 내가! 시청률! 15퍼센트! 뚫었다아아아아!”
지금 이렇게.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있었다.
“음…… 좀 무섭지만 인정.”
“저도 인정.”
“근데 좀 무섭긴 하네요.”
덕분에 첫방 축하 자리에 모인 배우들은 이해한다면서도 다소 무섭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원섭과 아름은 방방 뛰며 사방을 쏘다녔고.
곧 배우들도 전염되어 광란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도윤만 빼고 말이다.
“어, 형은 저기 안 껴요?”
“내가 왜.”
“쓰읍, 이럴 때 보면 참 아싸 같단 말이죠.”
“헛소리 그만하고 가서 커피나 가져와.”
“도라떼로요?”
“그걸 말이라고…….”
순간 도윤은 말문이 막혔고.
성호는 씩 웃었다.
“거봐요, 이제 중독이라니까? 제가 이제 곧 3호도 개발해 오겠습니다.”
“……또 달게 타 오면 죽는다.”
“옙, 알아 모시겠습니다.”
성호는 기다렸다는 듯 쌩하니 뛰어가 버렸고.
도윤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듯, 성호가 사 올 도라떼를 기대하며.
<협조> 시사회 일정을 살폈다.
‘이제 또 홍보의 연속이구나.’
배우들이 늘 그렇듯.
개봉이나 첫 방영 시기가 다가오면 각 프로그램에 홍보를 돈다.
도윤이 <달이 비춘 너울> 홍보를 위해 <우리동네 체육대회>에 출연한 것처럼.
<협조> 역시 시사회에 이어 지플릭스 공개를 앞둔 만큼, 여기저기 홍보를 다녀야 하는 시즌이 온 것이다.
하지만.
지치진 않았다.
늘 그래왔듯.
최선을 다할 테니까.
다만.
“최도윤 배우님! 빨리 오세요!”
저기 저.
서로의 얼굴에 케이크를 묻히고.
샴페인을 사방에 뿌려대는 광경엔 끼질 못하겠다.
하지만.
촤아아아악!
누군가의 ‘실수’로 옷이 젖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좋아.”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의욕적으로 다가가 테이블에 있는 샴페인 한 병을 집어더니.
치이이이익!
곧, 사방으로 샴페인을 뿌리며 이 광란의 대열에 합류해 버렸다.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 * *
영화 시사회는.
언제나 떨림의 연속이다.
제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도윤이라고 해도, 자신이 주연을 맡은 영화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상황에서는 약간이라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베테랑’답게 도윤은 이를 겉으로 표출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오빠 떠네요.”
“그걸 어떻게 알아?”
“오빠 표정 보면 알아요.”
매일 붙어 다니는 민주 정도나 이 사실을 눈치챘을까.
“오빠가 떨 때도 있고 신기하네요.”
“나는 뭐 맨날 덤덤하냐.”
“아뇨, 그보다는…… 매번 아닌 척하다 티를 낼 정도로 떠는 것 같아서요.”
도윤은 정확히 짚는 민주의 말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고.
“성호처럼 인간적이라서 좋네요.”
이어진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유를 해도…….”
“오빠가 그간 비인간적이긴 했죠. 근데 얼마 전에 선처 안 해준 것도 그렇고, 이런 모습 보니까…… 오빠도 인간이구나 싶네요.”
협박범 선처 안 해준 게 인간적으로 보였다니.
알다가도 모를 말이었지만.
평소 도윤의 모습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다.
겉으로는 완벽한 배우 그 자체.
누구 한 명에게도 결코 함부로 굴지 않고 문제가 될 만한 말들은 꺼내지도 않는다.
쉽게 말해.
스스로를 너무 옥죄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조금은 편한 대로 사세요. 지금처럼.”
“하나 궁금한데, 민주 넌 몇 살이냐?”
“나이 많다고 뭐 많이 배우는 것도 아니고, 나이 어리다고 뭘 모르는 것도 아니더라구요.”
알쏭달쏭하지만 다시 곱씹어보면 그럴듯한 말을 남긴 민주는.
“다 됐어요. 셔츠 소매 상의 아래로 내리는 거 잊지 마시고, 앉을 때는 시계가 보이도록. 아셨죠?”
“오케이. 고맙다.”
“네. 그럼 전 코디북 다시 보러.”
“…….”
협찬 액세서리를 세팅해 준 뒤 쌩하니 가버렸다.
그리고 도윤은 민주가 한 말을 가만히 생각해 봤다.
‘인간적인 거라.’
솔직히.
잘은 모르겠다.
회귀 이후에는 어떻게든 ‘배우’가 되기 위해 달려왔고.
배우로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뒤에는 그게 자연스러워졌다.
그게.
사람들이 아는 ‘최도윤’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누구지?’
도윤은 민주의 그 한마디에 고민을 품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최 배우.”
“아, 감독님.”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해?”
“아, 좋은 고민입니다.”
씩 웃는 그 모습에.
감독 오강선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은 고민? 거, 궁금한데 나한테만 알려줄 수 있나?”
“음…… 연애 문제는 아닙니다.”
“아깝네. 지금 막 기자한테 연락하려던 참인데.”
농담과 함께 껄껄 웃던 강선은 도윤의 어깨를 툭 쳤다.
“슬슬 들어가자고. 시간 됐으니까. 그나저나, 그…… 옆자리 사람한테만 안 들키면 되겠지? 어우, 무슨 요새는 깜짝 시사회니 뭐니 귀찮은 일만 잔뜩이라.”
“일단은요. 아마 감독님이 제일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저희보다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
이것만으로도 전국민 중 모르는 사람이 없는 강선이다.
때문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우, 됐어, 됐어.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맞으시면서. 그 분장이 설명해 주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연예인 메이크업을 받은 강선.
뭐, 시사회에 참여하니 당연한 거지만…….
강선은 못내 부끄러운 모양이다.
“감독이 영화만 찍으면 얼마나 좋아. 그치?”
“그러게요.”
“됐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가자고. 슬슬 시간 됐어. 야, 조감독아! 뭘 그렇게 화장을 만지냐. 하던 대로 해, 하던 대로.”
“와, 너무하네. 저도 사람이거든요? 내가 무슨 츄리닝만 입고 다니는 줄 아시나…….”
“맨날 촬영장에서 좀비처럼 어슬렁대는데 그럼, 내가 지금 이 드레스에 적응하겠냐, 안 적응하겠냐?”
“아! 몰라요!”
도윤은.
어김없이 오늘도 투닥대는 강선과 유정을 보며 피식거렸다.
그리고 도윤은 느끼지 못했지만.
품고 있던 긴장감은 어느새인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