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가능할까요?
예능 출연은 언제나 묘한 기분을 준다.
드라마 제작진 못지않게 많은 제작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아는 ‘작가’와 약간 다른 의미의 작가들.
그리고, 때로는 드라마 대본보다 정교하게 짜인 대본까지.
“와, 리액션도 다 정해주네요. 대박이다. 다른 데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예능 대부분이 그래. 요새는 안 그렇다고 하는데, 하는 곳은 다 하더라고.”
성호는 대본을 미리 살펴보며 리액션까지 정해준다는 사실이 꽤나 놀라운 모양이다.
하긴.
방송이 하나의 ‘쇼(Show)’인데 그런 게 없는 것도 이상하다.
몇몇 프로그램이야 정말 대본 없이 출연진의 역량에만 의존한다지만, 그것 역시 일단 기본적인 틀은 잡혀 있으니까.
하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드라마 홍보차 나왔다는 목적이 강한 데다.
오늘 테마가 축구인 만큼, 도윤이 기대하는 건 따로 있었으니까.
‘몸 만들어두길 잘했어.’
도윤은 어린 시절 반마다 하나씩 꼭 있던 ‘축구 잘하는 애’였다. 그리고 그 ‘축구 잘하는 애’ 중에서도 ‘특히 잘하는 애’였다.
오죽하면 초등학교 내내 축구부 감독이 뻔질나게 찾아와서 설득하고 축구부 애들보다 잘 대해줬을까.
도윤이 아마 축구선수가 될 생각이 있었다면, 축구부에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일.
여하튼, 축구깨나 한다는 유준이 아득함을 느낄 만큼 도윤의 축구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그 실력은 회귀했다고 해서 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몸이 돌아온 덕인지 감각을 빠르게 되찾았다.
그래서 도윤은 <우리동네 체육대회> 관련 소식을 듣자마자 유준과 함께 연습하며 실력을 끌어올렸고.
유준은.
일주일째 되는 날 항복을 선언하며 나가떨어졌다.
어차피 다음 작품 들어갈 때까지 한 달이나 빈다며 한 달 동안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던 녀석이.
그렇게 지쳐 나가떨어질 줄이야.
여하튼 뭐.
도윤은 지금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
그리고.
제작진은 이 사실을 모른다.
“아! 여기 계셨네요! 최도윤 배우님,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아,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마침 다가와 도윤과 악수한 <우리동네 체육대회> PD.
그는 도윤을 보더니 잠시 턱을 매만졌다.
“저번 미팅 때도 느꼈는데, 교체로 들어가서 멋진 장면 하나 만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 출연진한테는 최도윤 배우님 들어가면 공 계속 몰아주라고 이야기는 해뒀습니다.”
“그러실 필요까진 없는데.”
“아유, 뻔히 아는데요. 와서 기깔 나는 장면 하나 만들고 가면 대박 아니겠습니까? 저희가 구도 쫙 잡아서 편집을 기가 막히게 해드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
PD는 약간 오해하고 있는지, 걱정 말라는 듯 껄껄 웃었다.
그러자 도윤이 말했다.
“선발로 들어가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선발이요?”
PD의 눈빛이 순간 달라진다.
그리고 묻는다.
“으음…… 어차피 공식경기가 아니라 전후반 30분씩만 뛰는 거긴 한데…… 처음부터 들어가셨다가 실수라도 하면 중간에 교체될 수도 있는데요.”
“상관없습니다.”
“제가 최도윤 배우님 축구 잘하신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던 것 같은데…….”
난처하다는 듯 고민하는 PD.
그때 옆에 있던 메인 작가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PD님, 그럼 룰을 추가할까요? 중간에 교체되어도 다시 들어가는 걸로…….”
그러자 PD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홍 작가, 축구 몰라? 무슨 농구도 아니고 한번 들어간 선수가 다시 들어가는 게 어디 있어?”
“그, 그래요? 전 몰랐어요.”
“됐고, 흠…… 선발이라. 이거 다 짜놔서 지금 바꾸긴 조금 힘들 것 같지만…….”
PD는 잠시 고민했다.
‘최도윤 정도 되는 배우가 선발로 들어가서 뛰면…… 차라리 그건 그거대로 재미있겠는데?’
어차피 예능은 편집이 반이다.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출연진의 행동이 웃기게 비칠 수 있고,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행동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 웃기게 편집하면 되는 거잖아?’
머릿속에 그려진다.
호기롭게 나온 인기 배우.
하지만 선발로 나서서 헛발질만 하면서 큰 웃음을 주고 후반 시작과 동시에 교체.
이거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결정을 내린 PD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가시죠. 대신,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혹시 부상이라도 당하면…… 저 밤길 못 다닙니다.”
“걱정 마세요.”
도윤은 농담 반 진심 반으로 당부하는 PD를 안심시켰고.
마침 성호가 차에서 꺼낸 자신의 축구화를 보며 씩 웃었다.
* * *
<우리동네 체육대회>는 고정 출연진과 게스트가 팀을 이뤄 동네 팀과 스포츠 경기 대결을 벌이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물론 예능이니만큼 다짜고짜 본 경기로 들어가진 않고, 근황 토크 및 실력 점검 시간이 이어진다.
“이종근 씨. 아니 그래서 왜 자꾸 저희 가족사를 들춰내느냐 이거죠. 계속 그러면 나 자꾸 폭로전 간다?”
“거 자꾸 가족 가족 그만합시다. 가족 이야기만 들어도 내가 진짜…….”
“야! 나는 그럴 가족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결혼을 못 하겠어.”
“아, 이 형 내가 봤는데 저번에 또 소개팅 10분 만에 끝났다잖아!”
케이블 예능답게.
지상파 예능보다는 좀 더 높은 수위의 발언들이 오가고.
출연진들의 흑역사를 들춰내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그리고 대개 게스트는 이런 경우, 둘 중 하나다.
메인 MC가 슬쩍 끼워주거나.
아니면, 자진해서 나서거나.
도윤은 후자였다.
“저번에 방송에서 봤는데, 이종근 선배님이 주식하시다가…….”
이종근의 표정이 흙빛으로 물들고.
다른 고정 출연진들은 박장대소한다.
“이야! 최도윤 배우님 시작부터 세게 나오시네!”
“조사 철저하게 해오셨나 보다. 야, 오늘 종근이 형 임자 만났다!”
“이야, 여기서 종근이 형한테 주식 이야기 꺼낼 줄은 누가 알았겠어.”
안 그래도 이종근은 엄청난 덩치에 근육질이라 <우리동네 체육대회>에서 ‘형님’ 포지션을 맡고 있는데.
여기에 도윤이 슬쩍, 다들 -예능적 재미로- 언급하길 꺼려 하는 주식 이야기를 꺼내 들자 다들 놀라워한 것이다.
‘뭐야, 이런 캐릭터였어?’
덕분에 PD는 도윤의 돌발 발언에 당황하면서도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예능은 편집이 반.
“당돌한 캐릭터로 가자고. 그러다 경기 때 깨지면 그림 좋게 살겠는데.”
편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캐릭터가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도윤은 PD를 즐겁게 만들고 있었다.
메인에서 약간 벗어나는 흐름이긴 해도, 일회성으로 나오는 게스트가 저런 모습을 보인다는 건 다양성 측면에서 아주 좋은 거니까.
“야, 야. 빨리 말해봐.”
“뭐요?”
“저기 있는 저 최도윤 저 친구 흑역사!”
“야! 종근이 형이 최도윤 씨 흑역사 물어본다!”
그리고 도윤의 돌발적인 발언 덕분에 분위기는 상당히 재미있게 흘러갔고.
이종근은 상당히 오랫동안 활동한 예능인답게 PD의 의도를 캐치하고, ‘억울한 주식 투자실패자’ 캐릭터를 연기하며.
흐름에 밀도를 더해갔다.
여기에.
“자, 최도윤 씨. 그리고 우리 이혜주 씨와 오환 씨. 솔직히 질문이 너무 늦긴 했는데, 이번에 드라마 새로 하신다고…….”
“와, MC 자질이 의심된다. 우리 지금 촬영 시작한 지 1시간 30분이 지났는데 이제 드라마 뭐 나오냐고 물어보냐.”
“우리 진짜 게스트 너무 홀대한다. 자, 최도윤 씨. 대표로 소개를 좀…….”
“아, 네. 이번에 <달이 비춘 너울>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달이 비춘 너울>은 판타지 사극으로 조선의 왕 ‘이운’과 ‘이운’의 소꿉친구 ‘벼리’, 그리고 ‘벼리’의 호위무사 ‘육강’의 이야기를 그려낸 작품으로…….”
다행스럽게도, 드라마 소개도 잘 마무리했다.
어차피 뭐.
드라마 소개 자체는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하다.
도윤이 유명한 이상.
이곳 예능에서 활약을 펼치면 드라마에 대한 관심도 충분히 올라갈 테니.
“자자, 우리 잡담이 너무 길어지고 있는데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오전 중에 얼른 실력 체크하고 선발 명단 만든 다음에 오후에 경기 뛰어야 한다구요! 할 게 너무도 많습니다. 시청자 여러분들께 재미도 드려야 하고,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승리를 거둬서 제작진한테 소고기도 뜯어 먹어야 하고…….”
“어유, 형. 숨 좀 쉬고 하세요.”
그런 와중에 메인 MC가 적당한 선에서 근황 토크를 끊었고.
도윤은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이게 예능 촬영이구나.’
스튜디오 예능도 녹화 시간이 길기야 하지만.
역시나, 버라이어티 예능들은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
이런 집중 안 되는 환경에서 1시간이나 떠들고 이제야 실력 체크에 들어가다니.
여하튼.
“자, 규칙 설명드리겠습니다. 오늘 경기! 선발에 들어가는 조건은 최대한 많은 점수를 획득하는 겁니다!”
“아니…… 오전에 이렇게 힘 다 빼면 우리 또 지라고? 야! 제작진, 솔직히 말해봐. 우리 소고기 사 주기 싫어서 그러는 거지?”
“이야, 이건 진짜…… 제작진이 괜히 악마 소리 듣는 게 아니야.”
“여러분! 말씀 중 죄송하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세요. 힘을 빼는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실력 점검 차원에서…….”
“야이 씨! 실력 점검한다고 체력 빼려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분량을 늘리기 위한 진흙탕 토크쇼가 이어지는 가운데.
“자, 그럼 오늘은 우리 이종근 씨부터 시작을 한번…….”
“아, 왜 또 내가 첫빠따야!”
“그야 당연히 이종근 씨가 큰형님이니까 그렇죠.”
“야, 이럴 때만 큰형님이냐?”
이종근을 시작으로, ‘실력 테스트’ 타임이 시작되었고.
뻐엉!
“오~ 홈런. 우리 이거 종목 발야구로 바꿀까요?”
“야, 긴장해서 그래!”
“잘 봤습니다. 그럼 다음 분!”
고정 출연진들이 하나둘 골대를 향해 공을 차는 과정을 거친 뒤.
드디어 도윤의 차례가 되었다.
“자, 최도윤 씨. 혹시 예전에 축구를 해보신 경험이 있을까요?”
“아, 어릴 때 친구들이랑 조금 해봤습니다.”
“야, 교체다, 교체.”
“종근이 형님, 안심하세요. 선발로 나설 수 있겠네요. 우리가 게스트 우대하는 프로그램은 아니잖아요?”
도윤이 그냥 어릴 때 축구를 해본 게 전부라고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들어 물어뜯는 고정 출연진들.
PD 역시.
‘개발만 아니면 될 텐데. 흠. 개발이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일단 선발로 넣고 중간에 교체해 버리고…….’
도윤이 어떤 대단한 모습을 보여줄 거란 상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자, 규칙은 간단합니다. 정확히 세 번을 차서 골대에 넣으면 됩니다. 현재까지 세 번 모두 넣은 사람이 딱 둘뿐이기 때문에 여기서 세 번 모두 넣어주면 선발이 거의 확정적이죠.”
“혹시 퍼포먼스 점수는 없나요?”
“퍼, 퍼포먼스요?”
그때 도윤이 건넨 물음에.
메인 MC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PD와 눈빛을 교환한 뒤 곧바로 말을 이었다.
“퍼포먼스 점수. 있죠. 멋지게만 넣으면 바로 선발, 저희가 약속드리겠습니다!”
도윤은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톡.
준비된 공을 바라보며.
통, 통.
공 아래 발을 넣어 허공으로 가볍게 띄웠다.
순간 PD의 눈이 커다래진 가운데.
도윤은.
쾅!
허공에 뜬 공을 그대로 후려갈겨.
철렁!
골망을.
뒤흔들어 버렸다.
그리고 사방이 고요해진 가운데.
데구르르르…….
공 구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