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11화 (111/200)

111.내 선물 어때?

타쿠는 흥분하고.

도윤은 고민했다.

그리고 PD는 간절했다.

“도윤 상, 출연료 문제는 제가 책임지고 반드시 해결하겠습니다. 여기서 바로 각서를 쓰겠습니다. 녹음도 하시죠! 딱 다섯 씬만 더 나와 주신다면 제가 뭐든 하겠습니다!”

PD는 이 바닥에서 오래 구른 사람답게.

대강의 미래를 예측했다.

지금 이 도윤의 연기가 담긴 화가 방영되는 순간.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날 거라고.

그 뒤로는 불 보듯 뻔하다.

안 그래도 인기인 드라마의 인기는 더욱 상승할 테고.

도윤에 대한 팬들의 갈망도 커질 것이다.

어쩌면-

특별출연 수준을 넘어 한두 회차에서 아주 비중 있는 역할로 나올지도 모른다.

작가와 말도 잘 맞췄다.

작가는 오히려 환영했다.

슬슬 두 사람의 로맨스만 그리기엔 애매한 상황에서, ‘타츠야’라는 인물이 등장해 긴장감을 불어넣는 효과도 있었던 것.

그렇기에.

PD는 간절했다.

“도윤 상, 딱 그 씬들만 찍고 보내기엔 너무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도윤은 고심했다.

계약상 아홉 개 씬까지지만.

사실.

좀 더 해보고 싶었다.

평소에 쓰는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연기하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나.

그래서 오히려 마치고 나면 뿌듯함이 솟지 않겠나 싶었다.

또.

배우가 드라마에 더 많은 씬에서 나온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고 말이다.

“그러시죠.”

그렇기에 도윤은 흔쾌히 수락했다.

옆에 있던 타쿠는 조금 당황했으나.

도윤의 결정을 존중하는 한편.

곧바로 스케줄 조정에 들어갔다.

하지만.

“조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피곤하지 않으시겠어요?”

“다른 한쪽 일 늘리자고 다른 약속을 깨선 안 되는 거죠.”

타쿠는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이런 인성의 배우가 있었다니.

“피곤한 건 제가 조절할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무, 물론입니다.”

그리고 도윤의 촬영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타츠야’와 ‘아이카’가 처음 재회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히로시’의 모습이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이번엔.

회사에서 마주친 세 남녀가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타츠야라고 합니다.”

“히로시입니다. 혹시, 아이카랑 아는 사이입니까?”

“네. 5년 전에 만났었죠. 대학 야구부에서. 아이카가 매니저였습니다.”

“아, 그럼 지금도 야구를 하시나요?”

“그럼요. 혹시 이 회사에 야구 동호회가 있다면 아이카에게 매니저를 부탁해 볼 생각입니다.”

“아이카는…… 많이 바쁠 텐데요.”

“아, 그런가요? 저기 오니 직접 물어보죠.”

두 남자의 기싸움.

이 모습을 본 ‘아이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한편.

‘히로시’의 마음도 모른 채 ‘타츠야’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선배! 난 거짓말인 줄 알았어요!”

“‘야스다 자동차’에 입사한 걸 누가 거짓말로 말해?”

둘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히로시’는 묘한 눈으로 ‘타츠야’를 바라본다.

“아, 히로시 선배. 여기는 저랑…….”

“들었어. 대학 때 야구부 매니저였다고?”

“네!”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냥 해맑게 대답하는 ‘아이카’의 모습에.

남몰래 ‘아이카’를 좋아하던 ‘히로시’의 마음이 무너진다.

“오케이. 좋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PD의 만족스러운 외침이 들려왔고.

이어서 다음 씬.

그다음 씬도 완벽한 촬영을 이어가는 도윤.

“대단한데.”

PD는 감탄을 거듭했다.

촬영 영상을 아무리 돌려봐도.

흠잡을 데가 전혀 없다.

마치.

원래 출연하며 꾸준히 호흡을 맞춰온 것처럼 말이다.

여하튼.

당일 촬영에 이어.

그다음 날.

도윤은 마지막 씬에서도 완벽한 연기를 선보였다.

“선배…… 정말 가야 해요?”

“미안. 나도 이 기회, 놓치기 힘들 것 같다.”

본사에 오자마자.

엄청난 성과를 내어.

결국 해외 지사로 발령받게 된 ‘타츠야’.

‘아이카’는.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을 느끼고.

‘히로시’는.

기뻐해야 할지.

그래도 그간 멋있게 보였던 직장 동료가 떠난다는 사실에 슬퍼해야 할지 고민한다.

이런 가운데.

‘타츠야’는 슬쩍 ‘히로시’에게 다가오더니.

“아이카한테 잘해주라고. 엄한 놈한테 빼앗기기 싫으면.”

멋진 한마디를 남긴 채.

극에서 퇴장한다.

그것으로 PD의 흥분 가득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고.

마침내 특별 출연분 촬영을 모두 마무리한 도윤을 향해 박수가 쏟아진다.

“훌륭했습니다, 도윤 상.”

NG가 중간중간 두어 번 정도 있었지만.

외국 배우라는 점에서 솔직히 NG가 있다고 하기도 민망한 데다.

그 두 번의 NG마저 사실 ‘사쿠라’가 도윤의 연기를 넋 놓고 바라보다 생긴 일.

쉽게 말해.

도윤은 첫 특별 출연에서 PD를 완벽히 만족시킨 셈이다.

‘혹시 일본에 눌러앉을 생각은 없으려나?’

때문에 PD는 몇 달 뒤에 끝나고 새롭게 시작할 드라마에 도윤을 주연으로 발탁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 촬영 내내 성실히 움직였고.

대사를 외우는 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연기까지 완벽하다.

이런 배우와의 인연을 고작 특별출연 정도로 끝내기엔 너무도 아쉽다.

그래서 PD는 조심스레 제안을 건넸지만.

“죄송합니다.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이 이상은 힘들 것 같습니다.”

역시나, 정중한 거절이 돌아왔다.

실망하진 않았다.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아쉬울 뿐.

“그렇군요. 도윤 상의 연기가 너무 좋아서 그만…… 제가 무리한 부탁을 한 모양입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부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일본에서 드라마 출연을 할 일이 있다면 가장 먼저 PD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정말이십니까?”

흔히 하는 빈말이라도.

하는 사람이 이런 배우라면 기분이 남다른 법.

PD는 환하게 웃었고.

도윤은 그런 그와 악수하며 <12년이 지나도 너를>의 촬영을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저…… 괜찮으면 ‘링크’ 아이디 물어봐도 될까요?”

이틀 호흡을 맞춘 배우 사쿠라의 수줍은 부탁도 받았다.

“그럼요.”

한국에 ‘위톡’이 있다면.

일본엔 ‘링크’가 있다.

도윤은 당연히 일본에 오면서 ‘링크’ 아이디를 만든 후였고.

사쿠라에게 아이디를 알려주며 메시지를 교환했다.

“저 한국에 놀러 가면 연락해도 될까요?”

“그럼요. 그때 제가 시간이 괜찮으면요.”

그리고 도윤은.

‘히로시’ 역의 야스다와도 링크 아이디를 교환했다.

“도윤 상, 함께 연기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사쿠라와 달리.

약간 오글거리는 걸 좋아하는 듯했지만.

뭐, 전체적으로 사람들이 그런 걸 딱히 거리끼는 느낌은 아닌지라.

도윤도 슬슬 이 느낌에 적응해 가고 있다.

여하튼 뭐.

드라마 촬영은 끝났고.

이제.

반응을 기다릴 시간이다.

* * *

사흘 정도 지난 뒤.

도윤은 다시 스케줄을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만찬 자리에 도착하셔서, 3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시고 숙소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오늘은 NJN 관계자들과 만찬이 있는 날.

NJN 드라마에 특별출연을 한 만큼.

NJN 측에서 도윤을 꼭 한번 대접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도쿄의 저녁은 엄청나게 막히죠. 한숨 자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타쿠의 말에.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참석하는 사람들 명단 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까 보셨는데, 또요?”

“네, 뭐. 잠이야 숙소 가서 자면 되는 거니까요.”

타쿠는 또 한 번 감동받았다.

물론 NJN이 타쿠가 소속된 회사라지만.

참석자 명단을 미리 보고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려고 노력을 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런 한편.

‘이름들이 어렵단 말이지.’

타쿠가 도윤을 배려해 한자, 일본어, 한국어로 병기한 명단에도 도윤은 이름을 외우느라 씨름하고 있었다.

확실히.

대사를 치는 것과 일본어를 한다는 건 다른 문제.

그러나 도윤답게, 이름들이 하나둘 빠르게 눈에 익어갔고.

옆에 있던 두칠도 도움을 주었다.

“이건 이렇게 읽는 겁니다. 아, 이 한자는 ‘빛’이라는 뜻이니까 이름의 뜻이 아주 좋다고 말하면 상대 쪽에서 굉장히 좋아할 겁니다.”

“아, 그렇겠네. 고마워.”

“별말씀을. 그리고 이 이름은…….”

두칠은 마치 현지인처럼 각 이름에 담긴 뜻들을 풀이해 주고.

도윤은 타쿠가 넘겨준 명단 옆에 열심히 메모하며 만찬 자리에 참석할 준비를 마쳐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예? 그게 무슨…… 장소가 변경됐다고요? 너무 갑작스럽지 않습니까? 예? 프라임 호텔 라운지요? 예.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배우분은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타쿠는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받더니 다소 난처한 기색을 표하다 ‘프라임 호텔’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였다.

그리곤 전화를 끊자마자.

“도윤 상, 아무래도 장소가 업그레이드된 것 같습니다.”

“자세히 말씀해 보세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도쿄에서도 최상급 호텔 라운지로 만찬 장소가 변경되었습니다. 그쪽으로 방향을 바꾸겠습니다.”

장소 변경.

시각이 변경된 건 아니니 큰일은 아니지만.

갑자기 무슨 일일까.

“프라임 호텔이면 엄청나게 화려한 곳인데, 갑자기 업그레이드라면 무슨 일일까요.”

“글쎄.”

아직 드라마 반응도 안 나온 상황.

그리고 이전 만찬 장소도 프라임 호텔 라운지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좋은 곳으로 알고 있었는데.

“가보면 알겠지.”

도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이 눈앞에 있는 명단들을 머릿속에 넣기 위해 안간힘을 쓸 뿐.

그렇게 타쿠가 운전하고, 도윤과 두칠, 성호와 민주가 탄 도요타 센추리 리무진이 도쿄 시내를 달렸고.

마침내, 한눈에 봐도 호화로움이 가득한 프라임호텔 앞에 차가 멈춰 섰다.

“다 왔습니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도윤을 향해 엄청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장소가 바뀐 건 또 어떻게 알았는지.

로비로 향하는 길 양쪽에 기자들이 가득하다.

“도윤 상! 한 말씀만 해주시죠!”

“드라마 특별출연 소감이 어떠십니까!”

기자들의 아우성과.

NJN 측에서 미리 준비시킨 듯한 경호원들이 그들을 제지하려 안간힘을 쓰는 가운데.

두칠은 이번에도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어어!”

완벽한 타이밍에 불쑥 나타나 도윤에게 다가가려던 기자 한 명을.

재빠르게 차단해버렸다.

“와우.”

성호는 놀랐고.

민주는 무덤덤하게 앞으로 걸어갔으며.

도윤은 덕분에 무사히 호텔 로비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리고 곧장 VIP 전용 엘리베이터로 안내되어, 드디어 귀를 좀 쉬게 해줄 수 있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기자들은 언제나 시끄럽죠.”

타쿠의 말에 도윤은 웃음만 지었다.

뭐.

스타의 숙명이라면 숙명이다.

기자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해야 할까.

물론.

한국 기자들은 촬영장과 회사, 집만 오가는 도윤의 지루한 사생활에 지친 나머지 다수가 포기한 상태였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프라임 호텔 라운지라니. 여기는 정말…… 쉽지 않은 곳인데요.”

“무슨 이유가 있나요?”

“솔직히 라운지 전체를 대관하는 건 저희 NJN도 거의 불가능할 겁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프라임 호텔 측에서 까다로운 기준을 세웠거든요.”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도윤은 타쿠에게 물었다.

“그럼 이번 건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원래도 대관이 힘든 라운지를.

어떻게 예약했을까?

의문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도윤은 마침내 최상층 라운지에 도착했고.

문이 열린 뒤 처음으로 마주한 사람에게.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도윤 상. NJ 그룹의 회장 기무라 타다요시라고 합니다.”

“최도윤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악수를 나누고, 서로를 향해 웃어 보인 둘.

“청진그룹의 주안나 상께서는 잘 계시지요?”

“네?”

“하하. 청진그룹의 회장님과 제가 막역한 사이입니다. 그리고 거기 회장님과 여기 프라임호텔의 운영 그룹의 회장님이…….”

쉽게 말해.

주안나의 도움으로.

장소가 변경되었고.

덕분에 도윤은 기존 호텔 라운지가 아니라 도쿄에서도 가장 좋은 호텔 라운지에서 만찬을 가질 수 있게 된 셈.

‘허.’

새삼 도윤이 인맥의 힘을 느끼는 사이.

지이이잉.

지금 성호의 품에 있는 도윤의 개인 휴대폰엔 주안나의 톡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내 선물 어때?]

그리고 도윤은 지금 막.

그때 주안나가 말했던.

‘선물’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래서.

‘도대체 뭘 사 가야 하지.’

난데없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이 선물에 걸맞은 답례를.

뭘로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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