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15화 (115/200)

115.무슨 여관방 꾸미냐?

<달이 비춘 너울>.

판타지 사극에 도윤이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며.

도윤의 팬카페, <달달한도라떼>와.

유명 커뮤니티의 최도윤 갤러리는 오랜만에 북적거렸다.

원래도 활발한 두 사이트지만.

도윤의 신작 소식이 전해지자 더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한 것.

-최도윤 신작 또 찍는 거 ㄹㅇ실화?

-아니 ㅋㅋㅋㅋ 배우 안 쉼?

-이엔은 진짜 나중에 상장하면 최도윤 주식 줘라 ㅋㅋㅋㅋ

-주식이 뭐냐? ㄹㅇ루 이사 등재해야 할 판에 ㅋㅋㅋㅋ

-제대로 쉰 적이 있긴 함? <협조> 찍고 일본 가서 특별출연한 다음에 오자마자 현대배경도 아니고 사극? ㅋㅋㅋㅋㅋㅋ

몇몇은 도윤이 –표면적으로는-전혀 쉬지 않는 듯한 모습에 이엔 엔터를 향해 장난 반, 진담 반의 성토를 보냈고.

-와 20대에 이렇게 다작하는 배우가 있긴 함?

-하고 싶어도 이 정도로는 못 할 듯 ㄹㅇ

-2년 동안 다른 배우 5년은 걸릴 필모를 쌓아버렸자너 ㅋㅋㅋㅋ

-동나이대 배우들은 이제 최도윤 기준으로 매우 고통받을 듯

-ㄴㄴㄴ 저건 기준이 될 수 없음 걍 언터처블임

도윤의 활발한 활동에 경악하는 팬들도 부기지수였다.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다.

좋아하는 배우의 이미지 소모를 걱정하는 팬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환영하는 팬들도 많았다.

사실 배우는 작품 외 예능이나 다른 곳에서 보이는 ‘이미지 소모’를 더 걱정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프로그램 출연이 거의 없는 도윤은 그럴 걱정이 없다.

대신.

‘이미지 고착화’를 걱정하는 팬들은 있었다.

-이번에는 차가운 역할 가려나?

-<협조>에서도 그런 느낌일 것 같던데

-왕 역할이니까 좀 엄근진한 느낌 아님?

-뭐가 됐든 또도윤 소리만 안 나오면 좋겠다

그러나.

생각만큼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지금 도윤의 손에 들린 대본에는.

빽빽한 분석과.

이제 맡을 가상의 왕 ‘이운’ 역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에 대한 메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으니까.

결국.

배우가 하기 나름의 문제.

그리고 도윤에겐 새로운 연기를 펼칠 만한 능력이 있었고 말이다.

여하튼 도윤은 지금.

대본을 틈틈이 살피는 한편.

이사를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사를 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대본을 보는 것.

“어유, 바빠 보이시네요.”

“네, 뭐. 정신없네요. 아, 그건 이쪽으로 둬 주세요. 조심히 놔주시고요. 감사합니다.”

이런 와중에도 자신의 대본이나 분석글, 자료들이 담긴 상자는 매의 눈으로 지켜본다.

하나라도 누락되면.

지금까지 했던 노력들을 잃어버리는 기분일 테니.

그런데 조금은 민망한 것이.

투룸 오피스텔에서 방이 무려 네 개나 되는 집으로 이사를 오다 보니, 사실 저런 자료들을 놓는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딜 놓든.

눈에 띌 정도로 집이 텅 비어 있었으니까.

“가구 채우려면 시간 좀 걸리겠는데요.”

덕분에 성호는 마치 자기 집을 꾸미는 양 어디에 가구를 놓는 게 좋을지 옆에서 열심히 떠들기 바빴고.

민주는.

행동으로 보여줬다.

“폭 3미터. 이만하면 어지간한 거실장은 다 들어가겠네요. TV는 벽걸이로 하고…… 냉장고는 빌트인이니까 그냥 두고. 여기는 정수기 자리에 딱인데요.”

센터 직원들이 오가는 와중에도 용케 줄자를 들고 길이를 재던 민주와.

“누나, 소파는 여기가 좋겠죠?”

“집이 남향이라 햇살 받기에는 여기가 최고야. 이쪽은 벽 때문에 잘 안 들거든.”

잘도 쿵짝이 맞는 성호를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니들 집이냐?”

물론 이에 대한 민주의 대답은 간단했다.

“저희가 안 하면 여기도 상자나 잔뜩 쌓일걸요.”

“…….”

“상자는 앞으로 저기 저 방에 몰아넣으세요. 창고로 생각하고.”

민주는 그렇게 말하곤 줄자로 열심히 규격들을 체크하는 한편.

“여기서 고르세요. 인테리어가 화이트톤이니까 가구들도 다 밝은 톤이 어울릴 거예요.”

언제 준비했는지.

유명 가구업체의 카탈로그를 내밀었다.

도윤은 혀를 내둘렀다.

준비성과 꼼꼼함 하나는 그야말로 탑이다.

가끔.

무서울 정도지만.

그나저나.

마침 잘됐다.

“너 먼저 골라.”

도윤은 성호에게 카탈로그를 넘겨주었고.

“나랑 겹치게 고르면 죽는다.”

미리 엄포를 놓아두었다.

성호는 멍한 표정으로 그걸 받아들더니.

망설이는 사이 민주가 옆으로 슥 다가와 가구를 빠르게 고르기 시작했다.

“너 살 집 인테리어가 이것보다 좀 어둡지? 그럼 소파는 이게 좋겠고…… 거기 아일랜드 있으니까 식탁은 좀 더 작은 사이즈로.”

“이, 이거요?”

“어, 그거. TV는 알아서 대기업 거 중에 고르고, 나머지는 뭐…… 어머니한테 물어봐.”

민주는.

성호가 도윤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와 살 집을 구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뭔가 감정을 드러내거나.

개의치 않았다.

솔직히.

같이 함께하는 입장에서 성호에게 집을 구해주면 다른 반응을 보일 법도 한데-

전혀 그런 것 없이 오히려 성호를 도와주기까지 한 것이다.

왜냐하면.

“넌 진짜 괜찮아?”

“네. 전 이미 집 있어서.”

“너도 참 대단하다. 아버지 지원도 안 받고.”

“그거야 뭐. 그리고 오빠가 차 뽑아준다면서요. 그럼 됐죠.”

이미 자기 이름으로 된 집이 있었으니까.

회귀한 시점의 관점으로 본다면-

승리자나 다름없는 민주였다.

‘근데 진짜 정체가 뭘까.’

대충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인맥도 범상치 않고.

부모님도 대단한 분 같은데.

그걸 또 잘 이용하고 자신의 영역도 독자적으로 구축한 민주가 제일 대단하다.

하기야.

신인 티도 못 벗은 도윤에게 고가의 협찬품을 턱턱 안겨주는 게 어디 인맥으로만 가능한 일이겠는가.

본인 능력이 출중한 거지.

여하튼.

능력 있는 사람을 쓰려면 뭐든 안 아끼는 게 최고다.

자기 사람을 챙긴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솔직히, 민주만 한 스타일리스트는 다시 못 만날 것 같다는 이유도 있었으니까.

“차 고르면 말하기나 해.”

“네, 꼭 말할 테니까 걱정 마시고. 성호야, 이런 칙칙한 걸 도대체 왜 고르는 거야?”

“엥? 누나 눈에는 별로예요?”

“무슨 여관방 꾸미냐?”

그런 이유로 저 둘을 보고 있으면.

든든한 기분이다.

아무 생각 없이.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그나저나.

‘리딩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됐는데…….’

슬슬 대본 분석도 마쳐가고.

준비도 확실하게 한 만큼.

도윤은 곧 있을 리딩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도.

지이이잉-

도윤의 휴대폰이 울리며.

대망의 <달이 비춘 너울> 첫 리딩 날짜가 고지되었다.

* * *

배우의 서열은 보통 두 가지 기준으로 정해진다.

현재의 명성.

그리고, 배우의 연차.

물론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인 배우끼리는 서로 알 만큼 아는 이상 적당히 편안하게 지낸다.

그런데.

도윤처럼 짧은 시간 사이 급격히 위상과 명성이 올라간 배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열에 민감한 선배들은 혹시라도 자신의 서열이 무시당할까 싶어 은연중 도윤의 성향을 파악하려 애쓰며.

도윤과 연차는 비슷하고 어쨌든 선배지만, 필모그래피나 명성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배우들은 선배 대접에 대한 기대를 과감히 버린다.

그 외.

무명 티를 못 벗은 배우나 신인들은.

잔뜩 긴장하는 등.

여러모로.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기존의 체계를 완벽히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존재가 바로 도윤이다.

그리고 이런 서열 문제는.

시작하기 전부터 PD와 작가를 긴장시킨다.

‘이래서 연차 쌓이기 전에는 PD가 배우들 등쌀에 죽어난다고 했던 거구만.’

원섭도 나름 경력 쌓은 PD인 만큼 수많은 배우들을 만나봤지만.

지금만큼 높은 명성의 배우들이 잔뜩 모인 작품은 처음이다.

원섭도 이럴진대.

이제야 두 번째 작품을 진행하는 아름은 오죽하겠는가.

아무리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PD와 작가의 권한과 위상은 절대적이라지만-

이 정도 차이면 마냥 간단히 생각할 문제도 아니다.

사실 어딜 가나.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에서 가장 많은 문제가 일어나는 법이니.

물론 자신이 본 것과 지금까지의 소문을 종합했을 때 도윤은 절대 ‘트러블메이커’가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런데.

기우였다.

“안녕하십니까, 배우 최도윤입니다.”

도윤은 누가 됐든 자신보다 연차가 높은 배우들에게는 빠짐없이 깍듯하게 인사하며 긴장하던 선배들을 당황시킨 반면.

“아,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많이 배우겠습니다.”

“그, 그, 그 제, 제가 많이 배, 배우겠습니다!”

잔뜩 얼은 신인이나 후배들에게는 부드럽게 대하며 품격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걸 보며 원섭은 깨달았다.

좋은 소문들만 들리는 이유와.

도윤이 성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리고.

“PD님. 이것 좀 보세요. 최도윤 배우님 스타일리스트 남궁민주 씨가 만들어 온 코디북인데요…….”

도윤 못지않게.

주변 사람도 대단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거 설마 스케치야?”

“네! 저 처음에 보고 실사인 줄 알았다니까요? 와 진짜…… 이거 완전 대박 아니에요?”

원섭은 의상팀 담당자가 호들갑을 떠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 스케치를 다시 한번 살폈다.

예술이 있다면.

이런 건가 싶었다.

아니.

이건 스케치 수준을 벗어났다.

차라리 이미 찍은 사진을 그대로 따라 그렸다고 해도 믿을 수준이다.

심지어 스케치 옆에 간략하게 적힌 메모들은 문외한인 사람도 이해할 만큼 직관적이다.

“어…… 이거…….”

“그대로 가도 되겠죠?”

“괘, 괜찮겠어?”

“저희가 배워야 할 판인데요?”

심지어 자존심 강한 의상팀 담당자가 홀딱 반할 정도였으니.

여기에.

“안녕하십니까, 오늘 리딩 잘 부탁드립니다.”

저번 미팅에서 봤던 거구의 매니저가 리딩이 열리는 현장 곳곳을 빠르게 누비며 커피를 돌리는데.

“어머, 내 취향은 어떻게 알았대?”

“하하, 맛있게 드세요!”

음료 취향만큼은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셔도 제각기 넣는 시럽 양이나 원두가 다를 만큼 까다로운 배우들이 모두 만족한다.

“이건 뭐, 어벤저스네.”

결국 원섭은 실소를 터뜨렸고.

“저희 최 배우님 너무 멋있지 않아요?”

언제 왔는지 아름이 옆에서 슬쩍 운을 띄웠다.

“아주 푹 빠졌네.”

“전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쓸 작품들 주연 전부 최 배우님으로 하고 싶은걸요.”

“그럼 이번 작품 터뜨려야겠네?”

“그쵸. 매번 성공해야겠죠. 그래야 모실 때마다 출연료 감당할 수 있을 테니까.”

아름은 <알고 있는가> 시절처럼 주먹을 불끈 쥐며 전의를 불태웠고.

이를 본 원섭도 자극을 받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 거 제대로 터뜨리자고. 다음 작품도 같이할 수 있게.”

“맡겨주세요. 제가 앞으로 두 시간만 잘게요.”

“두 시간? 그건 너무 갔다.”

“그런가요? 헤헤.”

여하튼 뭐.

우려했던 일은 전혀 없어 보였고.

모두가 신경 쓸 주연 배우는.

그야말로 시작부터 완벽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니 이만하면…….

모든 준비는 끝난 셈.

“그럼, 슬슬 시작하자고.”

원섭은 밝은 표정으로 말했고.

아름은 그에 못지않은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