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잘됐네요
지금도.
오강선의 오필름(O-film) 사무실에는 수많은 전화들이 날아든다.
감독님 계시느냐.
한번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다.
지금 감독님 잘 지내시냐.
안부 전화를 가장한 청탁 전화부터.
“죄송하지만 감독님 지금 자리에 안 계십니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셔도 만나기 힘듭니다.”
아예 직접 찾아오는 사람들까지.
모두-
오강선이 2년의 공백을 깨고 신작에 들어간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다.
감독이란 제작사의 입김에 휘둘리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보다 명성 높은 배우에게 억눌리는 불쌍한 존재지만.
오강선쯤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배우에게는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영광을 안겨주고.
소속사에게는 배우가 오강선 영화에 출연했다는 커리어 한 줄을 추가시켜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렇기에 지금 이렇듯.
조연.
혹은 단역에라도 밀어 넣기 위해.
이런 사람들이 끊임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물론.
조연과 단역에 한해서만 이러는 게 아니다.
“또 조준석 배우 연락인데요.”
“무시해. 앞으로 두 번 더 오면 전화 받고 지금 정신없어서 못 받았다고 하고.”
“감독님 어디 있냐고 물어보시면요?”
“당연히 없다고 해야지.”
조감독.
서유정은 뭘 당연한 걸 묻냐는 듯 간단하게 답하고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컴퓨터에는 캐스팅 대상자들의 이름이 적힌 시트가 떠 있는 가운데.
강선과 유정이 미리 후보군에 올려놓은 배우들이 각 배역 옆에 적혀 있었다.
당연히 배역 하나에 배우 한 명만 적혀 있는 건 아니지만, 주연 ‘주강훈’과 ‘김석진’ 역은 달랐다.
현재 유일하게 캐스팅이 확정된 도윤.
그리고, 아직 오디션을 치르지 않은 수철.
두 배역의 차이는.
도윤의 경우 이미 캐스팅 소식이 새어 나가며 다른 배우들이 애초에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수철의 경우, 복귀 소식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일이라 한낱 찌라시로 치부되어.
이렇게 주연 자리를 차지하고 싶어 배우들이 계속 연락을 걸어오는 것이다.
물론.
유정은 잔뼈 굵은 조감독답게 에둘러 거절하면서도 여지는 남겨두었다.
강선은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거니까.”
입술을 짓씹던 유정은 만약 수철의 연기력이 자신이 기억하던 것과 다를 경우.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모두 염두에 넣어 두고 있었다.
애초에 이 바닥은.
당장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를 만큼 복잡하고 변수 가득한 곳이니까.
당장 내일 촬영하기로 한 배우가 과거 악행으로 매장당해 제작사를 멍하게 만드는 일도 부기지수.
뭐.
강선의 표정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지만 말이다.
여하튼.
시간은 흘러-
마침내 수철과의 미팅 날이 되었고.
미팅룸에 나란히 앉은 강선과 유정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유정은 애써 아닌 척해도 걱정한 기색이 드러난 반면.
강선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다.
“왜 그렇게 걱정이야?”
“모르는 일이니까요. 10년이 지났잖아요.”
유정의 대답에.
강선은 글쎄다, 싶은 얼굴이다.
“10년이나 지난 마당에 다시 배우 하겠다고 결정했으면, 그만한 자신이 있는 거 아닐까?”
“10년이면 강산도 바뀌죠.”
“재능은 10년 만에 사라지지 않아.”
강선은 드물게도 확고한 어조로 말했고.
유정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강선의 직감이 맞길 바라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실망하지 않을 테니까.
“기다려보자고. 시간은 보름이나 줬고, 그사이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준비해 오겠지. 간절하다면.”
“그랬으면 좋겠네요.”
유정은 꽤 오랜 시간 강선을 봐 왔지만.
종종 이렇게 강선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솔직히.
10년 만에 그 왕년의 인기 배우 이수철이 복귀한다는 사실은 이슈가 되기야 하겠지만.
실패한다면 그만한 자폭도 없다.
어디 배우가 없어서 그런 배우를 데려와 무려 주연으로 쓰냐는 조롱만 들을 테니.
하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번에도 믿고 가는 것뿐.
이런 가운데.
“이수철 배우님 방금 도착했습니다.”
“아, 들어오시라 그래요.”
미팅룸 문이 열리고.
들어선 사람은…….
“세상에.”
자신이 알던 이수철이 맞나 싶은 사람이었다.
“감독님.”
“이 배우. 어떻게 된 겁니까?”
놀란 두 사람의 모습에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는 손가락은 나뭇가지처럼 메말랐고.
움푹 들어간 양 볼과 움츠러든 체격은 정말…….
불명예 퇴직 후 알코올 중독으로 폐인이 된 ‘김석진’ 그 자체였다.
“허.”
강선은 몰라보게 달라진 수철의 모습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따로 주문을 한 것도 아니다.
그냥 준비해서 만나자고 한 것뿐인데…….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해 올 줄이야.
‘아.’
그러다 문득.
강선은 수철이 배우였던 시절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감독이 한 달 안에 20㎏을 빼 오라고 주문했더니.
한 달 뒤에 웬 바싹 마른 나뭇가지 같은 사람이 하나 사무실에 찾아왔다더라.
마치.
지금처럼.
“대본, 꼼꼼히 잘 봤나 본데.”
“제가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일’이라. 그럼 기대해도 좋겠군.”
강선은 고개를 끄덕였고.
유정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은 가운데.
수철은 정말 ‘김석진’처럼 위태롭게 비척거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더니 대본을 펼쳤다.
손때가 잔뜩 묻고.
귀퉁이가 해진 대본.
의도된 연출이라면 실로 교과서적이다.
배우가 감독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선 저만한 것도 없을 테니.
하지만.
오강선은 그리 만만한 감독이 아니다.
“긴말 안 하고 바로 시작하지.”
이제 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눈을 빛내며 수철을 재촉했고.
수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씬 넘버 38.조감독.”
“네, 감독님.”
유정은 수철을 힐끗거리다 곧장 지문을 읽어 내려갔다.
“낮. 낡은 다세대주택. 뉴스 소리가 드문드문 들리는 복도에서 고함 소리가 울려 퍼진다.”
“김석진 씨! 안에 있죠? 지금 TV 보고 있지? 월세 벌써 5개월째 밀렸어! 보증금 다 깐 지가 언젠데! 당신, 계속 그렇게 버틸 거야?”
“거기 사는 양반 죽은 거요, 산 거요? 요즘 들어 통 보이질 않네.”
모종의 사건으로 불명예 퇴직 후.
가족들과도 생이별하게 술에 절어 지내는 퇴직 형사 ‘김석진’.
“카메라 창문 타고 롱테이크로 이동. 방 한구석엔 소주병이 잔뜩 쌓여 있고 폐인의 몰골로 멍하니 바닥을 주시하던 김석진이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문을 바라본다.”
그리고.
이제 수철이 대사를 칠 시간이었다.
수철은.
언제 준비했는지, 마치 ‘김석진’처럼 퀭한 눈으로 지문을 읊는 유정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또…… X랄이네.”
힘 하나 없는.
무저갱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동굴 같은 목소리.
유정이 놀라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삼킨 것도 잠시.
“난들…… 안 내고 싶겠어……?”
더더욱 깊은 목소리가 수철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 나오더니.
시퍼런 안광이 두 사람을 바라본다.
그리고 턱이 떨렸으며.
앙상한 손가락이 후들후들.
위태롭게 진동했다.
마치.
정말 알코올 중독자라도 된 것처럼.
‘이거지.’
강선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강선은 자신의 예상이 맞아떨어졌음을 깨달았고.
‘……또 감독님이 이겼군.’
유정은.
늘 그래왔듯.
강선의 확신 앞에선 자신의 걱정이 늘 기우로 끝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기 시작했다.
“…….”
결국.
단 두 개의 대사뿐이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듯.
강선은 유정에게 더 이상 할 필요 없다며 손을 들어 보인 뒤.
탁.
대본을 덮고.
수철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자고. 같이.”
그것으로.
수철의 배우 복귀가.
전격 결정되었다.
* * *
지플릭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멀티미디어 플랫폼이 한국 진출을 선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게 뭔데?”
“매달 돈 내면 거기 있는 모든 프로그램을 다 공짜로 볼 수 있는 거라던데.”
“그게 돈이 되겠어? 미쳤다고?”
“VOD 잘 보고 있는데.”
처음에는 대체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컨텐츠가 많으면 모를까.
지플릭스가 한국 시장 진출을 선언하며 공개한 프로그램들은 하나같이 다 마이너하거나, 한국 시청자들이 원하는 게 많지 않았기 때문.
하지만.
“미친, 오강석 영화 독점으로 공개한다고?”
“무조건 봐야지. 그거 언제 들어온대?”
오강선의 신작 <협조>라는 작품이 지플릭스에 독점 공개된다는 사실과.
“최도윤? 해외 진출 노리는 건가?”
“시기상조지. 할리우드 갔다가 망하고 온 배우가 몇인데.”
“할리우드 노리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겸사겸사겠지.”
그 주인공으로 도윤이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이 들려오자.
어쨌건.
긍정적인 반응이 주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믿고 보는’ 최도윤이 되었으니까.
“‘지플릭스’? 그거 진짜 가능성 있는 거야?”
“있든 없든 해보는 거죠. 제가 보기엔 괜찮아 보이기도 하고요.”
덕분에 석준은 혹한 표정이다.
안 그래도.
석준은 이번에 숨 엔터와의 계약 만료 끝에 이엔 엔터로 전격 이적했고, 곧장 의욕 충만한 상태로 차기작을 찾아 나서고 있었던 것.
도윤이 말했다.
“<협조> 합류하시게요?”
“아니. 이번에 영화는 패스. 시기가 애매해서.”
“아쉽네요.”
“솔직히 마음에 드는 배역은 이미 다 차기도 했고, 다음에 노려봐야지. 난 <그들의 세상> 주연 생각 중이라.”
“아, 강 작가님 작품.”
강미나 작가의 신작.
<그들의 세상>.
이번에는 스릴러적인 요소와 로맨스를 적절히 섞은 드라마라던데.
역시나 ‘믿고 보는’ 강미나가 되었으니.
느낌이 나쁘지 않다.
도윤도 시놉시스를 읽어본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고 말이다.
물론.
미나는 공언했던 대로 도윤을 최우선으로 노렸지만…….
‘오 감독님 작품을 한다고? 그럼 내가 놓아줘야지. 잘 가.’
저렇게 쿨하게 놓아준 바 있었다.
너무 쿨해서 도윤조차 놀랄 정도였지만.
그만큼 오강선의 명성이 대단하다는 증거.
“근데 이 팀장님…… 아니, 선배님 합류 사실은 아직 일반 사람들은 모르지?”
“네. 아직은요. 업계에만 소문이 났고, 아직 보도가 안 나갔으니까요.”
이런 가운데.
수철이 <협조>의 또 다른 주인공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은 아직 엠바고가 풀리지 않았다.
지플릭스와 협업하는 제작사는 아마-
이 사실을 주요 마케팅 포인트로 활용할 생각인 듯했다.
“아무튼 잘됐다. 솔직히, 다시 돌아오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는데.”
“정말 잘된 일이죠.”
여하튼.
각고의 노력 끝에 수철은 강선의 마음에 들어 ‘김석진’ 역을 차지했고.
이제 도윤과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불명예 퇴직한 알코올 중독 전직 형사.
조직이 버린 기구한 사연의 전직 해결사.
두 남자가.
공통의 적을 향해 달려가는 느와르 액션 영화.
결과가 어떨지는 예측할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배우로서 너무도 기대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복귀한 수철이 어떤 연기를 펼칠지도 궁금하고 말이다.
여하튼.
지금쯤 소속 배우 두 명이 무려 오강선 감독 작품에 주연으로 합류했으니.
동민의 입꼬리도 하늘로 승천하고 있을 테지.
회사가 점점 커지고 있으니까.
아닌 게 아니라.
수철의 복귀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도윤, 수철.
이 두 사람이 벌어들이는 돈이 정말 어마어마할 테고.
이를 바탕으로 회사는 확장을 시도할 것이다.
‘다른 사업도 이야기하셨던 것 같은데.’
뜬금없이 아이돌을 키우겠다고 나서는 게 아닌 이상에야.
뭐든 환영이다.
어떻게 되든.
회귀 전, 자신의 오만과 실수로 완전히 사라져버린 과거보다는 나을 테니까.
“근데 도윤아. 나 이번에 알았는데 너랑 같이 일하는 스타일리스트 대단한 애더라.”
“민주요?”
“어. 어렸을 때부터 꽤 유명했다던데, 동대문에서. 나 이번에 이적하면서 스타일리스트랑 매니저 같이 왔잖아. 근데 우리 스타일리스트가 민주를 보더니 인사를 90도로 하더라고.”
90도 인사.
도윤은 그 말에 미간을 좁혔다.
“민주한테요?”
“응. 들어보니까 그 바닥에서는 알아준다던데. 왜 스타일리스트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그 바닥이요?”
“몰랐어? 패션 쪽에서는 엄청 유명하다던데. 국내 유명 디자이너들이랑 되게 친하다더라고.”
친한 건 그렇다 치자.
도대체.
어떻게 친해진 거지?
‘아. 동대문.’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 일을 도우며 동대문에서 옷과 관련된 눈썰미를 익혔다던 민주의 말이 떠오른다.
역시.
알면 알수록.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하긴.
도윤이 아직 주연급이 못 된 상황에서 고가의 브랜드를 협찬해 오던 수완이나.
두칠 건도 그렇고.
가는 곳마다 아는 사람이 있던 인맥 덕분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렇게 남의 입에서 구체적으로 칭찬을 들으니 또 색다른 느낌이다.
“어쩐지, 우리 뭐 할 때마다 너 협찬 옷 입는 거 보고 도대체 어떻게 하나 싶었는데, 이런 비밀을 숨기고 있었구만?”
도윤은 대답하는 대신 피식 웃다가.
똑똑.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빠. 저 들어가요.”
민주가 연습실에 들어왔고.
민주의 손에는 예의 그 코디북이 들려 있었다.
“시간 되세요?”
“어, 응?”
“이번 영화 코디 견적 좀 내러 왔어요. 그쪽 의상팀이랑은 이야기 대강 끝냈고, 이젠 오빠 의견이 필요해서요. 아, 대본은 다 봤어요.”
늘 그렇듯.
심드렁한 목소리였지만.
“한…… 대충 밤까지는 해야 할 것 같은데, 오빠 이거 다음에 스케쥴 없죠?”
“……그, 그렇긴 한데. 아냐. 없어. 당연히 없지.”
“잘됐네요.”
오늘따라.
꽤나 공포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