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너무 좋은데
최도윤.
2년 전만 해도 주목받는 신인들 중 하나였고.
그 누구도 이렇게 빨리 성장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20대 최고의 배우를 넘어 한국에서 손꼽히는 배우들 중 하나로 거듭나는 배우.
그래서.
이 바닥에선 이제 이런 이야기가 떠돈다.
최도윤을 잡기 위해서는.
돈보다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가령.
도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실력 있는 감독이라든가.
혹은.
도윤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퀄리티 좋은 작품이라든가.
그런 의미에서 서원섭 PD는.
자신이 저 둘 중 어디에도 해당되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서원섭은 지금까지 나름대로 준수한 작품을 내놓았지만, 시청률에선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한마디로.
매니아층은 생겼으나 그 덕에 ‘볼 사람만 보는’ 드라마를 만드는 PD란 이미지가 생긴 셈.
이미지라는 건 생각보다 집요하고 끈질기다.
그래서 서원섭은 이번 드라마, <달이 비춘 너울>을 처음 DBS에 보여줬을 당시에 윗선에서 보인 반응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거 되겠어?’
짧은 물음이지만.
많은 의미와.
엄청난 무게를 지닌 말.
지상파는 분명히 보수적이다.
특히, DBS는 이른바 ‘트렌디한 사극’에 두어 번 정도 데인 적이 있다.
약간의 변형은 몰라도 가급적 기존의 역사를 철저히 따라가는 ‘정통 사극’을 벗어나려던 몇몇 작품을 받아들였다가-
시청률에서 참패했던 경험이 있는 셈.
그래서 이미 1년 전 완성되었던 이 <달이 비춘 너울>은 사실 이제 와서 제작이 결정되고 캐스팅에 들어간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난항이다.
주연 배우로 점찍었던 배우는 음주운전으로 현재 배우 활동이 어렵게 됐다.
그래서 정말 도박하는 심정으로 도윤과 만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어필을 모두 했지만…….
“안 되겠지.”
서원섭은.
아마 가능성이 낮을 거라 생각했다.
최도윤이 누군가.
하는 작품마다 대박을 터뜨리고.
이제는 일본에서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배우다.
성급한 예측이긴 해도 혹자는 도윤이 헐리우드까지 진출할 역량이 충분하다고 이야기할 정도였으니.
그런 배우를.
자신이 주연 배우로 캐스팅한다?
글쎄.
만약 되기만 한다면 DBS에서도 태도를 분명히 바꾸고, 현재 간당간당한 제작비도 대폭 증원해 주겠지만.
그게 어디.
되겠냐는 말이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에요. 그리고 그거 주연, 처음부터 최도윤 배우 생각하고 쓴 거라면서요?”
원섭의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이는 아름.
“네. 근데 그사이에 진짜 엄청 커버리셔서…… 솔직히 다 썼을 땐 캐스팅할 수 있을지나 의문이었어요.”
아름은 그래서 대본을 일부 수정했다.
애초에 도윤을 주인공으로 상정하고 쓴 대본이었으니.
다른 배우들 입장에서는 소화하기가 난감할 수 있었고.
실제로 아름의 초고를 본 배우 몇몇은 대놓고 대본 수정을 요구하기도 했다.
자신의 이미지에 맞지 않다면서.
그래서.
이번에 원섭이 도윤을 만나러 간다는 말에 다급하게 대본을 수정하고 원섭에게도 알려준 것이다.
원섭이 미팅에서 도윤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런 이유.
여하튼.
아름은 오래도록 묵혔지만, 그만큼 오래도록 기다린 작품으로 어쩌면 도윤과 다시 함께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떨고 있었다.
물론.
확률은 낮지만 말이다.
“쉽진 않을 거예요.”
“저도 알아요. 그래도 어쩔 수 없죠. 최도윤 배우님인데요.”
“낸들 이럴 줄 알았을까요. 세상에 어느 배우가 2년 동안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하고 그 작품들을 다 터뜨려?”
아름은 <알고 있는가>를 찍을 당시만 해도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던 도윤을 떠올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도윤은 그때도 이미 스타 같았다.
인성도 그렇고.
당당한 행동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굳이 옆에서 매번 비교당하며 본의 아니게 주변 사람들의 평가를 높여주던 서태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되게 좋았었는데.’
드라마 작가 입장에서.
자신이 만든 캐릭터를 살아 숨쉬게 만들고,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연기해 주는 배우야말로.
최고의 배우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도윤은, 아름이 만난 배우들 중 최고였다.
아직 얼마 만나지 않아, 앞으로도 수많은 배우들을 만나겠지만…….
아마 수십 년이 흘러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시간 됐으니까 준비하자고. 혹시 안 돼도 너무 실망하지 말고.”
“실망은요.”
일단 둘의 지상과제는.
이제 곧 이 사무실로 들어올 도윤을 어떻게든 설득하는 것.
아마 힘들겠지만…….
그래도,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둘이 그렇게 잔뜩 긴장한 채 전의를 불태우는 사이.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도윤과 성호, 민주.
‘팀 최도윤’이 들어섰다.
“서원섭 PD님.”
차례로 인사를 나누고.
도윤은 아름에게도 고개를 숙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전아름 작가님.”
“최도윤 배우님.”
아름은 이전보다 덜 쭈뼛거렸지만.
여전히 부끄러움과 흥분은 남은 채 도윤과 악수했다.
“오시는 데 오래 걸리진 않으셨습니까?”
“서울이 항상 그렇죠. 괜찮습니다. PD님랑 작가님이야말로 저 기다리시느라 고생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어유, 무슨 그런 말씀을.”
인사치레가 오가고.
본론에 들어가기 전, 웃음을 띤 채 작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야기들이 허공을 떠도는 가운데.
“아, 그리고 오늘은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윤은 드디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꿀꺽.
원섭과 아름은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여기서 바로 거절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면.
그것만큼 허무하지도 않을 테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게 더 낫다.
괜히 질질 끌다가 거절당하고 처참한 기분에 며칠 휩싸일 걸 생각하면 말이다.
그래서.
“네, 준비됐습니다.”
원섭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스스로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 버렸고.
이어진 도윤의 말에 그만-
맥이 탁 풀려버렸다.
“제가 하겠습니다.”
“네?”
“<달이 비친 너울>, 이 작품 주연 배역 ‘이운’ 말입니다.”
원섭은 멍해졌고.
아름은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이미 오는 길에 도윤이 결정을 내린 사실을 아는 성호와 민주는.
각자 할 일을 했다.
성호는 도윤의 메모가 잔뜩 담긴 대본을 꺼내 건넸으며.
민주는 오는 동안 간단히 스케치한 코디들이 담긴 코디북을 꺼냈다.
그리고 도윤은.
“설마 그사이에 다른 배우 알아보고 오신 건 아니죠?”
장난스레 둘에게 물었다.
마치.
이런 반응을 기대했다는 듯이.
* * *
“진짜로? 진짜 사극 한다고?”
“네. 그렇게 됐어요.”
“너도 참 대단하다. 젊어서 그런가. 쉴 생각은 없고?”
“쉬긴 뭘 쉬어요. 젊을 때 빡세게 돌아야지.”
수철은 졌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양미리를 하나 입에 쏙 넣고 우물우물 씹는다.
“너오 창 대당해.”
“다 씹고 말씀하세요.”
“너도 참 대단하다고.”
“같은 말 세 번이나 하셨는데.”
“이미지 소모 걱정은 안 하냐?”
도윤은 그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 그럴 일도 없죠.”
“하기야. 이번엔 사극인데. 그래도 죽어라 찍진 마라. 나중에 가면 분명히 ‘또도윤’ 소리 나온다.”
뭐.
그렇다 해도 할 말은 없지만.
도윤은 작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 큰 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 정 안 되면.
휴식 좀 하면서 식견을 넓히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녀도 되는 거고 말이다.
“그리고 선배님 신경 좀 쓰세요. 나이 많이 드셨으면서.”
“넌 꼭 그렇게 직설적으로 꽂아버리더라. 넌 투수했으면 직구 하나만 던졌을 놈이야. 그리고 이제 선배가 뭐냐? 형님이라 불러.”
“네, 형님.”
“어, 좀 빠르다?”
“제가 좀.”
도윤은 낄낄대며 수철과 건배한 뒤 잔을 비웠다.
그나저나.
이제 곧 시작될 텐데.
“아, 광고 나오네요. 사장님. 죄송한데 채널 좀 고정해도 될까요?”
“어유, 얼마든지요.”
이제는 단골집이 된 시장 구석의 양미리집 사장은 도윤의 말에 흔쾌히 볼륨까지 높여주었고.
곧.
수철이 주연을 맡은.
<여기까지일까>의 첫방이 시작되었다.
중년에 다다라가는 30대 후반의 네 남녀가 펼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
뭐라고 했었더라.
그래.
기존 드라마에서는 잘 비추지 않거나 조명하더라도 잠시 스쳐 지나갔을 뿐인.
‘어른의 연애’를 다룬다는 기획의도.
그래서 기대된다.
도윤은 지금 20대지만.
2년 전만 해도, 30대를 살다 온 몸이었으니까.
‘뭐, 연애를 했어야 말이지.’
사실 회귀 전, 사건이 터진 뒤에는 알아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연애는 엄두도 못 냈다.
다가오는 사람이 있으면 괜히 자신 때문에 구설수에 휘말리거나 같이 있는 사진이 찍혀 공격이라도 당할까 밀어내기 일쑤였었지.
그래서일까.
[우리, 진짜 이렇게 사는 거 맞아?]
시작부터 수철이 맡은 ‘영원’이 내뱉는 대사에.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린다.
[왜?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데? 당신이 말해 봐. 애 학교 데려다주면 지쳐 있지. 집안일 하다 보면 벌써 저녁 차려야 하지. 그런데 당신은 맨날 술에 취해 들어오고 주말이면 소파에 늘어져 있고. 이게 사는 거야? 말 나온 김에 당신이 말해봐.]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하고 돌아다녀? 접대잖아. 내 가족 먹여 살리겠다고 열심히 뛰는 거잖아! 근데 당신은 뭐야? 주말만 되면 왜 나 쉬는 꼴을 못 봐? 당신만 힘들어? 나도 힘들어!]
그리고.
흔하디흔한 한국 가정의 풍경을 그리는 두 배우의 열연에.
어느새 수철과 도윤 외 다른 손님과, 서빙하던 사장까지도 <여기까지일까>에 빠져든다.
심지어 소주잔을 연신 들이켜던 양복 차림의 30대 직장인 두 명은.
뭔가 충격이라도 받은 건지 잔을 채운 소주잔을 내려놓은 채 드라마에 집중했다.
[당신이 가족 생각한 적은 있기나 했어? 월급 가져다주면 끝이야? 나는? 당신이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생각하던 나는? 우리 애는 어쩌고? 아빠만 보면 어색해해. 나는 어떻고? 병원 갔더니 손목 인대가 늘어났대. 왜 이제 왔냐고 하잖아!]
[당신…… 정말 이기적인 거 알아? 내가 원해서 이렇게 하는 거야? 아니잖아. 각자 할 일을 하는 건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그러는 당신은, 술 취해 들어와서 해장국 끓이라고 난리 친 거 기억 안 나? 그때만 생각하면……]
누구의 잘못이라 말할 수 없는.
그래서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대화.
답답함이 가슴 한구석에서 차오르지만.
도저히.
시선을 뗄 수 없다.
특히.
수철은 더더욱.
자신이 연기했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의 연기가 맛깔나게 편집되어 영상으로 흘러나오고 있어서도 아니다.
저 대사는.
실제로 자신이 했었던 말이기 때문이다.
‘힘든…… 시절이었었지.’
어린 딸.
자신을 뒷바라지하는 아내.
그들과 겪었던 한동안의 갈등.
이엔 엔터를 막 설립한 뒤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던 과거.
그러다.
다시 배우로 서게 되고.
지금.
이렇게 자신의 연기를 바라보고 있다.
마치.
거울처럼.
그래서인지…….
‘너무 좋은데.’
바라보던 도윤은.
도저히 흠잡을 곳을 찾지 못했고.
동시에 확신할 수 있었다.
더 이상.
수철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