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저…… 실은(2)
오강선을 한마디로 말하면.
상업과 예술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가는 감독이다.
상업적으로 충실한 재미를 주면서도.
예술성도 어느 정도 확보해 평론가들도 달래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의미에서.
이번 <협조>는 기존보다 상업성에 조금 더 치중된 작품.
약간의 예술성은 있지만.
일단 두 남자의 액션과 대사, 호흡이 주가 되며 무엇보다 카타르시스를 주는 서사의 흐름이 중요하다.
물론 예술성에 치중된 작품이었어도 도윤은 이번 기회를 잡았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1차, 2차 리딩은 순조로웠고.
1차에서 괜한 꼬장을 부렸던 지서연도 2차에서는 조용했다.
물론 그걸로 지서연의 그 성질이 다 죽은 거라 생각하긴 어렵겠지만, 1차 리딩에서 수철이 보여준 대응이 나름 주효했던 셈.
때문에 도윤은 2차 리딩까지 마친 뒤 본촬영과 관련된 공지를 기다리며 대본 탐독에 열을 올리는 한편-
“다시 가봅시다. 이렇게 이 자세로 넘어질 때는 낙법이 제일 중요해요. 안전장치를 해도 까닥하면 뼈 나가는 거 한순간입니다.”
<그 남자의 메모리>에서 함께했던 무술감독 ‘김한성’과 재회하여 지금 <협조>의 액션 지도를 받고 있었다.
“근데 유연성이 진짜 좋으시네요. 어릴 때 발레라도 했어요?”
“그런 건 아닌데…….”
“저번 드라마 촬영 때도 느꼈지만 참, 탐 나는 몸입니다. 조금만 다듬으면 고난도 액션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텐데.”
무술감독들이 지도하는 배우들을 고무시키기 위해 하는 흔한 립서비스처럼 느껴질 법하건만.
김한성은 진심이었다.
근육이 빨리 붙어 일단 몸이 보기 좋다는 점에서 먹고 들어가고.
도윤의 습득력은 무술과는 전혀 관련 없는 삶을 살아온 배우치고는 상당한 수준이다.
거기에.
배우 본인의 열의까지.
‘이러면 가르칠 맛이 나지.’
자고로.
학생이 재능과 열의를 동시에 지녔을 때 가르치는 선생은 신이 나는 법.
그런 의미에서.
“이엔 엔터 쪽 사람들은 다 그런 가봐요. 어제 오신 이 배우님도 장난 아니었는데.”
“선배님이요?”
어제 한성의 액션스쿨을 방문해 지도받고 간 수철 역시 훌륭한 학생이었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까 몸이 안 따라주긴 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하시더라구요. 그리고 연기력 아직 안 죽으셨던데요.”
씩 웃는 김한성의 모습에.
도윤은 속으로 안도했다.
안 그래도.
<협조>는 액션 연기까지 펼쳐야 하는 작품인데.
나이도 조금 먹었고, 그동안 몸 관리를 하지 않은 수철이었기에 약간은 우려가 있었던 셈.
하지만 수철은 도윤의 생각 이상으로 열의 넘치는 배우였던 것.
“아마 두 분 모두 잘할 겁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예상돼요.”
김한성은 그렇게 두 배우에게 기대를 품는 한편.
“근데 지서연 씨는 도대체 왜 그런대요?”
오전에 액션스쿨을 발칵 뒤집어놓고 간 지서연을 언급하며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 있었나요?”
“네. 큰일이 있었죠. 아주…… 아오. 뭐 그렇게 요구사항이 많은지. 바닥을 제대로 닦아라, 물 온도를 무조건 맞춰라……. 이거뿐이면 제가 말도 안 합니다. 다른 사람 보면 신경 쓰이니까 다른 학생들 다 내보내라고 해서 저랑 한바탕했죠.”
아니나 다를까.
그 지서연답다.
하긴.
폭로당하면서 온갖 썰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저건 솔직히 도윤이 아는 것들 중에서는 약과다.
“그래도 열심히 하긴 하는데…… 태도가 그래서야.”
그나마 까다롭고 사람 짜증 나게 만들긴 해도 실력이 있어서 그 폭로들이 늦게 터진 거라지만.
글쎄.
이번에는 어떨까?
다른 감독도 아니고.
‘오강선’인데.
배우야 어떻게 연기하든 자기 마음에 든다면 상관없다고 하는 사람이지만.
만약.
배우의 행동이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순간.
그 대상이 누구든 가차 없이 내치는 사람이다.
심지어 촬영 중간에도 말이다.
‘모르지. 어떻게 될지는.’
솔직히.
까다로운 배우야 어느 촬영장에나 있는 법.
지서연이 그 정도가 심하다지만.
자신에게 피해만 없으면 그만.
물론.
그 행동으로 다른 배우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친다면.
그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
서태주가 그랬던 것처럼.
“고생 많으시네요. 저희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어유,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닙니다. 그저, 좀 답답해서…….”
한숨을 쉬던 김한성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자자, 다시 잊고 가봅시다. 일단 여기 씬에서는 총에 맞는 건데, 스펀지 아시죠? 여기에…….”
그렇게 다시 시작된 액션 지도는.
새벽이 지나서야 마무리되었고.
도윤은 수업을 마치자마자 빠르게 샤워를 마치고 준비했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최도윤 배우님.”
“감사합니다, 감독님.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연습 열심히 해오겠습니다.”
“네,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시구요. 근데 역시 바쁘신 것 같네요. 수업 끝나고 급하게 어디 가시나 봐요?”
도윤은 그 말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음…… 스케줄은 아닙니다.”
“아, 그럼 집안일?”
“그것도 아닙니다.”
고개를 젓던 도윤은.
아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오늘 군대 가는 동생이 있어서요. 거기 배웅해 주러 갑니다.”
“아…….”
김한성은.
알만하다는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 * *
액션스쿨 수업이 끝난 후.
곧장 기다리던 성호의 차에 탄 도윤은.
지금.
논산에 와 있었다.
“와…… 진짜 대박. 그럼 이수철 선배님 복귀작을 오강선 감독님 작품으로 하는 데다, 앞으로 쭉 배우 생활을 하시는 거예요?”
“그런 셈이지.”
“나도…… 군대만 아니었으면…….”
시무룩한 표정의 선우.
“형은 진짜…… 세상에서 제일 부러운 사람이에요.”
도윤은 훈련소 앞에서 세상 포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선우를 보며 피식거렸다.
“군대 별거 없어. 다녀온 사람한테는.”
“이 악마야.”
선우는 고개를 떨궜다.
아직 차에서 내리지 않았지만.
주변에는 자신과 같은 처지의 빡빡머리 입대 예정자들이 한가득이다.
사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선우는 지금쯤 훈련소 수료를 마치고 자대에 갔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뭐가 꼬였는지 입대일이 연기되었고, 덕분에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날에 입대하게 된 것.
참고로.
해영은 오지도 못했다.
원래대로였으면 왔을 테지만, 입대 날짜가 바뀌면서 드라마 촬영을 도저히 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뭐.
다행히도.
본촬영을 앞두고 짬을 낸 도윤이 대신 와서 논산의 그 쓰레기 같은 식당밥 대신 해영이 꼭 전해달라고 한 도시락도 먹였으니.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입대라고 해야 할까.
물론 좋은 입대는 세상에 없지만.
그나저나.
“……뭘 그렇게 바리바리 싸 왔냐?”
“이거 해영이가 챙겨준 물건들이요.”
전화 카드.
각종 사제 세면도구들.
심지어 스판 팬티까지.
하나같이 들어가면 못 쓸 물건들이다.
“그거 나한테 맡겨. 해영이한테 도로 주게.”
“네에?”
“들어가 봐야 못 써.”
“어…… 해영이가 군대 다녀온 선배님들한테 여쭤보고 준 거라던데요.”
생각보다 악마는 우리 주변에 멀리 있지 않다.
도윤은 순간 자신도 악마가 되어볼까 하는 유혹에 이끌렸지만.
“됐어. 난 말했다. 후회하지 마라.”
“아, 알겠어요. 형님한테 맡길게요.”
오늘 배웅하는 사람은 자신 하나뿐인 선우가 불쌍한 나머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참고로.
선우네 집은 너무 프리한 나머지.
아들이 입대하든 말든 부모님이 쿨하게 아침밥만 먹이고 보냈다고 한다.
‘세상엔 다양한 가정이 있는 거니까.’
도윤만 해도 부모님이 동하보다 일찍 입대하는 도윤을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배웅했지만 말이다.
여하튼.
“배우라고 괜히 이미지 관리하지 말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훈련 빼. 군대에서 다쳐봤자 아무도 안 알아준다. 심하다 싶으면 바로 외부 진료 요청하고.”
“꼭 그래야 해요?”
“어차피 2년이야. 가서 미담 만들 생각 아니면 중간만 하다 와. 남는 거 하나도 없다.”
참.
생각해 보면 이만큼 쓸데없는 시간 낭비도 없다.
가서 사회성을 배운다느니, 규칙적인 생활을 배운다느니, 실제로 도움이 된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의 대한민국 남자들에게는 아닐 것이다.
다치기 전에는 나라의 아들.
다친 뒤에는 느그 아들.
이런 말이 괜히 나왔겠는가.
물론 선우는 연예인이고, 괜히 언론에 이슈라도 됐다간 지휘관들 진급길이 날아가니 그럴 가능성은 적겠다만.
“알았어요. 형, 전화하면 꼭 받으셔야 해요? 제가 꼭 그…… 20발 다 맞춰서 전화할 테니까요!”
“꼭 좀 해라. 제발.”
“넵.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훌쩍이는 선우와 선우의 매니저가 차에서 내렸고.
도윤은 문득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안 하고 있던 성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넌 군대 안 가냐?”
“저, 저요?”
“어. 생각해 보니까 너 군대 이야기 나올 때마다 잠잠하더라. 놀리는 건 아니고, 혹시 입대 계속 미루고 있으면 미리 말해.”
도윤은 혹시나 성호가 군대를 간다면 다녀온 후에도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으로 물었다.
만에 하나.
매니저 일을 계속하려는 이유로 입대를 미루고 있다면 그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없으니까.
그리고 또.
당장 성호에게 굳이 말할 생각은 없었지만.
성호가 만약 간다고 하면 고향에 계신 성호네 어머니도 도윤이 보살필 생각이었다.
그런데.
성호의 입에서 의외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저…… 실은 면제에요.”
“뭐?”
순간 도윤은 놀라고.
이어진 말에 더 놀랐다.
“실은…… 제가 성인 됐을 때 아버지한테 간 이식해 드렸거든요.”
“…….”
“지, 지금은 괜찮아요! 많이는 못 마셔도 맥주 한두 잔 정도야 괜찮고, 의사 선생님이 잘해주셔서 일상생활에 지장도 없고…… 가끔 피곤하면 힘들긴 해도 버틸 만해요! 괜찮아요!”
아차 싶었는지 필사적으로 말하는 성호.
도윤은.
그런 성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내려.”
“네?”
“내려서 조수석 가.”
“형.”
“앞으로 봐서 내가 좀 덜 피곤하면 내가 운전할 테니까 쉬어.”
그러면서 한 마디했다.
“그리고 이제 오늘처럼 일도 아닌데 운전하겠다고 나서면 나한테 죽는다.”
“……네.”
괜히.
미안해진다.
그런 것도 모르고 윽박도 지르고.
그럴 필요도 없는데 괜히 핀잔도 줬으니.
‘어쩐지.’
취한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는데.
그게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니.
도윤은 꾸물거리며 차에서 내려 조수석에 앉은 성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바로 내려 운전석 문을 열고 차에 올랐다.
그리곤 성호를 바라봤다.
“성호야.”
“네, 형.”
“민주한테는 안 말할게.”
“……감사해요.”
모르긴 몰라도.
매번 시큰둥하게 구는 민주라 한들.
그 사실을 알면 이전처럼 성호를 대하기 힘들어할 것이다.
오히려.
성호에게 진지하게 충고할 수도 있다.
이 일.
그만두라고.
도윤 역시 그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성호의 표정을 보니 그걸 원하는 건 아닌 듯했다.
‘간 이식이라.’
이제는 성호를 조금 다르게 대해야 할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성호 녀석이 불편해할 정도로 정성스레 대하는 건 못하겠지만.
아무튼.
뭔가 애틋한 마음이 자라나려던 그때였다.
“형.”
“왜.”
“솔직히 말해보세요, 부럽죠?”
싱글싱글 웃는 낯.
도윤은 성호가 분위기를 풀어보려 한 말임을 알고 있었기에.
“내려.”
“네?”
“걸어와. 히치하이킹하든가.”
“아, 형!”
적당히 받아주며.
웃음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