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10화 (110/200)

110.어떻게든!

사람마다 인식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경험에 따라.

이 바닥에서 오래도록 일한 사람들은 배우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어차피 나랑은 다른 세상에 사는 존재니 그냥 내 할 일만 하자는 주의고.

또 어떤 사람은.

일반적인 팬처럼 선망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방금.

도윤에게 인사를 받은 스태프가 그랬다.

리에는 현장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스태프였고.

<알고 있는가>와 도윤의 엄청난 팬이었다.

그래서 오늘 도윤이 온다는 말에 사진이라도 한번 찍을 수 있을까 싶어 굉장히 기대했는데.

오늘 전 스태프들을 불러모아 놓고 PD가 ‘절대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고 말한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것.

그런데.

지금 이렇게.

배우가 인사를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아, 그, 저는…….”

리에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거렸고.

도윤은 그 모습에 싱긋 웃으며 슬쩍 물었다.

“사인 한 장 해드릴까요?”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리에는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눈치 빠른 타쿠가 다가와 미리 준비해 온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도윤은 그걸 반갑게 받아들었고.

“빨리 말 안 해주시면 다른 사람한테 갈 거예요.”

리에에게 엄포를 놓았다.

리에는 그제야 다급히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고.

수줍게 한마디 덧붙였다.

“한글로…… 써주세요.”

한편.

이런 모습을 바라보던 다른 스태프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고.

PD는 당황하고 있었다.

“혹시 둘이 아는 사이인가?”

“그, 그렇진 않아 보이는데…….”

“근데 왜 저기 가서 저러고 있는 건데?”

이미지의 힘은.

때론 이런 오해를 부르기도 한다.

<알고 있는가>.

<그 남자의 메모리>.

이 두 개 드라마에서 차갑고 까칠한 연기를 한 도윤이었고.

일본에서 본 한국에서의 도윤은 공식 석상에서 그리 말이 많지 않은 타입이기에-

이런 오해를 부른 셈이다.

설마하니.

‘톱스타’ 최도윤이.

먼저 다가가 저렇게 사인을 해줄 줄이야.

저게 설령-

이미지 메이킹이라 한들.

상관없다.

“아. 참, 오늘 촬영장에 기자…… 벌써 찍고 있군.”

PD는 오늘 최도윤이 온다는 소식에 자신을 조르고 졸라 촬영장 견학 약속을 받아낸 기자 한 명을 떠올렸고.

그 기자가 방금 막 도착해 도윤을 보자마자 셔터를 누르는 광경을 목격했다.

PD는 결정했다.

“이렇게 가자고. 스태프들한테 전해. 그냥 가서 사인 막 받으라고. 대신, 도윤 상 피곤해 보이면 바로 알지?”

“물론입니다.”

이 상황을.

제대로 써먹기로.

안 그래도 도윤이 특별출연한다는 보도자료를 쫙 뿌린 드라마, <12년이 지나도 널>.

원래도 인기 있던 드라마에 도윤까지 합류했는데.

여기에 미담까지 더해진다면…….

‘아주 완벽하지 않을까?’

PD는 무릇 시청률을 우선해야 한다.

이 바닥은 시청률로 말하는 곳이니까.

여하튼 뭐.

“자자, 줄 서세요!”

이미 스태프들을 통제하고 줄을 세워 즉석 팬사인회가 된 현장을 보고 있자니.

아주 느낌이 좋다.

“형은 여기 와서도 저러네. 안 피곤하신가.”

“그 말 이제 안 할 때 안 됐니?”

“걱정되니까 그렇죠.”

성호는 민주의 핀잔에 입술을 비죽거렸다.

도윤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긴 해도.

종종 걱정된다.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닐지.

사람의 몸은 기계가 아니고.

기계조차 노후화되면 망가지기 마련인데.

“정 걱정되면 오빠 제일 좋아하는 거나 사다 드려.”

“그게 무슨…… 아!”

성호는 도윤이 일본에 온 직후부터 내내 입에 달고 살았던 음료수를 떠올렸다.

아마 녹차였던 것 같은데.

“저 다녀올게요!”

민주는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쏜살같이 뛰어가는 성호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거리는 한편.

“우에스기 겐신 피규어를 도대체 어떻게 구하라는 거야?”

전국시대 팬인 남자친구가 부탁한, 전국시대 명장의 피규어를 도대체 어떻게 구해야 할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 * *

촬영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스태프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사진을 찍어줘서가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인을 해주고 있는 도윤을 찍고 있는 카메라가 많아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모두 오늘 특별출연을 하러 온 도윤을 인터뷰하기 위해 온 기자들.

때문에 도윤은 촬영 시작 전.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느라 상당한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하지만.

도윤은 어느 순간 선을 그었다.

“죄송합니다.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네?”

“지금 절 기다리는 분들이 너무 많아서요. 더 이상 폐를 끼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스태프들에게 사인을 해준 건.

도윤이 그만큼 촬영장에 일찍 도착했기에 가능했던 일.

하지만 예정에 없던 이런 수많은 기자들과의 인터뷰로 시간을 잡아먹는 건 더 이상 사양이다.

“저기…….”

도윤은 뭐라 말하려던 기자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몸을 돌려 곧장 PD에게 다가갔다.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 도윤 상.”

“저 때문에 더 이상 지체되면 다른 배우들에게도 피해가 가니, 이제 시작하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조, 좋습니다. 그럼, 바로 가죠.”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고.

가까운 곳에서 PD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기다리던 배우들은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특히.

오늘 도윤과 진지한 연기를 펼칠 <12년이 지나도 너를>의 여주인공, 미야자키 사쿠라는 도윤을 조금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소문이 퍼지기론-

한국에서도 함부로 건드리는 사람이 없다는 ‘톱스타’라던데.

그래서 조금 까칠하고 차가운 인상일 줄 알아 긴장했건만, 막상 보니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오히려 예의도 바르고.

깍듯하며.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았다.

그리고 아직 미숙하지만 의사 표현은 확실한 일본어까지.

여러모로.

호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궁금했다.

과연 어떤 연기를 펼칠까?

“자, 그럼 곧 스탠바이 들어가겠습니다. 준비해 주세요!”

그사이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두 사람이 대본을 살피는 사이.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둘은 카메라 앞에서 마주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기대감이 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가운데.

“좋은데.”

이어지는 리허설에 PD는 상당히 놀랍다는 반응이다.

양쪽 다 가볍게 대사를 치는데.

카메라만 안 돌아갔지.

저걸 그대로 써도 문제가 없을 정도.

특히, 도윤의 눈빛 자체가 달랐다.

“상당한 수준인데요.”

타쿠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선 두칠이 맞장구쳤다.

“최고죠. 제가 아는 배우 중에서는.”

“그렇군요. 역시. 근데 두칠 상, 궁금한 게 있습니다. 두칠 상한테 말이죠.”

“저한테요?”

“네. 혹시 일본에 산 적 있습니까?”

“예전에 살았었죠. 근데 그건 왜요?”

“아, 제가 두칠 상과 비슷한 한국인 이야기를 들어서요.”

두칠은 타쿠의 말에.

상당히 당황했다.

“흐음. 사실 제가 예전에 야쿠자들의 친선 도모회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한국인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뭐라더라, 야쿠자 다섯 명이 덤벼서 깨졌다던데…….”

“그, 그런 일이 있었나요?”

“네. 괜히 시비를 걸었다가 뼈도 못 추렸고 범인도 못 잡았다더군요. 그 야쿠자들이 알던 건…… 얼굴에 상처가 난 어떤 거구의 남자가 한국어 욕을 하면서…….”

두칠은 다급히 말을 돌렸다.

“저, 준비할 게 있어서 잠깐 좀.”

“아, 네. 다녀오세요.”

타쿠는.

멀어지는 두칠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런 한편.

“자,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PD의 큐사인 속.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었다.

도윤이 촬영하는 씬은 총 다섯 개.

지금은 도윤이 맡은 ‘타츠야’와 사쿠라가 맡은 ‘아이카’가 5년 만에 재회하는 씬이다.

그렇기에 PD는 사쿠라에겐 아련한 눈빛을.

도윤에게는 당황스러우면서도 반가운 눈빛을 주문했다.

‘타츠야’는 예정된 씬들 전체에 걸쳐 남주인공과 대립하고 극중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이니까.

그렇기에.

도윤은 시작부터 감정을 빠르게 끌어올리며.

스스로 ‘타츠야’ 속으로 몰입했고.

“오랜…… 만이다.”

당황스러움과 떨림.

놀라움과 반가움이.

제각기 뒤섞여 있으면서도.

네 가지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난 목소리가.

도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심지어.

아주 정확한 일본어로.

마치, 현지 배우가 연기하는 것처럼.

‘세상에…….’

PD는 짧은 찰나 무척이나 놀랐다.

준비를 철저하게 해 왔다고 듣긴 했다.

그리고 실제 촬영에 들어가기 전, 간단하게 대사를 맞춰보는 부분에서도 굉장한 수준이라 따로 지도할 필요가 없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촬영에 들어가니.

더욱 사람을 놀라게 만든다.

아무리 외워서 하는 대사라지만.

외국 배우가 저렇게 일본어 대사의 톤과 강세를 살려 연기하는 게.

어디 가능하기야 하단 말인가.

“선배…….”

“5년 만이지, 우리?”

“아마…… 그럴 거예요.”

그리고 ‘아이카’ 역의 사쿠라 역시.

이에 맞춰 아련한 눈빛으로 ‘타츠야’를 바라본다.

과연.

각광받는 배우답게.

상대의 연기에 맞춰 그대로 녹아들며.

정말 오랜만에 재회한 남녀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좋은데.”

PD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자들을 바라봤고.

기자들은 최대한 방해되지 않도록 조용히 셔터를 누르고, 송고할 기사의 타이틀을 열심히 궁리했다.

“그간 어떻게 지낸 거야?”

“그냥…… 졸업하고 이것저것 하고 지냈달까…… 선배는요?”

“나는 얼마 전에 도쿄 올라왔어. 이쪽에 취직했거든. 경력직으로 스카우트.”

“축하해요. 그럼 이제 도쿄에서 지내는 거네요?”

“그렇지. ‘야스다 자동차’에서 고맙게도 사택을 구해줘서.”

“야, 야스다 자동차요?”

그사이 씬은 이어지고.

‘사쿠라’는 ‘타츠야’의 대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거기 다녀요! 야스다 자동차!”

“정말?”

“네! 제가 어느 부서에서 일하냐면…….”

기막힌 우연으로.

두 사람은 서로가 같은 회사에 근무함을 알게 되고.

5년 동안 멀어져 있던 간격은.

급속도로 좁아진다.

“선배, 그럼 이제 우리 앞으로 회사에서 보겠네요?”

“회사가 넓긴 하지만…… 아이카가 근무하는 부서랑 같이 일할 일이 많으니까. 앞으로 잘 부탁해.”

“저도요. 참, 혹시 점심…… 드셨어요?”

“막 먹으러 가려던 참인데, 같이 먹을까?”

그리고.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의 즐거워 보이는 뒷모습을 카메라가 잡아주는 가운데.

“아이카……?”

<12년이 지나도 너를>의 남주인공, ‘히로시’는 손에 든 음료수 두 개를 잊은 채.

멍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본다.

그리고.

“오케이!”

PD의 외침 속, 도윤의 일본 드라마 첫 씬 촬영은 NG 하나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아주 훌륭합니다. 아주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사를 그렇게 완벽하게 숙지했을 줄은 몰랐는데.”

도윤이 아무리 일본어 공부를 했다지만-

간단한 의사소통만 가능할 뿐, 통역 겸 경호 겸 가이드로 나선 두칠이 없으면 아직 힘든 편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지금 이렇게 ‘완벽한 대사’를 구사할 줄이야.

‘배우는 배우라 이건가?’

실생활의 일본어는 아직 부족할지언정.

대본 속의 일본어는 배우답게 완벽히 숙지했고.

심지어 억양과 느낌조차 흠잡을 데가 없다니.

솔직히 그는 도윤이 그냥 대사라도 적당히 치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정 안 되면 한국에서 유학을 왔다거나, 그도 안 되면 그냥 어릴 때 한국에서 자란 일본인 정도로 적당히 설정하고 때우려 했다.

하지만.

저 연기를 보는 동안만큼은 누구도 도윤을 ‘한국인’이라 생각하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든다.

그래서 PD는 곧장 작가를 불렀다.

“이거, 대사 좀 늘리자고. 추가로 끼워 넣는 거, 가능하지?”

“에? 지금 씬이 아홉 개나 있는데요?”

“지금 시청률이 뻔히 보이는데 아홉 개로 만족할 거야? 배우는 내가 어떻게든 설득해 보고 예산도 타 볼 테니까, 늘려봐. 어떻게든!”

“아,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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