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05화 (105/200)

105.기다리는 자에게는

“그렇지.”

마침내 수철의 입에서 기다렸던 대사가 흘러나오자.

도윤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낮게 환호했다.

지켜보던 성호도.

“형님······.”

도윤을 따라 감격했다.

임시로나마 수철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그사이 성호는 수철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무서운 팀장에서.

아픔을 간직한 배우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

그래서 내내 떨고 있던 수철이 결국 마음을 잡고 대사를 치기 시작하자 이렇듯 감격할 수밖에.

더군다나.

‘오히려 좋은데.’

‘김석진’이 갈등 끝에 ‘주강훈’을 구하러 이곳에 왔다는 극중 사실을 고려할 때.

저런 망설임이 카메라에 잡힌 건 오히려 리얼리티를 높여줄 수 있는 요소 중 하나.

쉽게 말해.

망설임 끝에 친 대사가-

더욱 좋은 효과를 낸 것.

때문에 운이 좋다고 하기에는······.

‘너무 간절했지.’

그간 수철이 <협조> 합류를 결심하고 배우로 복귀하며 보여준 모습들은 하나같이 간절한 것들투성이였다.

그래서.

강선은 멈추지 않은 채 그대로 촬영을 지속시켰고.

마침내 ‘김석진’이 다섯 번째 상대를 쓰러뜨린 상황에서.

“컷! 오케이! 아주 좋습니다!”

우렁찬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그와 함께 수철은 무너지듯 털썩 주저앉았다.

성호가 다급히 달려가고.

혹시나 싶어 대기하던 다른 스태프들이 구급상자를 들고 뛰어들었지만.

수철은 부상을 입은 게 아니라.

그저 긴장감 때문에 탈진한 것뿐이었다.

“좋네요.”

그리고 유정은 이를 보며 한마디했다.

강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안 다쳤고, 촬영 잘 끝났고.”

“솔직히 실수 좀 해도 괜찮았을 텐데.”

“그렇지. 액션씬에서 NG 나는 게 뭐 대수라고.”

강선의 말마따나.

수철이 두려워한 나머지 상황을 무조건 잘 마쳐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껴서 그렇지-

실제로 액션씬만큼 NG가 많이 나는 촬영도 없다.

위험한 나머지 배우가 본능적으로 몸을 사려도 감독 입장에선 어쩔 수 없고.

단순히 제스처 정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거친 액션을 동반하며 상대와 호흡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기술을 거는 쪽과 접수하는 쪽의 합이 중요한 프로레슬링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프로레슬링과 난도를 비교하기엔 좀 그렇지만 말이다.

여하튼.

“괜찮아요?”

“어, 그, 그래.”

수철은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영 민망한지 얼른 일어나 성호의 부축도 거절하고 간신히 자리로 돌아왔고.

“후우.”

도윤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도윤은 그 모습에 너털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잘하실 거였으면서 엄살은.”

“이제 액션씬 못 찍겠다. 대역 어디 없냐?”

“이제 와서 쓰란다고 쓰시지도 않을 거면서.”

그렇게 실없이 웃던 둘은.

막 다가온 강선의 모습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분 다 오늘 고생 많았습니다.”

“아닙니다. 도와주신 덕입니다.”

도윤의 말에 강선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한 건 촬영을 중단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강선은 그렇게 말하며.

두 사람에게 씩 웃어 보였다.

“덕분에 좋은 영화가 나올 것 같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후반부.

아직 가장 큰 액션씬이 남았지만.

그 액션씬을 기대하게 만드는 씬 촬영이 모두 종료되었고.

“오케이, 한 번 더 갑니다! 이번에는 이쪽에서 딸게요!”

“조명 다시 조절해 봐! 거기, 그렇지. 그렇게 그대로 두고.”

“여기서는 좀 더 처절한 느낌을 살려봅시다. ‘김석진’이 결국 ‘그 남자’를 놓치는 장면이니까······.”

“‘주강훈’의 심리가 좀 불안정한 씬이라 생각되는데, 보시기에 이런 대사 추가하는 건 어떨까요?”

이후로도 쉼 없이 촬영이 이어졌다.

후반부쯤 되니 배우들은 물론이고 제작진도 의지를 불태웠다.

마지막이라고 느슨해지는 건 없었다.

강선의 강력한 카리스마 아래 일사불란하게 모든 사람들이 움직였고.

배우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쏟아낼 각오로 연기를 펼쳐낸다.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나?”

“아니, 당신 이기려고 쫓은 게 아니야. 그냥······ 당신을 잡아야 내 인생이 증명될 것 같았거든.”

그리고 최후반부.

마침내 ‘그 남자’를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은 ‘주강훈’과 ‘김석진’은.

드디어 끝이 보이는 이 이야기의 결말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다.

“인생······ 그래. 날 쫓는 걸로 네 인생이 증명되면, 그거야말로 웃긴 인생 아닌가?”

그리고 광섭이 연기하는 ‘그 남자’는.

피로 얼룩진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비열한 웃음을 머금는다.

부하들이 모두 당하고.

이제는 홀로 남아 초라한 몰골이 되어서도 어떻게 저렇게 당당하고 여유로울 수 있을까.

그야말로.

내공이 느껴지는 연기다.

“지금 너희들 모습을 봐.”

‘그 남자’는 양팔을 쫙 벌리더니.

‘주강훈’과.

‘김석진’을 바라보며.

비열한 웃음을 재차 머금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잖아?”

“······.”

“나는 잡혀도 다시 나오겠지만······ 너희들을 누가 인정해 줄까? 응? 사냥개 노릇이나 하던 전직 건달, 누명 써서 윗분들한테 참 불편할 전직 형사분들.”

무덤덤한 사실의 나열.

맞는 말이다.

한 명은 전직 건달이고.

또 한 명은 알코올 중독에 윗사람들의 지시로 파면당한 전직 형사다.

하지만.

“상관없어.”

오히려 두 사람은 웃었다.

이리되든.

저리되든.

어차피 여기까지 왔고.

두 사람 모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으니까.

그리고.

아무런 대책 없이 여기까지 온 것도 아니다.

“오랜만이야.”

또각, 또각.

하이힐 소리가 들리고.

목소리를 들은 ‘그 남자’의 눈이 흔들린다.

“너······ 어떻게······.”

“당신 부하들, 그렇게 충성스럽진 않더라고. 덕분에 살았어.”

‘소현’.

두 사람에게 협력하는 걸 눈치챈 ‘그 남자’가 부하들에게 죽이라 지시한 여자.

그런데.

살아 있다.

“후우······.”

그제야 담뱃불을 당긴 ‘주강훈’이 할 말을 잃어버린 그 남자에게 묻는다.

“당신 비밀을 아는 사람이 살아 있는데, 과연 어떻게 될까?”

그리고.

카메라는 입술을 떠는 ‘그 남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오케이, 여기서 끊습니다!”

후반부 하이라이트씬 촬영이 1차적으로 마무리된다.

강선의 얼굴에는 기쁨과 흥분이 가득하다.

이 정도 경력을 지닌 감독이라면 후반부 촬영쯤에 이 정도 퀄리티의 영상을 뽑아내면 대강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결과물이.

잘 나올 것임을.

물론 영화 성적이라는 게 항상 예상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네 명의 배우가 펼친 연기는 감히 흠을 잡기엔 너무도 뛰어났다.

‘이제 영화 망하면 내가 독박 쓰는 건가.’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고.

지플릭스에서 지원도 빵빵하게 해 줬다.

그럼.

결국 감독의 연출과 각본만이 남았다.

때문에 부담감이 살짝 밀려왔지만.

강선은 그 부담감마저 즐기고 있었다.

“이러다 다음에도 지플릭스랑 하시겠네.”

이를 보던 유정이 옆에서 중얼거렸지만-

유정 역시 싫진 않은 모양.

“내 걱정하기 전에 네 걱정이나 해라, 조감독아.”

“몰라요.”

“거 참, 언제까지 조감독만 할 건지.”

“저 없으면 감독님 누가 보살피구요?”

“니가 무슨 베이비시터냐?”

여하튼.

시간은 이후로도 빠르게 흘러.

감격의 촬영 종료가 다가왔고.

“고생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드디어 끝났다아!”

강선이 크랭크 아웃을 선언하자.

사방에서는 감격에 찬 환호들이 터져 나왔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촬영이었지만.

모두가 열정을 불태웠던 시간.

그리고 회식 자리에서 더더욱 열정을 불태운 뒤.

도윤은 도대체 어떻게 안 건지 촬영이 끝나자마자 수많은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그 연락들은 모두.

도윤과 차기작을 하고 싶어 하는 감독, 작가, PD의 연락이었다.

이미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조만간 한잔하자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는가 하면-

어떻게 안 건지, 도윤에게 처음으로 연락하는 PD나 감독도 있었다.

물론 도윤은 필요하면 약속은 잡되 차기작 건에 대해서는 정중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제 촬영이 막 끝나서 다음에 뭘 할지는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도윤이 <알고 있는가> 촬영을 막 마친, 이제 떠오르는 신인 즈음이었다면 이럴 수 없었겠지만.

지금의 도윤은 위상 자체가 다르다.

이미 여러 드라마를 히트시켰고.

첫 영화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이제는 오강선 감독의 간택을 받아 주연 배우로 나서기까지.

때문에 몸값도 오를 대로 올랐지만.

여전히 연락은 끊이질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흥행 보증수표이기 때문이다.

* * *

영화는 드라마와 다르다.

드라마는 제작형태에 따라 다르나 어느 정도 회차가 쌓이는 시점에서 방영이 시작되고, 사전제작이 완벽하게 정착하지 않은 현시점에선 방영과 촬영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영화는 다르다.

촬영 후 편집, 보정 등의 긴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스크린에 걸 수 있고.

드라마와 달리 그 특성상 2시간 내외의 짧은 분량으로 관객들을 만족시켜야 하기에 그 밀도가 훨씬 높은 편이다.

때문에 배우들은 보통 영화 촬영 종료에 맞춰 다른 스케줄을 잡는 편이다.

도윤도 마찬가지.

일본에 가기 전, <협조> 촬영을 마치는 대로 광고 두 개를 찍는 계약서에 사인을 마쳤고.

시간이 나는 대로 제안이 들어온 드라마를 검토했다.

‘이젠 슬슬 아는 드라마가 적어지는데.’

그리고 미래가 바뀌었음을 체감하는 중이다.

도윤의 머릿속엔 회귀 전 나왔던 드라마와 영화의 목록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제안이 들어온 드라마들의 절반 정도는 도윤이 알지 못하는 작품들.

그 알지 못하는 작품들 중에서 유명 작가의 작품도 있음을 고려할 때-

이 작품들이 단순히 제작되지 못하여 도윤이 알지 못하는 건 아니리라.

간단히 말해.

도윤도 모르는 사이 자신이 끼친 영향 때문에 조금씩 바뀐 미래가 지금 와선 거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처럼 보이는 셈.

그리고 개중엔.

‘도윤을 위한’ 드라마들도 있었다.

-최 배우. 우리 진짜 딱 한 작품만 같이 하자. 우리 양 작가가 최도윤 배우 생각해서 쓴 드라마라잖아. 응? 그러지 말고······.

어디까지나.

상대 측의 주장이지만 말이다.

물론 도윤은 언제 봤다고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와선 나 누구라며 반말부터 내뱉는 PD의 제안을 수락할 만큼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촬영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후 스케줄들이 있어서 결정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지 말고, 내가 국장님한테 말해서 출연료는 최고 수준으로 챙겨줄게. 아니면, 뭐 또 원하는 거 있어? 아니다. 이럴 게 아니라 만나서 한잔하면서······ 청담동에 괜찮은 술집 있거든? 매니저는 데려오지 말······.

뻔히 보이는 접대 제안도 들어왔고.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촬영 중이라, 이만 끊겠습니다.”

-최 배우? 최 배······.

도윤은 적당히 거절하는 쪽으로 마무리 짓곤.

곧장 다른 드라마 대본들도 살폈다.

어차피.

당장 어떤 드라마를 수락할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대본들을 살펴서 최근의 트렌드를 살피는 한편.

필요하다면······.

‘아니지.’

도윤은 수철을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의 도움은.

어쩌면 수철에게 독이 될지도 모른다.

이미 많은 도움을 줬다는 사실은 차지하고라도.

수철이 과연.

도윤의 도움을 받고 싶어 할까?

안 그래도 도윤의 부상 이후 제발 그러지 말라고 해도 눈치를 보면서 내내 미안해하던 사람이고.

혼자 어떻게든 해보기 위해서 연습하는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지 않던 사람이다.

그리고.

부담도 심할 것이다.

도윤은 결국.

대본을 내려놓고.

잠시 묘한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기회가 오겠지.”

도윤이 그랬듯.

기다리는 자에게는 기회가 온다.

정확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를 하며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기회가 온다.

그리고.

긴 시간을 기다려 끝내 복귀해.

강선의 마음에 든 수철에겐.

분명히 기회가 올 것이다.

도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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