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장비 잘 옮기게 생겼어
일이라는 게 그렇듯.
모두 계획대로만 진행되는 건 아니다.
촬영도 그렇다.
매번 시트에 적힌 대로 시간에 맞춰 촬영이 시작되고 마무리된다면 스태프들이 고생할 일도, 배우들이 짜증을 부릴 일도 없을 테지만.
촬영이라는 건 보통 변수를 동반하고, 그 변수라는 건 굉장히 다양하다.
배우가 대사를 까먹는다든가.
장소 섭외에서 문제가 생긴다든가.
배우가 지각한다든가.
혹은 촬영을 늦추는 다른 문제가 생겼다든가.
그도 아니면…….
지금처럼.
배우가 부상을 당했다든가.
“아니, 지금 촬영 중단…….”
“가만히 있어, 성호야.”
성호는.
분명히 가짜 피가 아니라 진짜 피를 흘리고 있으면서도 촬영을 이어가는 도윤을 보고 놀라다 민주에게 제지당했다.
“오빠가 계속하겠다고 했잖아.”
“그래도…….”
“매니저면 매니저답게 지켜봐. 담당 배우 막지 말고.”
“…….”
조금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단호한 말이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고, 성호 역시 피를 본 나머지 흥분했음을 깨닫고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성호 못지않게.
다른 스태프들 역시 놀란 상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나서지 못한다.
카메라가 둘러싼 절대적인 영역에선 아직 배우들이 연기를 이어가고 있고.
이를 통제하는 감독, 오강선이 입을 다문 채 매서운 눈으로 촬영이 이어지는 걸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그리고 지서연은-
피 몇 방울 수준이 아니라는 사실에 경악하고 또 경악했다.
아마 지서연이었으면.
그 즉시 촬영을 중단하라는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그게 당연하다.
배우가 다쳤으니까.
너무도 당연한 일.
그런데.
저기 있는 저 배우는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그냥 잠시 끊고 치료를 받거나, 혹은 이참에 잠시 촬영을 쉬어도 될 텐데.
더 놀라운 건.
방금의 그 촬영이 중단되어야 했을 만큼 큰 부상을 당한 배우가 오히려 그 부상을 이용해 촬영을 이어갔다는 사실이고.
그 장면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는 사실이다.
“왜, 전직 형사 새끼가 칼 좀 쓴다고 놀랐냐?”
“아니, 그럴 리가. 이제야 고집 좀 버린 것 같아서.”
“X랄하네, 건달 새끼.”
거기에 아무렇지 않게 정해진 대사를 치고 애드리브까지 얹는 둘의 모습.
솔직히.
질린다.
이수철도 이수철이지만.
저 최도윤이라는 배우가 지닌 강단에.
결국.
“오케이! 좋습니다!”
마지막 합까지 마무리되자 강선의 다급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고.
대기하던 스태프와 매니저, 무술팀 배우까지 한꺼번에 뛰어드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형, 형! 괜찮아요?”
“최도윤 배우, 움직이지 마시고 그대로 있어요. 바로 응급처치하겠습니다. 119 언제 오는 거야!”
“곧 온다고 합니다! 여기, 붕대요!”
무술팀은.
언제나 부상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구급키트를 항시 구비하고 다닌다.
하지만 그 구급키트가 배우에게 쓰이는 일은 많지 않다. 그만큼 이 상황 자체가 드물고 급박했다는 뜻.
그런데 웃기게도.
도윤은 다급히 달려온 강선에게 웃으며 물었다.
“그림 잘 나왔나요?”
강선은 그만.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 막히게 나왔지.”
“다행이네요.”
그리고 도윤은 곧장 수철에게 고개를 돌렸다.
“걱정 마세요. 합의금 달라고 안 할 테니까.”
“야 이 새끼야, 너는 지금 그 말이 나오냐? 괜찮아? 내가…… 진짜 미안하다…….”
“미안은요. 제가 걸려 넘어진 건데.”
도윤은 쿨하게 고개를 젓더니.
아예 한술 더 떴다.
“스펀지 하나 아꼈으니까 제작비에 기여한 셈 치면 되는 거 아닐까요?”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한 그 말에.
수철은 물론.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할 말을 잃어버렸고.
“형, 죽으면 안 돼요! 내일 보너스 받는 날인데!”
와중에 성호가 호들갑을 떨어대는 통에 곧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이후 촬영은 당연히 중단되었다.
다만.
도윤의 부상 사실은 외부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
“최도윤 배우, 생각이 깊던데요.”
“왜? 그때 그 연기?”
“아뇨. 구급차 실려 가기 전에 저한테 그러던데요. 미안한데 스태프들한테 이거 외부로 안 새어 나가게 해달라고.”
유정의 말에 강선은 피식거렸다.
“그 배우라면 그럴 만하지.”
연예인들은 이미지로 먹고사는 직업이다.
그래서, 부상에도 불구하고 촬영을 멈추지 않고 오케이 사인을 받아냈다는 사실이 기사화되어 미담처럼 알려지면 분명히 큰 이득이 있을 텐데.
그게 못 새어 나가도록 부탁했다는 건.
“이수철 배우가 피해를 입을까 봐 그런 거겠지.”
“아마도요.”
응급처치를 하고 구급대원들이 도착한 와중에도 그런 부탁을 한 걸 보면.
보통 생각이 깊은 게 아닌 듯하다.
솔직히.
그 사실이 새어 나갔다면 도윤에게는 미담이었겠지만.
수철에게는 피해가 갈 수 있으니까.
수철은 아직까지 복귀 후 대중들에게 무언가 보여준 배우가 아니다.
그래서 사실이 알려졌다면 욕을 먹거나, 이 틈을 타서 언론이 깎아내리기 바빴을 테지.
“일단 쉬는 김에 우리도 준비 좀 하자고. 그리고 이 건으로 누군가한테 책임은 묻지 말고.”
“안 그래도 미리 이야기해 뒀어요. 괜한 일로 스태프들 사이에서 책임 지우지 말라고.”
“그래. 잘했어. 아, 그리고 그날 촬영본 봤는데…… 잘 나올 것 같더라고.”
“잘 나와야죠. 피로 찍은 영상이니까.”
“무슨 공포영화 찍는 것 같다야.”
그렇게 강선과 유정이 큰 고민 없이 다음 촬영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사이-
“야 인마! 도대체 어쩌려고 그렇게 한 거야!”
“저 환잔데요. 여기 병실이고.”
“환자고 병실이고 나발이고…… 아이고, 머리야.”
도윤이 입원한 병실에선 동민이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대표님이 입원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왜, 아주 관에 들어가라고 하지 그러냐?”
동민은 한숨을 쉬곤 거즈에 덮인 도윤의 상처를 바라봤다.
열 바늘 이상을 꿰맨 상처.
조금만 깊었어도 위험했을 거라는 의사의 소견.
최소 2주 이상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진료까지.
“그래, 차라리 이참에 누워서 쉬어라. 야, 성호야. 얘 또 뭐 대본 보고 그러면 바로 뺐어라. 알았냐?”
“맡겨두세요.”
호언장담하는 성호의 모습에 도윤이 눈을 흘겼다.
“왜, 나 죽으면 보너스 못 받는다고 슬퍼하더니.”
“아니 형, 그건 어디까지나…….”
종신계약 이후.
놀랍도록 뻔뻔해진 성호.
도윤은 빠르게 포기하고 민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희도 이참에 좀 쉬어. 이때 쉬는 거지 언제 쉬겠냐?”
“무슨 평소에 못 쉰 것처럼 이야기하시네요.”
틈만 나면 휴가를 주고 어디든 다녀오라고 말하던 사람이 바로 도윤이다.
그런 마당에 지금 쉬란다고 쉬면 그게 사람인가 싶었다.
하지만 도윤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쉬다 와. 정 쉬기 그러면 회사에서 다른 일이나 해. 괜히 병실에서 산소 낭비하지 말고.”
“형, 그래도…… 혹시 사생팬 오거나 기자들 오면 어쩌려구요?”
“그럴 일 없어.”
도윤이 그렇게 말한 그때.
드르륵.
“형님! 도윤 형님!”
문이 열리며 거한 한 명이 들어섰다.
바로 두칠이었다.
“다쳤다고 해서 와 봤더니……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성호 못지않게 호들갑을 떠는 두칠.
도윤은 오랜만에 보는 두칠의 모습에 씩 웃었다.
“그간 잘 지냈어요?”
“안부인사가 지금 나오십니까! 어디 봅시다. 자상이나 창상은 제 전문이라 대충 봐도 뭐에 얼마나 깊게 찔렸는지 견적이 나옵……”
“두칠 오빠.”
결국 민주가 나선 뒤에야 두칠은 움찔하며 물러섰고.
동민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다.
“그럼 저번에 우리 한올이 지켜줬다는 분이…….”
“아, 처음 뵙겠습니다. 장두칠이라 합니다. 하하하!”
여하튼.
도윤은 그때 봐 두었던 확실한 일 처리를 떠올리고 두칠에게 부탁을 한 것.
물론 보수는 넉넉하게 챙겨주기로 했다.
그리고 하는 김에-
이엔 엔터 전속으로 경호원이 될 생각 없냐고 꼬시기도 했다.
아직 결정은 못 한 것 같았지만.
분명히 흔들리는 걸로 봐선…….
‘모르지. 어떻게 될지는.’
그때 동민이 슬며시 다가오더니 조용히 물었다.
“근데 수철이는 괜찮냐?”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도 시무룩해 있어요. 대표님이 잘 달래주세요.”
“하긴. 그놈 성격에.”
동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걱정 말라는 듯 도윤의 어깨를 토닥였다.
“내가 잘 말할게. 그리고…… 수철이 너무 미워하지 말고.”
“제가 왜 미워해요. 촬영 중에 생긴 일인데. 그리고 화면도 더 잘 뽑혔을 걸요?”
“하여튼. 그놈의 연기는.”
동민은 피식거리더니 일이 생겨 가본다며 병실을 나섰고.
두칠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멀뚱거렸다.
“근데 어떻게 되신 건데요?”
“그냥. 일이 좀 있어서요.”
“혹시 형님도 스토커 그런 건 아니죠?”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천천히 이야기해요. 시간은 많으니까. 참, 일은 어떻게 하고 왔어요? 바로 오케이해서 놀라긴 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형님 부탁인데 당연하죠. 일은 걱정 마세요.”
“제가 괜한 부탁을 한 게 아닌가 싶네요.”
“에이, 그런 말 마세요.”
그 거구로 쿨하게 손을 내젓던 두칠이 갑자기 주변을 둘러본 건 그때였다.
“저 그런데요…… 혹시 채한올 배우 왔다 갔나요?”
아.
도윤은 그제야 두칠이 자신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한 이유를 짐작했다.
하긴.
그때 둘이 붙어 다니면서 많이 친해졌을 테니.
민주에게 듣기로는.
한올의 팬카페도 가입해서 열심히 활동한다던데.
이게 바로 찐팬인가 싶었다.
“어, 그, 그게요. 절대 채한올 배우 때문에 오케이한 건 아니고요…….”
“응, 뭐. 그렇다고 해두자.”
“미, 민주야?”
민주 역시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두칠이 온 게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 * *
약 2주 후.
의사에게 박박 우겨 퇴원 허락을 받아낸 도윤은 촬영장으로 복귀했다.
사실 1주 정도는 더 있어야 하지만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퇴원한 것.
그래서 촬영은 가급적 액션씬이 없는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진행하는 것으로 일정이 바뀌었고.
“미안하다, 도윤아.”
“그만 미안하다고 하세요, 선배님.”
“그래도…….”
“한 번만 더 미안하다고 하시면 저 화냅니다.”
“그, 그래. 미안…….”
“…….”
수철은 여전히 도윤을 보면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나마-
연기할 때는 프로답게 연기해서 다행스러운 일.
하지만 수철의 성격상 이 미안함이 당분간 가실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도윤은 딜을 걸었다.
“정 미안하시면 다음에 고기 사세요.”
“말만 해. 돼지? 소? 양? 아니면 저기 호텔 라운지 갈까?”
“남자랑 호텔 단둘이 안 가요. 기사 날 일 있어요? 그냥 나중에 우리 회식 때 가는 고깃집 가서 한우나 사세요.”
“오케이, 안 그래도 와이프가 너한테 기둥뿌리를 뽑아서라도 뭐든 사주라고 했거든.”
“아, 그럼 고기 취소. 기둥뿌리 뽑는 거면 차 한 대 정도는 뽑아야…….”
“야, 한 번 말하면 땡이야!”
그래도 도윤이 받아준 덕에 부담을 좀 덜긴 한 모양.
그렇게 한결 나아진 분위기 속에서 강선이 다가왔다.
“최 배우. 좀 어때요?”
“완벽합니다. 누가 배만 안 때리면요.”
도윤은 상처가 났다가 아문 배를 가리켰고, 그 너스레에 강선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다행이네. 그럼 오늘 촬영 바로 가죠. 참, 혹시라도 조금 아프다 싶으면 바로 말하고. 최 배우 아프면 촬영 접을 겁니다. 미리 말해두는 거예요.”
옆에 있던 유정도 한 마디했다.
“부디 우리 감독님 주연 배우 배에 구멍 난 채로 연기시킨 감독 만들지 말아주세요.”
“야, 배에 구멍이 뭐냐? 표현하고는…… 근데 최 배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오늘 촬영장 같이 온 그 남자분 누구예요? 어우, 덩치가 아주 탐나던데. 장비 잘 옮기게 생겼어.”
도윤은 슬며시 웃었다.
아마 두칠을 두고 하는 말이리라.
어딜 가나.
비슷한 반응.
“오, 경호원? 좋네. 저 정도 덩치면 누가 덤비겠나 싶은데.”
“나중에 단역 출연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아무튼.
주연 배우는 부상에서 돌아왔고.
분위기는 훌륭하다.
그러니 이젠.
다시 촬영을 시작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