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이름이…….
만찬에는.
도윤도 난생처음 보는 음식과 술이 한가득이었다.
그렇다고 뷔페에 온 것처럼 마냥 산더미처럼 쌓아 먹기에는 자리가 자리라 조금 힘들다.
하지만.
맛을 느끼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고위급 관계자들 소수만이 자리해 분위기가 난잡하지도 않았고, NJN 쪽에서는 시종일관 도윤을 편하게 해주려 애를 썼다.
만약 회귀 직후의 도윤이었다면.
그런 NJN 측의 노력이 무색하게 안색이 내내 굳어 있었을 테지만.
회귀 후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도윤은 이런 자리에서도 결코 불편함을 드러내지 않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여유가 생겼다고 해야 할까.
허세와는 다른 그 모습에.
“도윤 상은 남다르군요. 기품이 있습니다.”
“식사 예법도 확실히 아시는 것 같은데.”
물론.
경후와 타쿠 덕분에 철저한 준비를 한 덕이었지만 말이다.
어느 자리든 마찬가지지만 이런 자리에서 굳이 실수할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여하튼.
도윤은 NJN 고위 관계자들에게 ‘최도윤’이라는 한 인간에 대해 상당히 좋은 인상을 남긴 모양이다.
왜냐하면.
“도윤 상. 원래는 좀 더 돌아가서 검토해 본 뒤에 부탁을 드리려 했습니다만…… 저는 결심했습니다. 저희 계열사 중 하나인 NPJ 주얼의 전속 모델이 되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지금, NJ 그룹의 유명 패션브랜드 NPJ의 전속모델이 되어 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니까.
“아, 절대 당장 결정해 달라는 건 아닙니다. 오늘 만찬이 끝난 뒤 돌아가셔서 충분히 심사숙고하신 뒤 답변을 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갑작스레 제안을 드려 죄송합니다.”
속으로 당황하고 있던 도윤이지만.
이내 곧바로 답한다.
“아닙니다, 이런 제안을 주셔서 영광입니다. 꼭 좋은 대답 드릴 수 있도록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지켜보던 타쿠는 생각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니 어떤 이유가 있을까 고민해 봤지만.
결론은 하나밖에 내릴 수 없었다.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의 마음에.
도윤이 쏙 들었다는 것.
그렇지 않고서야.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넘쳐날 자리를 굳이 한국에서 온 배우에게 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뭐, 좀 더 깊이 들어가면 현재 도윤의 인기가 NPJ의 상품 판매에 큰 도움이 되리라는 전략적인 판단 같은 것들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도윤이 지금 이 프라임 호텔의 라운지에서 엄청난 제안을 받았다는 사실이겠지.
“자, 그럼 한잔할까요?”
그렇게 만찬장에 모인 사람들의 축배 속.
도윤은.
또 한 번, 도약하고 있었다.
* * *
폭발적인 반응이다.
<12년이 지나도 너를>.
현재 일본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 중인 멜로 드라마.
그 드라마에.
NJN에서 방영되어 엄청난 인기를 얻더니 다른 방송사에서도 수입해간 한국 드라마의 주연 배우로 출연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무려.
5%의 시청률이 오르는 기적이 일어났고.
도윤을 일본에 초청해 특별출연시키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NJN 마케팅 담당자들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비록 거액의 출연료가 지출되었지만.
NJN이 이번 건으로 얻은 이득은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시청률이 오른 것뿐만 아니라.
반응마저 좋았다.
각종 SNS에 도윤의 이름이 쉴 새 없이 오르내렸고.
팬들은 도윤의 특별출연을 추가적을 요구하느라 아우성이다.
그뿐인가.
기사도 우후죽순처럼 쏟아졌다.
[한국 배우, 일본 본토 정벌 나서나?]
[‘용사마’의 전설, 다시 재현?!]
[최도윤, 일본 드라마 휩쓸었다!]
[특별출연, 이렇게나 대단한 일이었나?]
일본 내에서도 엄청난 화제가 되고 있고.
당연히.
한국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일본이나 한국이나 자국 배우가 해외에 나가서 인기를 끌면 ‘국위선양’에 초점을 맞춰 신이 나 기사를 써대는 판이니.
그야말로 도윤은-
일본에 고작 2주 정도 있던 것으로 한일 양국을 뜨겁게 달군 셈.
물론.
도윤 외 다른 배우들도 있었다.
유나라든가.
승원이라든가.
태규라든가.
그들도 드라마가 인기를 끌며 나름대로 팬층이 있었고, 일본에서 나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사실상 두 개 드라마를 이끌고.
일본에 한국 배우들 다수를 초청시키게 만든 주연 배우, 도윤만큼은 아니었다.
여하튼.
한국에서는 오랜만의 배우 일본 진출 때문에.
일본에서는 그간의 일본 배우들과 다른 분위기, 다른 연기를 펼치는 타국의 배우 때문에.
수많은 이슈들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도윤은 이런 상황에서.
성공적인 첫발을 뗀 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주 동안 도윤이 일본에서 벌어들인 금액은 무려 백억이 넘어갔다.
출연료부터.
광고 모델까지.
몇몇 광고.
특히, NPJ의 경우 판매량에 따라 개런티를 지급받기로 한 상황이라.
수입은 더더욱 늘어날 것이다.
더군다나.
드라마 촬영 건에 대한 소문이 관계자들에게 퍼지며, 도윤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이미 한국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도.
지금 이엔 엔터로 쉬지 않고 날아드는 메일과 전화가 바로 그 증거.
“죄송합니다, 저희 이엔 엔터의 최도윤 배우는 당분간 일본 활동 계획이 없습니다. 추가적으로 일정이 확정되면 그때 안내를…….”
덕분에 이엔 엔터에 얼마 전 채용된 일본어 능력자들이 고생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좋은 일이다.
일본 쪽 관계자들은 한동안 도윤을 데려올 수 없다는 생각에 울상을 짓고 있었지만 말이다.
이런 한편.
도윤의 사례를 본 몇몇 엔터들은.
소속 배우들을 일본에 진출시킬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불과 2주 있던 것 정도로 엄청난 돈을 벌어온 데다.
이후의 지속적인 활동까지 보장된 것을 보고 군침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도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보기엔 너무 아쉽지 않은가.
덕분에 아이돌 위주로 진출이 이뤄지던 일본 시장에 서서히 한국 배우들의 진출 타진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뭐.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런 가운데.
한국에 돌아온 도윤은.
“……네가 대표 해라. 아니다, 상장하면 회장 할래?”
“마음에도 없는 말 하시긴.”
“진심이야. 야, 도대체 넌…….”
동민의 나름 진심 가득한 환대 속.
적당히 경후에게 공을 돌렸다.
“박 실장님 덕분이죠, 뭐. 준비 철저하게 준비해 가서 문제없이 잘 돌고 왔습니다.”
확실히.
일부는 사실이다.
경후의 철저한 분석을 기반으로 한 프레젠테이션이 없었다면 도윤이 일본에서 가는 곳마다 찬사를 이끌어낼 수 있었을까?
단순히 대중들에게 보이는 모습뿐만 아니라.
내부 관계자들에게도 훌륭한 평을 얻고 돌아온 것.
도윤은 사실 후자가 더 큰 수확이라 생각했다.
일본에 고작 한 번 다녀오진 않을 테니까.
“그러니까 잘 챙겨주세요.”
“내가 무슨 악덕 사장이냐? 그런 것도 안 해줄까 봐?”
동민의 핀잔에 도윤은 피식거렸고.
“아, 그리고 두칠 씨는 바로 돌아갔습니다.”
“응? 벌써? 식사라도 한 끼 하려고 했는데.”
“일이 바빠서요. 제가 따로 좀 챙겨주긴 했는데, 회사에서도 뭐 챙겨줘야 할 것 같네요. 두칠 씨 덕도 엄청 봤거든요.”
“그래? 도윤이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흔쾌한 수락.
도윤은 곧 송금 알림 문자를 받아보고 함박웃음을 지을 두칠을 떠올렸다.
“아무튼, 별일 없으셨죠?”
“매일 아침 뉴스에 독도 나오나 그것만 봤다.”
“하여튼.”
“야, 인마. 니가 내 입장 돼 봐. 너도 아침마다 분명히 그랬을걸?”
하기야.
워낙 민감한 문제니.
“고마워요.”
“됐다. 엎드려 절 받기지. 아무튼 쉬어라. 이따 저녁에 술이나 한잔하든가.”
“내일 먹어요. 오늘 갈 곳이 있어서.”
“갈 곳? 오자마자?”
“네, 수철 선배 촬영장이요.”
동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수철이 그놈은 나중에 갚을 거 많겠다.”
그리고 도윤은.
정말로 곧장 수철의 촬영장으로 향했다.
‘좋은데.’
멀지 않은 곳에서 수철의 연기를 지켜보던 도윤은.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다가온 수철을 보며 박수를 쳤다.
“연기 좋은데요.”
“넌 안 쉬냐?”
“일본 다녀온 거라 시차 핑계 대기도 좀 그래서요.”
“됐다. 너한테 쉬라고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아무튼 뭐, 연기 좋다니 다행이네.”
강선의 소개로 양호섭 PD의 드라마, <여기까지일까>에 주연 4인방 중 한 명으로 합류한 수철.
“이럴 줄 알았지. 그러니까 앞으로 엄살 부리지 마세요.”
“이게 엄살로 보이냐? 진짜 죽겠다니까.”
수철이 아무리 말해도.
도윤의 눈에는 엄살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아까 구경한 촬영에서 수철이 선보인 연기는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일명.
짬에서 우러나오는 바이브라고 해야 할까.
“근데 일본에 더 있지, 왜 벌써 왔냐. 커피차는 또 뭐고.”
“오래 있을 거 있나요. 적당히 있다가 오면 되는 거지. 그리고 커피차야 뭐, 부담 갖지 마세요.”
“부담 가지라는 것처럼 들리는데.”
“정 그러시면 나중에 성공하고 크게 갚으시든가요.”
“오냐. 꼭 그러마.”
수철이 씩 웃으며 도윤의 어깨를 치던 그때.
“최도윤 배우. 촬영장 구경은 좀 어때요?”
“아, 양호섭 PD님.”
도윤은 방금 막 다가온 양호섭을 보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다른 PD님들께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대부분 욕이었을 텐데, 이거 민망하네.”
“아뇨, 나중에 꼭 한번 작품 같이하면 좋을 거라고 말씀들 하시던데요.”
“그 양반들, 마음에도 없는 금칠은. 아유, 그래서 같이했으면 또 달랐을 텐데. 그치?”
도윤은 아쉬워하는 양호섭의 모습에 웃음만 지었다.
“그래도 뭐, 이런 좋은 배우 소개받았으니까 된 건가?”
“어유, 과찬입니다.”
수철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지만.
“봐봐. 맨날 본인만 모른다니까요? 드라마 나오면 깜짝 놀랄걸. <사이버 러버> 나왔던 그 배우 맞냐고.”
금기어를 입에 담는 양호섭이었지만.
수철의 기분은 좋아 보인다.
도윤은 수철이 비로소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참, 근데 이거 나랑 같이하자고 묻는 게 아니고…… 다른 거 때문에 물어보는 건데 혹시 다음 작품은 언제 들어가요?”
“아, 그게 아직 정한 작품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양호섭은 잠시 고민하다 도윤을 향해 말을 이었다.
“실은, 서원섭 PD가 사극 준비하고 있다고 들어서.”
“사극이요?”
도윤은 서원섭라는 말에 한 번.
사극이라는 말에 한 번 놀랐다.
서원섭 PD.
트렌디한 드라마를 만들기로 유명한 사람이 사극을?
“음, 네. 뭐 사극이긴 한데 본인 말에 따르면 대하드라마나 무슨 묵직한 사극이 아니라 판타지 사극이라던데…… 통 말해주질 않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 아무튼 주연 때문에 고심하고 있나 봐요. 알 사람은 곧 다 알겠지만, 거기 주연으로 캐스팅하려던 배우가 얼마 전에 음주운전했잖아.”
아.
도윤은 일본으로 돌아와서 경후가 스치듯 한 말을 떠올렸다.
그게 이거였다니.
“그래서 혹시 서 PD 쪽 작품 관심 있으면 한번 연락이나 해보시라고. 그쪽도 최도윤 배우가 한다고 하면 바로 달려올 테니까.”
도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한번 고민해 보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사극이라.
분명 또 한 번 어려운 도전이 될 테지만.
그래서인지.
구미가 당기기 시작한다.
“아 그리고. 거기 작가가 도윤 씨 아는 모양이던데?”
“저를요?”
“응. 예전에 같이 작품했었다고. 이름이…… 전아름이었나?”
아.
도윤은 그제야.
<알고 있는가>의 대본을 집필했던.
아름의 이름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