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95화 (95/200)

95.오강선 컷

촬영을 준비하며.

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하나는 도윤의 몸에 더더욱 근육이 붙었다는 사실이다.

강선의 주문에 따라.

조직에 배신당한 ‘주강훈’ 배역을 완성시키기 위함이다.

다만 아주 우락부락한 근육은 아니었다.

그저 <그 시절의 우리> 때보다 좀 더 커진 정도였고.

사실 그만한 근육을 단기간에 만들기 위해서는 정상적인 방법으론 불가능한 일.

그래도 도윤이 열의 있게 임한 덕분인지-

“이야, 회원님 몸 붙는 속도가 장난 아니네요.”

“가,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만 더! 좋습니다. 오케이. 하나만 더! 내쉬고, 후우! 자아, 다시 내리겠습니다. 진짜, 라스트 하나만 더!”

“븐믕흐 므즈막으르그…….”

트레이너의 칭찬 속.

도윤의 몸 만들기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그리고 옆에서는.

“으그그그극!”

“박유준 회원님도 아주 훌륭하네요. 자세 좋습니다.”

“그, 그럼 무게 더 올릴까요?”

“그럼 병나요. 차근차근 가시죠.”

왜인지 오늘따라 의욕이 충만해 보이는 유준이 덤벨을 들어 올리느라 안간힘을 쓴다.

들어보니-

새 작품에 합류하는데.

감독이 자존심을 건드렸다나 뭐라나.

뭐.

이 바닥에서는 흔한 ‘기강 잡기’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걸로 저렇게 자극을 받는 것도 배우가 거쳐야 할 통과의례라면 통과의례.

여하튼.

‘열심히 하는 녀석이니까.’

박유준은 회귀 전 도윤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일찍, 그리고 가파르게 상승세를 타고 있었으며.

저런 자세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재계약.

도윤은 운동을 마친 뒤 유준과 간단하게 끼니를 때우고 소속사 사무실로 향했으며.

동민과 경후를 만났다.

참고로 경후는 수철이 배우 계약으로 전환하며 비게 된 자리를 메운 사람.

이전까지는 박 실장으로 불리다가.

이제는 박 팀장이 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조건은 저번에 말한 것처럼 8 대 2.대신 초상권 및 각종 권리는 회사에 계약기간 동안 귀속되는 걸로.”

경후의 말에.

도윤은 계약서 내용을 꼼꼼히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요.”

“계약금은 사인하면 이번 주 안으로 입금될 예정이고…….”

도윤의 계약금은 5억.

언뜻 보면 적다고 느낄 수 있지만.

도윤은 다른 쪽에서 이득을 취했다.

“이제 이사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이사는요. 그냥 평소처럼 불러주세요.”

“다행이다. 이사님, 이사님 불러야 할까 봐 걱정이었어.”

도윤은 경후의 엄살에 피식거렸다.

다름이 아니라.

도윤은 이엔 엔터의 지분을 가져간 것이다.

무려 10%나.

아직 상장을 진행한 건 아니나.

현재 지분을 가져왔다는 건 아주 큰 의미가 존재한다.

“솔직히, 대표님이나 나나 도윤이 네가 1인 기획사 안 차리는 것만 해도 어딘가 싶다.”

어쨌건 이엔 엔터 입장에서는.

수익금 배분을 10 대 0으로 책정하더라도 잡아야 하는 인재가 도윤이었으니.

“아직,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아직?”

“네.”

울상을 짓는 경후의 모습에 낄낄대던 도윤은.

“걱정 마세요.”

확고한 한마디로 경후를 안심시켰다.

뭐.

정말 오랜 시간이 흘러 도윤이 베테랑 배우가 된 뒤,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독립하는 방법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도윤은 배우라는 현재의 역할에 집중하고 싶었다.

1인 기획사는 말 그대로 혼자 모든 걸 해야 한다. 연기뿐만 아니라 비즈니스까지도. 그러다 보면 자연히 연기는 뒷전이 될 테지.

도윤이 원하는 건 당연히 그게 아니다.

“이걸로 올해 가장 큰 고비는 넘긴 건가?”

이제야 안심하겠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는 동민.

“솔직히, 걱정 많이 했다고. <알고 있는가> 찍은 다음에 재계약하긴 했어도, 솔직히 마음 졸였거든.”

영세한 엔터 대표 입장에서.

소속 배우가 커가는 걸 바라볼 때면 기쁨과 걱정이 동시에 솟아오른다.

배우가 성장한다는 사실에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저런 배우를 거대 엔터에 빼앗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

실제로 도윤은 요 몇 달 사이 몇몇 엔터 회사에서 거액의 계약금과 함께 이적 제안을 받은 바 있다.

솔직히.

이엔 엔터에 대한 마음의 빚은 이전에 다 갚은 거나 마찬가지.

하지만 그럼에도 이번에 사인을 한 건.

동민의 비전이 확고하다는 것과-

마침내 배우로 다시 설 준비를 마친 수철이 여기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분을 받게 되며 향후 도윤이 꾀할 수 있는 미래의 숫자가 늘어났다는 점도 한몫했지만.

“그나저나, 작품 준비는 좀 어때?”

“잘 되어가고 있습니다. 5월에 리딩 진행하고, 그때부터 촬영 들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흠…… 8월이나 9월까지 촬영한다 치면 올해는 둘 중 하나네. 하나 더 하든가, 이걸로 끝내든가.”

“그때 가서 결정하죠. 흥미로운 시나리오도 있고, 좀 더 고민해 보고 싶습니다.”

“하긴. 이제 내가 뭐라 할 건 아니지.”

작년.

동민은 당돌하게도 내기까지 걸어가며 기어이 <악마의 세계>를 까 버린 도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는 참.

뭐 저렇게 근거 없이 자신하나 싶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는다.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기대된다.

여기.

이 눈앞에 있는, 고작 20대 중반에 어마어마한 커리어를 쌓아 나가고 있는 젊은 배우가 또 어떤 성과를 낼지.

“작품 선택에 대해서는 원하는 대로 해. 언제나 밀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참, 그나저나. 이사는 언제 할 생각이야? 안 그래도 주변에서 궁금해하더라고. <나 홀로 집에> 방송 나갔을 때 그 집 진짜냐고. 아니, 억울해 죽겠다니까? 내가 정산금 떼어먹는 줄 알더라고.”

도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예 원룸으로 돌아갈까요?”

“나 좀 살려주라. 이 바닥 소문 이상하게 나면 우리 쪽으로 배우 오지도 않아요.”

“그럼 반지하로 가죠, 뭐.”

안 그래도.

회귀 전에는 10년 동안 반지하에서 먹고 자고 했으니.

사실 못 살 것도 없다.

물론.

“야 인마!”

동민은 경기를 일으켰지만 말이다.

* * *

5월.

드디어 캐스팅이 완료된 <협조>의 배우들이 처음으로 모두 모이는 날.

도윤은 며칠 동안 보지 못한 수철의 모습을 기대하며 리딩이 열리는 장소에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신인 배우 김용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신인 배우 이서정입니다!”

이제 도윤도 슬슬 연차가 쌓인 상황이고.

비슷한 연차의 배우들 중에서는 감히 커리어를 따라올 배우가 없다 보니.

영화에 참여하는 신인 배우들의 인사는 놀랍도록 깍듯하고 우렁차다.

도윤은 늘 그랬듯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반가워요, 잘 부탁해요.”

그리고 그런 도윤의 모습은.

신인들에게는 약간의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와…… 역시 친절하시구나.’

‘후배들한테 용돈도 주시는 분이라던데, 역시.’

물론.

이미지 메이킹을 굳이 시도한 건 아니지만.

촬영 때마다 차곡차곡 쌓았던 행동들이 지금의 이런 인식을 만든 것이리라.

때문에 후배들뿐만 아니라 도윤을 처음 보는 선배 배우들도 상당히 좋은 반응이다.

“네가 도윤이구나? 반가워. 유태양이라고 해.”

<협조>.

동일한 적과 동일한 목표를 지닌 두 주인공을 돕는 비밀스런 남자 ‘석구’ 역을 맡은 중년 베테랑 배우.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최도윤입니다.”

“그래. 태규 형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다. 술 좀 한다면서?”

“소주를 조금 좋아하는 편입니다.”

“크, 그렇지. 술은 역시 소주지. 그런 의미에서 오늘 회식 때 한잔하자고.”

배우들 상당수가 그렇듯.

유태양 역시 술을 좋아하는 듯했고.

그런 의미에서 술이라면 어지간해서는 빼지 않고 마시는 도윤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물론, 술 잘 마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음에 든 건 아니겠지만.

이어서.

“오, 최도윤 씨? 반가워요. 진호라고 해요.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여기서 보네. 오 감독님이 먼저 제안 주셨다면서요? 부럽다, 부러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나 참, 연기대상까지 받았으면서 가르침은 무슨. 오히려 내가 부탁해야겠는데.”

30대 중반.

‘진호’라는 가명을 쓰는 배우는 도윤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씩 웃었다.

그의 배역은 불명예 퇴직 형사 ‘김석진’의 후배이자 유일하게 ‘김석진’이란 사람을 옹호해 주는 조력자.

그런 한편.

‘김석진’이 조직 출신 ‘주형진’과 함께 움직인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주형진’과 대립하는 역할이기도 했다.

“보니까 우리 둘이 푸닥거리하는 장면도 있던데, 살살 좀 부탁해요. 어우, 몸 보니까 난 톡 건드려도 죽겠다야.”

진호 역시.

영화 쪽에서는 알아주는 배우.

선 굵은 이목구비와 동굴 같은 목소리 덕택에 어느 영화에 출연하든 주연 못지않게 시선을 끌어당기는 사람이다.

드라마를 주로 찍어 온 도윤으로선 처음 만나는 사람이지만.

아우라가 느껴진다.

베테랑의 아우라가.

“아무튼 잘 부탁해요. 우리 다, ‘오강선 컷’ 통과한 사람들이잖아?”

도윤은 진호의 말에 씩 웃었다.

오강선 컷.

이 바닥에서는 꽤 유명한 단어다.

이른바 오강선이 직접 캐스팅한 배우들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탄탄대로가 펼쳐진다는 속설.

물론 탄탄대로를 걷는 배우여야 ‘오강선 컷’을 통과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수도 있지만-

지금껏 오강선이 캐스팅하고 출연시킨 신인 배우들 중 자리 잡지 못한 배우는 거의 없다는 점에서.

꽤 신빙성 있는 속설이다.

여하튼.

마찬가지로 도윤은 ‘오강선 컷’을 통과한 다른 배우들과도 인사를 나눴으며.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할 수는 없는 거라고.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네.”

간단한 대답 후 쌩하니 가버리는 배우.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진호가 슬그머니 다가와 귀띔했다.

“가급적 건드리지 말라고.”

도윤도 안다.

‘지서연’이라는 저 배우를.

도윤이 회귀하기 1년 전.

연예계를 뜨겁게 달군 사건을 일으킨 저 배우를 말이다.

연기력 하나는 알아주는, 여자 배우들 중에서는 물론이고 남자 배우들 사이에서도 전혀 꿀리지 않는 실력과 커리어를 지닌 배우지만.

그 성격이.

대단하다고 들었다.

기자회견 때 진실을 요구하는 기자에게 쌍욕을 퍼붓고 나간 건 아주 유명한 사실.

또한.

한 사극 촬영 현장에서 전쟁씬 촬영을 펑크내며 대기하던 수백 명의 엑스트라를 바람맞힌 것 역시 꽤 유명한 일화.

쉽게 말해.

연기력만 아니면 같이 일하긴 좀 그런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도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곧 들어온 수철도 마찬가지.

“와. 진짜네.”

“대박.”

왕년의 인기 배우.

그리고 마침내 복귀를 선언한 수철이 등장하자.

배우들은 각양각색의 반응을 찰나의 순간 보였지만.

이내 배우답게 표정을 감추고-

수철에게 인사를 건넨다.

진심으로 반가워하거나.

반가워하는 표정 아래 어딘가 모를 거북함을 감추거나.

그도 아니면.

그냥 처음 보는 배우 대하듯 하거나.

수철은 캐스팅이 확정된 뒤 도윤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배 대접은 바라지도 않는다고.

그래서일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수철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덤덤한 표정으로 인사를 마친 뒤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잠시 눈이 마주친 도윤에게 고개만 까닥였을 뿐.

도윤도 그런 수철의 복잡한 마음을 알고 있어서일까.

굳이 반갑게 아는 척을 하진 않았다.

그게 현재의 수철에겐 더욱 도움이 될 테니.

아무튼.

“다들 모였군요.”

이제 슬슬 시간이 됐다.

“이번 영화 <협조> 감독을 맡은 오강선입니다. 반갑습니다.”

어쩌면.

도윤에게 펼쳐질 새로운 배우 인생의 시작이 될지도 모르는 영화가 시작될 시간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