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03화 (103/200)

103.너는 어떻게 발전이 없냐

일본.

이른바 ‘한류’라 불리는 문화적인 현상이 가파르게 일어나는 곳.

최근 들어선 거대한 중국 시장에 그 빛이 조금 바랬다지만, 그럼에도 일본 내 한국 드라마 팬층은 상당한 수준이다.

물론.

단순히 ‘한국 드라마’라는 이유로 무조건적인 수용을 하는 팬들은 소수.

<알고 있는가>.

<그 남자의 메모리>.

이 두 드라마가 일본 내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이유는 간단하다.

재미있기 때문에.

또 하나의 이유는-

배우들의 연기력과 비주얼이 뛰어나기 때문에.

“현재 상황은······ 상당히 고무적입니다. 일본 측에서는 주연 배우들을 초청하길 강력하게 원하는 중이죠.”

“그 방송사, 한국으로 치면 케이블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더 놀라운 거죠. 케이블인데도 그 정도 시청률에 화제성도 대단하니까요. 벌써 일본 내 유명인들도 시청 인증을 남기면서 유행이 빠르게 번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배우들 중에서도.

“무엇보다, 도윤이를 강력하게 원합니다.”

방송사는 최도윤을 가장 원했다.

V.I.C가 마약 건으로 사실상 해체 수준을 밟았다는 건 일본에서도 꽤 잘 알려진 사실이고.

사실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도 드라마 시청자들의 관심은 대개 최도윤에게 몰릴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는가>에서 보여준 캐릭터성과 제대로 된 연기력에 푹 빠져버린 것.

“일정이 괜찮을까?”

동민의 물음에 경후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협조> 촬영이 완전히 마무리된 후 바로 움직이면 됩니다. 어차피 지플릭스 독점 공개작이니 시사회 같은 기존 행사들은 모두 안 할 테고, 홍보의 경우 촬영 중간에 모두 끝낸다는 입장이니 문제는 없을 듯합니다.”

“흠. 그럼 해외 진출의 문이 열릴 수도 있는 건가?”

“정확히는 일본 진출이죠. 지플릭스와는 별개의 건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경후는 그렇게 말하곤 방송사에서 온 제안들을 한눈에 정리한 시트를 건넸다.

“일단 결정했을 경우 출연이 예상되는 프로그램들입니다.”

“토크쇼에 예능에······ 드라마 출연도 있네?”

“특별출연 형식이죠. 도윤이가 일본어 공부를 하면 아예 드라마 주요 출연진 중 하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이번 건은 아무래도 이벤트성이 될 확률도 있으니까요.”

“그렇지. 한국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것도 염두에 둬야 하긴 하는데······ 흠. 근데 일본어 건은 난 좀 다르게 생각하는데?”

“네?”

동민은 피식거렸다.

“도윤이 그놈, 시켜보면 잘할걸. 배우잖아.”

“무슨 말씀이신지······.”

“꼭 일본어를 무조건적으로 유창하게 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야. 컷만 따는 건데, 안 그래?”

그 말에 경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요. 어차피 시청자들이 보는 건 편집된 영상이니까,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해당 컷만 잘 촬영하면 되겠네요.”

“그쪽에서 그걸 원할지는 모르지만, 이야기는 해 봐야지. 그나저나 이거 참, 생각 외의 일이 벌어졌는걸.”

동민의 흐뭇한 미소.

“여하튼, 지금 제작사에서 조율 중이라고 하고 배우들끼리는 서로 연락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근데 일정이 맞는 배우가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같이 출연했던 배우들이 지금 다들 작품 진행 중이라······.”

“어차피 그쪽에서 원하는 건 주연급들이니까 뭐. 일단 우리는 도윤이 쪽만 집중하자고.”

경후 역시 입이 귀에 걸렸다.

일이 늘어날 게 뻔히 보이지만.

어쨌건 큰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이엔 엔터 역사상 최초로 해외 쪽의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거기다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인지라 기분은 더더욱 각별했다.

“좋아. 진행시키자고. 꼭 성공시킬 각오로.”

“물론입니다.”

그렇게 이엔 엔터의 역사적인 첫 해외 진출이 결의되었고.

동민은 언젠가 정말로 이엔 엔터가 상장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꿈에 부풀었으며-

만약 정말 그렇게 된다면.

도윤에게 차 한 대, 아니 이번에는 집을 사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 *

도윤은 해외 진출이라는 소식에도 별달리 들뜬 마음이 아니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기뻐했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확실치도 않은 일을 계속 기대하는 건 도윤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

도윤은 회귀했다.

그래서 매일매일이 소중하고.

지금 현재에 최선을 다하자는 생각으로 지금껏 살아왔다.

그렇게 살다 보면 미래는 자연스레 따라오리라는 게.

도윤의 지론이다.

그래도.

기왕 이렇게 된 거 도윤은 오랜만에 머리도 식힐 겸 <협조> 촬영 틈틈이 시간이 빌 때마다 일본어 교재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외의 선생님이 생겨 좀 수월해졌다.

“제가 사실 일본어 좀 합니다.”

“일본어를요?”

바로 두칠이었다.

그 넓은 카니발 좌석이 좁게 느껴지는 덩치.

“예, 예전에 부산 쪽 내려가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난 일본 친구들이랑 같이 살면서······.”

그 일본 친구들이 어떤 직업이었는지.

굳이 묻고 싶진 않았다.

여하튼.

숙달된 조교의 지도 속에서 도윤의 외국어 공부는 의외로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협조> 촬영은 어느덧 후반부에 다다랐다.

극은 빠르게 클라이막스로 향하는 가운데.

오늘 촬영 준비는 평소와는 다르게 상당히 긴장감 가득한 분위기 속에서 준비되었다.

“오늘 무슨 일 있대요?”

막 촬영장에 도착해 주차를 마치고 나온 성호의 어리둥절한 표정.

스태프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배우들 몇몇은 아예 긴장해서 뻣뻣하게 굳은 것 같다.

그런 성호를 보며 민주는 말없이 촬영 일정이 적힌 시트를 건넸다.

그리고 성호는 시트에 적힌 이름을 보자마자 탄성을 흘렸다.

“아, 그래서······.”

오늘 촬영장엔.

도윤도 아는 특별한 배우가 찾아왔다.

바로.

“최도윤이, 신수 좋네.”

유광섭이었다.

“선생님. 그간 잘 지내셨죠?”

“그럼, 그럼. 우리 도윤이가 시상식 자리에서 나 언급해 준 덕분에 100살까지 살 것 같아. 하하하.”

껄껄 웃으며 도윤의 어깨를 두드리는 광섭.

그리고 도윤과 마찬가지로.

마주치는 스태프며 배우며 모든 사람들이 광섭에게 90도로 폴더 인사를 한다.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냐. 유태양이, 아들은 잘 크지?”

“그럼요. 내년이면 초등학교 들어갑니다.”

“갓난애 때 본 것 같은데, 시간 참 빨라. 그치?”

유태양.

“우리 육창수.”

“아이참, 선생님. 본명 부르지 마시라니까.”

“우리끼린데 뭐 어때. 허허.”

진호.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 서연이. 잘 지냈지?”

“그럼요. 여전히 힘이 넘치시네요.”

“하하, 내가 힘 빼면 시체지.”

그 콧대 높은 지서연까지.

여기에.

“아,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수철까지.

“이게 누구야.”

광섭은 수철을 보자마자 양팔을 벌려 끌어안았다.

그리곤 위로하듯 속삭였다.

“그간 고생 많았다.”

“선생님······.”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광섭은 포옹을 풀곤 도윤을 힐끗 가리켰다.

“도윤이 저놈이 어젯밤에 연락을 했더라고.”

“아······.”

“별말 안 할 테니까 할 수 있는 만큼 해봐.”

광섭은.

수철을 알고 있었다.

광섭은 10년 전만 해도 왕성하게 활동하던 배우였고, 그래서 그 이전부터 인기 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수철과 두어 번 정도 같이 촬영한 바 있다.

강선만큼이나-

수철의 잠적을 아쉬워한 사람이 바로 광섭이다.

예의 바르고, 재능 좋고.

어쩌면 그래서.

도윤을 보고 마음이 갔던 걸지도 모른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는 무슨. 내가 감사해야 할 판인데. 돌아온 거 축하한다. 앞으로 잘될 거야.”

광섭은 진심을 담아 수철의 어깨를 두드려준 뒤 방금 막 도착한 강선에게 다가갔다.

“오 감독.”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죠?”

“같은 배우들한테 노인네 취급받는 것도 지긋지긋한데 오 감독까지 이러기야?”

“하하.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있는데요.”

“그놈의 아우라는. 됐고, 오늘 촬영 잘 부탁해. 아, 참. 우리 조감독은 오늘도 표정이 뚱하네?”

광섭은 유정을 보더니 씩 웃었다.

그리고 유정은.

“네, 뭐. 그간 잘 지내셨죠?”

“아이고, 까칠해라.”

“까칠하게 만드신 분이 누군데.”

강선조차 깍듯하게 구는 상황에서 퉁명스레 광섭과 악수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걸 두고 뭐라 한다거나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다.

둘은 원래 그런 사이였으니까.

“그때 일,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건 아니지?”

“선생님이야말로 그러신 건 아니죠?”

“아이고, 그럴 리가 있나? 우리 조감독 실수로 광고 하나 날아간 거 그걸 뭐 내가 지금까지 기억하겠어?”

“정확히는 제 실수가 아니라······.”

“그만, 그만.”

강선이 적당한 때에 제지했다.

투닥거리는 것도 좋지만.

그건 술자리에서 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촬영을 준비할 때.

“바로 준비해, 조감독.”

“네.”

그러자 씩 웃으며 유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강선이 슬며시 속삭였다.

“아직 많이 까칠해. 그치?”

“그때 당시에 비하면 뭐, 많이 나아졌죠.”

“에휴, 내가 촬영 끝나면 술 한잔 사야지.”

“법인카드 있으니까 그거 쓰세요.”

“늙은 마당에 법인카드로 뭐 얻어먹으면 쓰나. 아들놈한테 재산 미리 물려주고도 돈이 남아. 그러니까 내가 살게.”

“그럼, 염치 불고하고 기다리겠습니다.”

여하튼 그렇게 짧은 재회가 마무리되고.

광섭은 준비한 대본을 받아든 채 무서운 속도로 감정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주강훈’ 역의 도윤과 마주하며.

‘주강훈’과 ‘김석진’이 쫓는 ‘그 남자’의 배역과 완벽히 동화되었다.

광섭은 바로.

두 사람이 쫓는 ‘그 남자’ 역을 맡은 것이다.

성성한 백발.

그러나 운동선수 못지않은 거구.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눈빛.

여기에, 세월의 흔적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는 주름이 분위기를 더해주자.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악역의 아우라가 물씬 풍긴다.

“배우는 배우야. 캬, 죽이네요.”

“원로 배우들 중 지금까지 살아남으신 분들이 괜히 대접받는 게 아니지.”

성호의 감탄을 받은 수철의 말마따나.

광섭은 수많은 재능 가득한 젊은 배우들 사이에서도 지금껏 살아남은 배우다.

그건 광섭이 단순히 ‘짬’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만들어진 업적이 아니다.

압도적인 분위기.

압도적인 비주얼.

그리고.

압도적인 재능.

이 삼박자가 맞아떨어졌기에.

지금 이렇게 ‘오강선 컷’을 통과한 사람들과 마주할 수 있는 것.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도윤은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자,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레디······ 액션!”

강선의 신호에 맞춰.

처절한 대사를 흘렸다.

“당신이······ 내 인생을 망쳤어.”

후우우우······.

‘그 남자’가 내뿜는 담배 연기가 조금씩 방을 메워가기 시작한다.

지금.

‘주강훈’의 마음속에 차오르는 본능적인 공포처럼.

‘그 남자’가 말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럼, 아니야?”

“이빨을 드러내는 사냥개는 원래 삶아 먹어야 하는 거거든.”

‘주강훈’은.

섬뜩한 감각 속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삶아 먹는 대신에 다리 하나를 자르고 목줄을 풀어줬는데······ 이래서, 사냥개들은 안 되는 거지.”

‘그 남자’의 말이 끝나는 순간.

사방에서 ‘그 남자’의 부하들이 하나둘 걸어나온다.

‘주강훈’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입에 담배를 물고.

“후우우우······.”

불을 붙인 뒤 연기를 내뿜는다.

처연하고도.

비장한 표정으로.

그리곤 ‘그 남자’를 바라보며 웃는다.

“그래,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

“알고 있었다면, 자살이라도 하러 온 건가?”

“당신도 잘 알잖아?”

‘주강훈’은.

주변을 메운 남자들을 바라보며 섬짓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사냥개로 살면서, 내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었다는 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