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저…… 실은(1)
첫 리딩에서는 으레 논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캐릭터 해석에 따른 감독과의 견해 차이를 보이거나, 애드리브와 관련된 정도의 차이를 두고 설전을 벌이기도 한다.
혹은 준비가 덜 된 배우를 향해 따가운 시선이 쏟아지기도 하고, 혼자 튀려고 애를 쓰는 배우에게 날카로운 지적이 날아든다는 등.
하지만.
‘오강선 컷’을 통과할 만큼 실력 좋은 배우들이라서일까.
“오케이. 다시 한번 봅시다. 어미를 살짝 늘어뜨리고 가죠.”
“네, 알겠습니다.”
‘오강선’의 말에는 절대적일 정도로 복종한다.
자신이 어떻게 캐릭터를 해석했든.
강선은 배우를 설득시키고.
배우들은 놀랍게도 이를 묵묵히 따른다.
이는 비단 오강선의 명성 때문만이 아니다.
“‘학주’ 캐릭터는 극 초반 소시민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배역이죠. 그런 의미에서 조금 더 공격적으로, 혹은 날카롭게 대사를 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단순히 짜증스러운 게 아니라 뭔가…… 상대에게 화를 내긴 하는데 그 화가 오롯이 상대를 향한 화가 아닌 그런 느낌.”
“예, 알겠습니다.”
강선은 감독답게 자신의 캐릭터를 모두 완벽하게 분석한 상태였고, 이를 통해 배우와 즉석에서 의견을 교환하고 필요하다면 이렇듯 수월하게 설득시킨다.
새삼.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이 고스톱 쳐서 딴 게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
덕분에 극 초반, 조직에게 배신당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극도로 불안정한 심리상태의 ‘주강훈’ 역을 맡은 도윤은.
“개새끼들…… 다……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라고!”
마치.
오강선이 무슨 말을 할지 알기라도 한 듯.
다른 배우들이 한 번씩 강선의 조언을 거쳐 간 것과 달리 여러 대사들을 막힘 없이 빠르게 소화해 내고 있었다.
‘역시, 해석력이 대단해.’
재능도 재능이지만.
노력.
도윤에게선 그게 보였다.
강선은 단순히 억지로 캐릭터를 파고드는 게 아니라 꼼꼼하고 주의 깊게 해석한 도윤의 결과물에 만족스레 웃었다.
사실.
저 ‘노력’ 역시 ‘재능’이라 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이 바닥에서는.
아무리 비슷한 시간을 노력해도.
그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는 법.
간단히 말해 도윤은.
남들이 하는 이상으로 노력하면서도-
그 효과는 배 이상.
‘젊은 녀석이 신기하단 말이지.’
도윤이 10년이라는 인내의 시간 동안 배우로 다시 서기 위해 했던 노력들을 모르는 강선으로선.
그저 신기할 따름
이러다 보니 자기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절대 믿지 않는 몇몇 배우들도 고개를 끄덕일 지경.
‘역시…… 도윤이구나.’
그리고 실제 리딩 현장에서 도윤이 연기하는 건 처음 본 수철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잘한다, 잘한다 매번 이야기만 들었지 이렇게 눈앞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같은 ‘배우’로서 보고 있자니.
젊은 시절 ‘최고’라 추앙받던 자신의 재능이 초라해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지금은 ‘재능 넘치던 배우’ 이수철로 이 자리에 온 게 아니다.
또한.
‘왕년의 배우’ 이수철로 온 것도 아니다.
그저.
‘배우 이수철’로 온 것뿐.
그렇기에 해야 하는 일은-
“씬 넘버 54.밤. 사건을 알아보기 위해 집을 나선 ‘김석진’은 뒷산을 오르며 헉헉대다 비틀거린다. 씹어뱉듯 욕하는 ‘김석진’.”
자신도 ‘오강선 컷’을 통과했음을 증명하는 것.
“씨팔…… 염병할 술 때문에 니미 걷지도 못하겠네. 헉, 허억. 하. 미친. 이제 와서 무슨 부귀영화를 누려보겠다고 이 X랄을…….”
경박해 보이면서도.
긴박감이 느껴지는 욕설.
거기에 눈을 감고 들으면 정말 다 퍼진 알코올 중독자가 정말 산을 오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런 한편으로는-
“개 같네. 진짜.”
툭툭 던지는 대사들이 귀에 쏙쏙 틀어박히는 게.
과연 10년 동안 현장을 떠나 있었던 배우가 맞나 싶다.
또한 10년을 기다린 끝에 하는 연기라 조급함이나 과장된 느낌이 들 법도 한데.
“하, 미쳐 돌아버린다. 내가 진짜……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런 것조차 없으니.
과연.
재능은 재능이다 싶었다.
“좋네요. 다만 감정을 약간만 절제합시다. 지금 이 흥분은 그대로 가져가되, 앞뒤 감정을 조금만 잘라내고 대사별 클라이막스에 폭발시키는 걸로.”
강선은 만족스런 웃음을 띤 채 간단한 조정만으로 수철의 차례를 넘겼고.
수철은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좀 살겠네.’
잘한 건가 싶기도 하면서.
긴장되는 이 순간.
솔직히, 아직 적응이 덜 되어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을 만큼 숨 막히는 순간이었지만.
수철은 필사적으로 참다가 리딩 1부가 끝나자마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화장실로 향했다.
“후우.”
간신히 속을 추스르고.
거울을 바라보자.
오늘의 부담감 때문인지.
아니면 배역 준비 때문인지 초췌한 몰골의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밝은 표정이다.
“좋아 보이시네요.”
그때 화장실로 들어선 도윤이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방금까지 열심히 변기 붙잡고 있었다.”
“그러신 것치곤 엄청 좋던데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도윤의 말은 수철을 퍽 안심시킨 모양이다.
“고맙다. 너 없었으면 어떻게 연기했을까 싶다.”
“저 없어도 잘하실 분이.”
“이제 나보다 네가 선배야, 인마. 내가 이 바닥 떠났을 때랑 지금은 완전히 다른데.”
“그래도, 재능은 어디 안 가잖아요?”
도윤이 씩 웃자.
수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제 이렇게 능글맞아진 건지.”
* * *
리딩은 순조로웠고.
서서히.
수철을 향한 의문의 시선은 풀리고 있었다.
배우들은 안다.
수철의 재능이 어느 정도이고.
그 긴 공백을 깨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노력을 해왔다는 걸.
단순히 대사 한 줄 치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아우라.
과연.
수철이 배우 생활을 접었을 때 수많은 감독들이 아쉬워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덕분에 수철의 커리어를 사실상 끝장냈던 <사이버 러버>가 새삼 괴작 중의 괴작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지만.
미치지 않고서야 이제 수철 앞에서 그걸 언급할 간 큰 사람은 없을 테지.
아무튼 이걸로…….
‘오강선 컷’을 통과한 두 명의 주연 배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진 셈.
처음에는 오강선과 이엔 엔터 사이에 뭐 있는 거 아니냐며 억측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곧 입을 다물 테고.
영화가 개봉하면, 대중들은 놀랄 것이다.
정말 오랜 공백을 깨고 돌아온 수철이 펼칠 연기에.
이런 가운데.
‘아, 짜증 나.’
단 한 명의 배우.
지서연만은 도윤과 수철을 고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두 배우가 펼치는 연기의 문제는 아니다.
대우의 문제였다.
<배우의 세상>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어떤 감독이 용감하게도 여러 베테랑 배우들이 있는 자리에서 꺼낸 제안으로 성사되어 만들어진 프로그램.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야말로 엄청난 화제를 부른 프로그램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배우들 사이의 기 싸움이나 역학관계가 상당히 흥미롭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계자들은 겉으로는 페이크다큐를 표방해도 저건 사실상 진짜 다큐나 마찬가지라고 평했을 정도.
그런 의미에서-
그 <배우의 세상>에서 나온 배우들 사이의 자존심 다툼 중 하나는 바로 ‘순서’의 문제다.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의 의미 말이다.
리딩 좌석이 배치되는 순서.
식사를 받는 순서.
커피를 받는 순서.
인사를 받는 순서 등.
명성이 높은 배우일수록 자신이 모든 걸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덕분에 서로 비슷한 커리어를 지닌 배우들 사이에서는 이 문제로 갈등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이번 영화 <협조>의 경우.
지서연은 당연히 자신이 최우선으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력의 차이도 경력의 차이인 데다.
자신 역시 ‘주연’ 배우였으니까.
지서연은 두 주인공이 쫓는 적의 연인이자 끝내는 두 주인공에게 협조하게 되는 ‘소현’ 역을 맡았다.
대본 내 비중도 적지 않고.
강선이 미팅 때 말한 것처럼, 지서연이 지닌 날카로운 분위기와 카리스마가 잘 발휘될 수 있는 배역.
그런 의미에서-
지서연은 2부 리딩 시작 전, 한 스태프가 자신을 지나쳐 도윤에게 먼저 간식을 건네주자 눈을 부라렸다.
“이봐, 거기. 혹시 나 안 보여요?”
순간.
도윤에게 간식을 건네고 이어서 옆에 있던 다른 배우에게 간식을 주려던 스태프의 손이 움찔했고.
“이상하네. 혹시 어제 들어왔어요? 아니면…… 다른 선배들이 뭘 안 알려줬나?”
지서연의 그 말에 스태프의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지서연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너.
미쳤냐?
공교롭게도.
지금 이 자리에서 지서연보다 경력이 긴 배우는 없었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이옥주 정도의 원로 배우가 아닌 이상 감히 이 말에 딴지를 걸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강선 역시 자리를 비운 상황.
‘소문대로네.’
그나마 조감독 유정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아무리 유정이 유능하다고 한들 조감독은 조감독.
그래서 유정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정 안 되면 강선에게 콜이라도 보낼 생각이었다.
‘성질 더럽다고 듣긴 했는데…… 시작부터.’
보통 간식을 나눠주는 스태프들은 막내급이다.
그래서 긴장감에 실수할 수도 있다.
제작진 쪽이라서 옹호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그걸 지적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
적어도 유정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불쌍하게 떠는 막내 스태프의 모습만 봐도.
그래서 결국 자리에서 일어난 유정이 나름대로 상황을 수습해 보려던 그때였다.
놀랍게도.
“선배님, 아마 스태프가 착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수철이 자신의 간식을 들고 일어나 유정에게 다가가더니.
“제가 좀 노안이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말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당연하게도.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지서연이었다.
‘뭐야?’
이참에.
적당히 성질도 부리면서 상하관계를 확실히 해둘 참이었는데.
수철이 이렇게 저자세로 나올 줄은 몰랐던 것.
“10년 전에도 뵈었지만, 선배님 피부는 여전하신 것 같습니다.”
“흥…….”
지서연은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별로 안 듣고 싶으니까 가. 거기, 내 거 가져와.”
“네, 넵!”
그래도.
아까보다는 한결 누그러진 표정이다.
수철은 그제야 안도하며 고개를 숙인 뒤 자리로 돌아갔고.
그 모습을 보며 도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단지 수철이 고개를 숙여서라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비록 수철의 커리어가 중간에 끊겼을지언정.
배우 생활을 계속했다면 연차로 지서연에게 크게 밀리지 않는 배우였을 텐데.
지난 일을 모두 잊고 저렇게 고개를 숙이는 게 어디 쉬운 일일까.
도윤은 깨달았다.
수철의 연기에 대한 열망이 생각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점.
그리고…….
10년의 기다림 끝에 기회를 거머쥐었던 회귀 전의 자신과 닮아 있다는 점을.
또한.
유정 역시.
이제 더 이상 수철에 대한 일말의 의심조차 품을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대단한데.’
어째서인지.
이번 영화에서만큼은 저기 앉아 있는 콧대 높은 지서연이 제멋대로 굴지 못할 거란 예감이 떠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