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일단 잡고 봐야지!
도윤은 자신을 초청한 방송사, NJN의 환대 속에서 먼저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도윤은 환호의 연속이 뭔지 깨달았다.
출입국 게이트부터 차에 오르고, 호텔 로비에 내려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까지 팬들의 함성과 환호가 끊이지 않았던 것.
“도윤 상을 팬들이 아주 좋아해 주는 것 같습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문이 닫히자 NJN 관계자가 건넨 말에 도윤은 웃으며 답했다.
“다 잘 준비해 주신 덕분이죠.”
“겸손함까지 갖추셨군요. 그리고 일본어가…… 상당한 것 같습니다.”
“다른 나라에 오는데 그 나라 언어는 어느 정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약간은 더듬거렸지만.
그래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의미.
덕분에 NJN 관계자이자 도윤이 일본에 있는 동안 전담 마크할 ‘야지마 타쿠’는 회사에 이 소식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외국인 연예인이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건, 프로그램 선택 폭도 넓어진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사실상 벙어리나 다름없이 통역사에 의존할 필요도 없고, 어쩌면 드라마 출연 후 상당한 양의 대사를 부여받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NJN에서 현재 드라마를 촬영하는 PD들이 도윤을 한 번만 출연시키면 안 되겠냐고 쉴 새 없이 전화를 해대는 상황.
“그리고…… 기자들에게도 한 방 먹였군요.”
타쿠는.
도윤이 기자들을 멍하게 만든 사실이 기쁜 모양이다.
하기야.
한국이나 일본이나.
엔터 관계자들이 기자 싫어하는 거야 어디 다르기야 하겠는가.
여기도 연예 쪽 기자들이 만만찮다고 들었으니까.
“소문이 곧 퍼질 테니, 앞으로는 더욱 교묘하게 질문하겠죠. 아마 한일관계에 대한 질문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야 저희 측에서 미리 차단하겠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도윤은 자신감을 드러냈다.
한국에서 기자들 상대하며 단 한 번도 논란을 일으킨 적 없고, 작은 꼬투리 하나 준 적 없던 도윤이다.
오히려 일찍 와서 기자들에게 미리 인사하고 웃는 낯으로 대해서 호감을 얻으면 얻었지, 밉보이진 않았던 것.
“그런데 도윤 상.”
“네.”
“혹시 같이 타신 분은…… 혹시 경호원 되십니까?”
아.
도윤은 그제야 고작 다섯 명밖에 안 탔는데 이 큰 엘리베이터가 꽉 차 보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유야 말할 것도 없이.
한 덩치 하는 성호와.
그 한 덩치 하는 성호보다 훨씬 큰 두칠 때문이었다.
“누굴 말씀하시는 거죠?”
“더 큰 분입니다.”
“아. 경호원 겸 통역사 겸 가이드입니다.”
“아하. 역시, 톱스타답군요. 대단한 인재들을 데려오셨습니다.”
그 말을 알아들은 두칠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고.
성호는 뭔가 좋은 말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으며.
민주는 별말 없이 앞을 바라봤다.
그러다 타쿠는 묘한 시선으로 두칠을 바라봤다.
“근데 어디서 많이 뵌 것 같은데…….”
“하하, 착각이겠죠.”
“아닙니다, 일본에서도 이런 분은 유니크한데…….”
그렇게 엘리베이터가 50층에 도착하고.
도윤은 커다란 스위트룸에 들어섰다.
성호가 입을 쩍 벌리고.
두칠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일 때.
“아, 요청 주신 여자 스타일리스트분 방은 따로 준비해드렸습니다.”
타쿠가 와서 슬며시 속삭였다.
도윤은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그럼, 좋은 휴식 되십시오. 1시간 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도윤의 손에 키를 쥐여 준 타쿠는 허리를 깊숙이 숙여 네 사람에게 인사한 뒤 방을 나섰고.
성호는 타쿠가 나서자마자 환호했다.
“우리 형 진짜 톱스타! 대박!”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러거나 말거나.
성호는 침대에 온몸을 던진 뒤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두칠은 고민하다 도윤에게 물었다.
“형님, 그래도 혼자 쉬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방도 많고, 거실도 두 개나 있고. 굳이 따로 쓸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그래도요. 편하게 지내시면 좋을 텐데.”
“외국이잖아. 혼자 있는 것보다 낫지. 민주는 어쩔 수 없다지만.”
도윤은 그러면서 민주에게 카드키 하나를 건네줬다.
“푹 쉬어. 남정네들 있는 곳에서 괜히 고생하지 말고.”
“저도 여기서 쉬어도 되는데.”
“됐어. 이참에 룸서비스나 잔뜩 시켜 먹어.”
“네, 그럴게요.”
늘 그렇듯.
두 번 거절은 안 하는 민주다.
‘그럼 이제 곧 일정이…….’
도윤의 스케줄은 빡빡하다.
약 2주가량 일본에 머무르며 소화해야 할 일정이 수십 가지에 이른다.
이게 전부 다 사전에 약속된 스케줄이라니.
그야말로, 드라마 인기가 어느 정도인지 체감되는 수준.
참고로 도윤 혼자만 있는 게 아니다.
유나도 며칠 뒤에 합류하고.
해영도 이틀 정도는 일본에 머무르기로 했다.
그리고 같이 주연을 한 승원은 물론, 일부 팬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강제진출’을 하게 된 종탁도 오기로 했다.
물론 메인은 도윤이지만.
그래도 같이 스케줄을 소화하면 외로울 일은 없을 듯하다.
거기다-
그야말로 완벽한 경호원도 있고 말이다.
NJN 측에서 경호원을 붙여주기로 약속하긴 했지만.
그래도 두칠만큼 믿음직한 사람은 없겠지.
“피곤할 텐데 다들 좀 자둬.”
“형이나 좀 쉬세요. 오자마자 기자들 상대하느라 얼굴 마비되겠던데.”
“그게 내가 할 일이니까. 그리고 너희들은 지금 할 일 없잖아? 좀 쉬어. 난 할 일이 좀 있어서.”
“아, 그 연기요?”
“어. 나 들어간다.”
도윤은 그렇게 말하곤.
방으로 쌩하니 들어가더니 문을 닫아버렸다.
그 모습에 두칠이 고개를 끄덕이며 성호에게 말했다.
“형님 좋은 분이야. 그치?”
“그쵸. 근데 이젠 좀 이기적으로 굴어도 될 텐데.”
“너희들 앞에서만 그러는 거 아닐까? 자기 사람은 엄청 챙기시는 것 같던데.”
두칠은.
도윤이 마음에 든다는 표정이다.
하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고생한 기억만 존재하는 이 일본이라는 나라에 굳이 따라오지도 않았겠지.
그렇기에.
민주는 일본까지 따라온 두칠이 사뭇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다.
* * *
첫 스케줄은 토크쇼였다.
일본의 유명 개그맨이 진행하는, 퀴즈를 맞추고 틀리면 가벼운 벌칙을 받으면서 자연스럽게 연예인의 토크쇼로 이어가는 프로그램.
도윤은 여기서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벌칙을 받고.
토크 타임에서는 외려 MC를 당황시켰다.
“최도윤 상. 한국에서는 인기가 대단하다고 들었는데, 일본에서도 그 인기를 이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노무라 상이 보기엔 어떠세요? 제가…… 일본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요?”
MC의 질문에 고민하고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쩔 줄 모르는 대신.
이렇게 역으로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연기 한번 보여주시죠! <그 남자의 메모리>에서 ‘이다한’이 보여준 사이코패스 연기, 어떻습니까?”
아무리 봐도 진지한 분위기가 나오기 힘든 스튜디오였지만, 연기를 해달라는 주문에 망설임 없이 일어나더니.
“연기를 하려면, 상대역이 필요하죠.”
“아, 그, 그렇군요! 그럼 누가…….”
“저분으로 하겠습니다.”
오늘 패널로 나온, 제작진의 요청을 받은 건지 집요하게 도윤을 물고 늘어지던 다른 개그맨 한 명을 지목하곤.
“여기, 앞에 그냥 서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스튜디오 중심으로 그 개그맨을 데려다 놓더니.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좌중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스튜디오라는 이유로 굳이 과한 연기를 보일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절제할 필요도 없다.
도윤은 자신을 찍고 있는 저 수많은 카메라들이 드라마 촬영 현장의 카메라라고 암시를 걸고.
곧장 눈빛을 바꾸며 눈앞의 개그맨에게 다가가 속삭이듯 물었다.
“어때, 찾아봤어?”
한국에서부터 준비한 일본어 대사를 내뱉으며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모두가 조용해지고.
도윤이 어떻게 나오든 상황을 웃기게 만들어보려 했던 개그맨은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는다.
“네, 네?”
“그렇잖아. 나한테 사람 죽이고, 시체도 유기했다고 하고, 뭐 이제 듣기로는 형사까지 칼로 찔렀다는데…….”
꿀꺽.
목울대가 움직이며.
간신히 넘어가는 마른침.
그리고.
“증거 있어?”
도윤의 싸늘한 음성이 귓가를 가르자.
개그맨은 정말 드라마 속 인물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때.
“이상입니다.”
도윤이 다시 웃으면서 한발 물러나 카메라 앞에 인사하자.
약 2초 후.
멍하니 있던 출연진과 패널들이 기다렸다는 듯 박수를 쏟아냈다.
가만히 있던 건.
방금까지 도윤의 연기에 순식간에 동화되어 압도당한 개그맨 한 명뿐이었다.
‘세상에.’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NJN 관계자, 타쿠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외국에서 온 연예인이 짓궂기로 소문난 일본 토크쇼에서 저렇게 당당하게 답하고 MC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것도 모자라.
‘배우’라는 자신의 가치를 이렇게 드러낼 줄이야.
심지어.
그야말로 완벽한 일본어 대사로 말이다.
얼마나 도윤이 철저히 준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으며.
그 덕분에.
도윤에 대한 타쿠의 호감은 그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중이다.
한국의 연예인이.
이렇게 일본까지 와서 대충 하다 가는 게 아니라 철저하게 준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기쁘고 기특할 수밖에.
이만하면.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전혀 문제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저 정도 퀄리티로 일본어 대사를 친다면 드라마 출연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대사는 외우는 거고,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하는 언어와는 분명히 다르지만-
저런 연기를 두고 누가 도윤을 ‘한국인’이라 생각할 수 있겠다는 말인가?
조금 부족한 발음이야 분위기와 눈빛, 좌중을 압도하는 아우라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으니까.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방금 기무라 상 표정 봤어요? 완전히 압도당했어요!”
이런 와중에 들려오는 MC의 감탄.
그리고 마찬가지로 도윤의 연기에 뭔가 느낀 PD도 이에 맞춰.
[띄워주는 방향으로 급선회]
프롬프터에 토크쇼 질문을 바꾸라는 문구를 띄워버렸다.
이만하면.
깔아놓은 판을 도윤이 가볍게 엎어버리고.
판을 스스로 새로 짠 거나 마찬가지.
“그럼 도윤 상은 앞으로 일본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싶습니까?”
“주신 사랑에 부끄럽지 않게 최대한 다양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국내에서의 활동도 즐거웠지만, 다른 문화를 지닌 팬들에게 즐거움을 드리는 방향으로…….”
그리고 이어지는 토크쇼에서는 한결 부드러운 질문과 한결 해소된 분위기가 드러났고.
도윤은 마음껏, 자신 있게 대답하며 출연진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야말로.
다른 나라 프로그램에 출연해서도 떠는 모습 하나 없이 완벽한 대답을 이어가는 배우.
이를 지켜보던 PD는 생각했다.
아마-
이 방송을 손꼽아 기다리는 팬들에겐 완벽한 토크쇼가 될 거라고.
그리고…….
“이봐. 이따 촬영 끝나면 가서 물어봐. 우리 프로그램 하나 더 출연할 생각 있냐고. 출연료는 확실하게 챙겨준…… 아니다, 내가 직접 가서 말할게. 그리고 장소 하나 잡아. 괜찮은 곳으로.”
“일정도 아직 안 물어봤는데요?”
“그게 지금 중요해? 저 정도면 일단 잡고 봐야지!”
PD는.
지금 도윤을 잡지 않으면.
앞으로도 쭉 잡지 못할 거라는 묘한 예감에 휩싸인 채.
촬영이 끝나는 대로 도윤을 찾아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