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92화 (92/200)

92.팬이었거든요

수철이 당황해 막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입을 뻐끔거리던 그때.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강선이 수철에게 묘한 눈빛을 던졌다.

“기억나나? 내 제안, 거절했던 거.”

“…….”

모를 리가 있나.

그때 강선은 막 명성을 얻어가던 감독이었고.

수철은 그때 배우 생활을 접기로 결심한 시기였었다.

때문에 강선의 출연 제안을 거절했다.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까 봐.

정확히는-

자신으로 인해 강선이 웃음거리가 될까 봐.

“참 아쉬웠었는데. 궁금하기도 했고. 내 각본이 마음에 안 든 건지, 아니면 정말 배우 생활을 접으려 한 건지.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거지만, 전자였으면 오히려 기뻤을 텐데.”

수철이 배우 생활을 접지 않았다면.

더 기뻤을 거라는 그 말.

수철은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아쉬워서일까.

아니면 이 갑작스러운 상황이 당황스러워서일까.

“그래도, 소속 배우가 자기 팀장한테 아부하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는데.”

강선은 도윤을 바라보다 다시 수철에게 시선을 옮겼고.

“어떤가? ‘김석진’ 역.”

나지막한 목소리로.

무려 배역을 제안했다.

“……제, 제가 말입니까?”

“그래.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이수철 배우’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도 같은데.”

강선은 회상했다.

결국 수철이 밝힌 거절 의사를 듣고 아쉬워했던 자신의 모습을.

주변 사람들은 이미지 다 망친 배우를 도대체 주연으로 왜 쓰려고 하는 거냐며 뜯어말렸지만.

지금 그렇듯, 수철은 한번 꽂힌 배우에게선 배우가 거절하지 않는 한 포기하는 법이 없었고.

끝까지 구애했었다.

수철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할 만큼.

그런데 그 제안은.

10년이 지난 이 순간, 양미리가 구워지는 이 낡은 포차에서 다시 수철에게 돌아왔다.

“솔직히, 오늘은 도윤 씨한테 제안한 자리라서 굳이 묻진 않았지만…… 그래도 반가워서 근황 정도는 묻고 싶었지.”

강선은 도윤을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그랬는데 이렇게 도와줄 줄이야.”

도윤은 대답하는 대신 씩 웃으며 수철을 바라봤다.

도윤은 알고 있었다.

수철이, 다시 연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걸.

동민이나 도윤이나.

한두 번 물어본 게 아니었다.

다시 연기하고 싶지 않냐고.

처음에는 단호하던 수철.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그 대답이 두루뭉술해져만 갔고.

도윤은 얼마 전 자신에게 들어온 시나리오 하나에 푹 빠져 있던 수철의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그냥 팀장으로서 한번 살펴보는 게 아니었다.

도윤이 뭐라 말하지도 않았는데.

마치 불장난을 하다 들킨 어린애처럼 허둥대며 묻지도 않은 변명을 줄줄 늘어놨었으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시나리오는 읽어봤나?”

“네. 하지만…….”

“한번 생각해 보라고. 참, 조감독아. 우리 조감독이 보기엔 어때?”

유정은.

갈등하던 수철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제가 아는 이수철 배우님의 연기력이라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비주얼은 뭐…… 훌륭하죠.”

“그치? 나처럼 좀 낡긴 했는데, 나랑 다르게 고급스럽게 낡았어. 잘 어울릴 것 같아.”

연기가 받쳐줘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일단, 강선이든 유정이든 오케이한 셈.

그럼 남은 건.

수철의 선택뿐이다.

다만.

강선은 이 자리에서 강요하지 않았다.

수철이 아직 카메라 앞에 설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이수철 정도가 오케이해 준다면…….’

강선은 감독이다.

그래서 영화의 마케팅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한때 시대를 풍미한 이수철이라는 배우가 10년 만에 복귀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마케팅에 엄청난 도움이 되리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물론 마케팅 때문에 수철에게 이런 제안을 한 건 분명히 아니다.

자신이 기억하는 수철의 그 연기력이라면.

충분히…….

‘김석진’ 역을 차지하고도 남을 테니까.

“한잔 받지.”

강선은 일단 소주병을 들었다.

그리고 수철은.

머뭇거리다 결국 소주잔을 내밀었다.

쪼르륵…….

수철은 찰랑거리는 소주잔을 바라보다.

쭉,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오늘따라.

소주가 쓰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 * *

“후우.”

거의 다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게 할 목적이라면.

도윤은 성공한 셈이다.

수철은 방금 막 편의점에서 사 온 담배를 뜯어 입에 물고 불을 당긴 뒤 깊숙이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내뱉었다.

니코틴이 핑- 돌더니.

찾아오는 약한 어지러움.

수철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도윤에게 담뱃갑을 내밀었다.

“피울래?”

도윤은 담뱃갑을 가만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요.”

치이익…….

이어서 도윤 역시 불을 당기고 연기를 내뱉었다.

“후우.”

도윤은 완전히 담배를 끊었지만.

오늘만큼은 다시 피워야 할 것 같았다.

수철을 무척이나 혼란스럽게 만든 것에 대한 속죄라고 해야 할까.

“…….”

“…….”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가만히.

각자의 담뱃불이 필터까지 붙을 무렵.

치익…….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 수철이 물었다.

“이유라도 묻자.”

추궁의 눈빛보다는.

정말 궁금해서 그런 것 같았다.

“왜 그랬냐.”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라구요.”

“…….”

치익.

다시 담배 한 대에 불을 붙인 수철은.

‘후우’ 연기를 내뱉은 후 말을 이었다.

“후회라…….”

수철의 눈은.

10년 전의 그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10년 전만 해도 대중들이 모르는 온갖 불합리한 일들이 벌어지던 시기.

특히, 수철의 소속사가 그랬다.

사장은 조폭 출신에.

출연료를 떼어먹기 일쑤고.

일신의 안위를 위해 배우가 거부하는 작품에 출연시키기 일쑤.

인기 배우였던 수철도 피해갈 수는 없었고.

결국.

스토리는커녕 배우들의 분장조차 우스꽝스러웠던 SF 영화 <사이버 러버>에 출연했다가 커리어가 끝장났다.

이후 배우를 그만두겠다고 말하자 소속사는 소송을 걸었고.

수철은 아주 긴 싸움 끝에 소송에서 승리했지만.

마음은 갈기갈기 찢겨.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후 배우에 대한 미련을 접었고.

여기까지 왔다.

물론 종종…….

다시 배우를 한다면 어떨까, 생각도 해 봤지만.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오늘.

도윤이 수철의 마음에 기어이 불을 당겨 버린 것이다.

지금.

수철이 든 담배에 불이 붙은 것처럼.

“솔직히, 팀장님이 단호하게 이야기했으면 저도 안 그랬겠죠.”

그래.

맞다.

다시 하고 싶었다.

배우가.

하지만 두려웠다.

사람들이 괴작 <사이버 러버>에 출연해 충격적인 모습을 보인 ‘이수철’로 기억할까 봐.

“근데, 10년이나 흘렀잖아요.”

도윤은.

자신의 10년을 떠올렸다.

10년.

인고한 끝에.

다시 기회를 얻기까지 걸린 시간.

물론 그 기회를 쓰기도 전에 차에 치여 회귀했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을 겁니다.”

“10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게 있지.”

“전 괜찮을 것 같은데요.”

도윤이 피식거리며 말을 이었다.

“미중년 이수철, 화려한 복귀. 어때요?”

“낯뜨겁다.”

“해보는 거죠. 되든 안 되든.”

“헛바람 들까 그래.”

그러다 안 되면.

또 웃음거리가 될 텐데.

야심차게 복귀했지만 결국 각인된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한 배우로.

어쩌면.

그 때문에 지금 하는 일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지.

만나는 사람들이 다 이 바닥 사람들인데.

“선택은 팀장님 몫이지만, 전 팀장님이 다시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왜?”

“팬이었거든요, 이수철 배우.”

수철은.

물끄러미 도윤을 바라봤다.

동민이 데려와서.

자신이 트레이닝시킨 배우.

물론 트레이닝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재능 넘치는 녀석이지만…….

그런 녀석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 팬이었다고.

“후우.”

수철의 입에서.

한숨인지.

담배 연기인지.

구분되지 않을 무언가가 뿜어져 나왔고.

“들어가자. 감독님 기다리시겠다.”

수철은 아직 결정하지 못한 채 담배를 끄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들어가기 전.

터엉.

아직 열일곱 대나 남은 담뱃갑을 쓰레기통에 넣은 뒤 미련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 * *

도윤의 캐스팅 소식이 아직 보도된 건 아니지만.

이 바닥이 워낙 좁은지라 며칠 지나지 않아 업계에서는 소문이 쫙 퍼졌다.

오강선이 2년 만에 복귀하고.

그 복귀작 주인공이 최도윤이라더라.

심지어.

일반적인 한국 영화 제작 시스템에서 만들어지는 영화가 아니라.

해외 자본, ‘지플릭스’의 투자를 받아서 만들어지는 생소한 제작 방식의 영화라더라.

사실.

해외에서 급성장 중인 지플릭스가 한국 시장에 진출한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려왔다.

하지만 현재는 아직 OTT의 가능성이 저평가받는 시기.

오히려 매달 그 돈을 내고 볼 사람이 몇이나 되며, 그런 곳에서 얼마를 투자하든 스크린에 걸지도 못할 영화를 왜 만드냐는 이야기가 많았다.

“미친 거지. 스크린에 안 걸고 무슨 지플릭스? 거기 독점이라던데.”

“돈 따위는 이제 신경 안 쓴다 이건가?”

“모르지. 오강선 감독이니까 그런 걸 수도 있고.”

아무튼.

지플릭스가 한국 시장 진출의 교두보로 오강선 감독을 택한 건 확실한 사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지플릭스는 시나리오를 보고 픽한 게 아니었다.

오강선에게 어떤 시나리오도 상관없으니 일단 접촉부터 하고 본 것.

오강선은 이를 받아들였고.

그 결과, <협조>의 시나리오가 탄생했다.

거기에 최도윤의 잠정적 캐스팅은 덤.

덕분에.

이번에도 거절당한 제작자들은 또 한 번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저번처럼 군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오강선 감독.

“이러면 못 잡지.”

“포기해야지. 어느 미친 배우가 오강선 제안 거절하고 다른 작품을 해?”

“몸값 또 오르겠네. 맞아. 이번 거 지플릭슨가 뭔가 하는 곳에서 한다면서? 그거 공개되면 이제 해외 가는 건가?”

“해외 진출이 어디 쉽나.”

과연.

세상 어느 배우가 오강선의 제안을 뒤로하고 다른 작품을 고르겠는가?

여하튼.

도윤이 강선과 함께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몇몇 제작자들은 다급히 대체 배우를 찾아 나서기도 했고.

몇몇은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혹은 제작사의 요청으로 지속적인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지만.

도윤은 이미.

모든 결정을 마친 뒤다.

“‘지플릭스’라…… 알아보긴 했는데, 아직 시기상조 아닌가?”

“아마 크게 성장할 겁니다.”

동민은 도윤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경영학과 출신이라고 지금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이용자 수가 매년 급격히 늘고 있고, 이미 해외 각국에서 서비스를 시도하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한국에 진출하지 말란 법도 없죠.”

도윤은 알고 있다.

지플릭스가 한국에 진출하고.

OTT 시장을 모조리 장악해 버린다는 사실을.

그런 모습에 위기감을 느낀 지상파 방송사들과 통신사들이 국회에 일명 ‘지플릭스 규제’를 요청한다는 사실까지도.

쉽게 말해.

도윤은 선구자가 되길 택한 것이다.

그것도, 오강선 감독이라는 거장의 손을 잡고.

“확실히…… 도윤이 너 정도면 관객들이 ‘지플릭스’ 자체에 관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 거기에 해외에도 모두 공개되는 영화니까…….”

그리고 동민 역시 지플릭스의 가능성을 엿본 듯.

나쁘지 않은 듯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사실.

이젠 도윤이 뭘 하든 무조건 밀어줬을 테지만 말이다.

때문에.

지금 이 자리는 도윤의 결정보다는.

수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이 팀장…… 수철이는 좀 어때?”

“아직 고민 중인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까.”

동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수철의 의지를 막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물론 수철은 이엔 엔터에 없어선 안 될 존재지만.

대표와 팀장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수철이 복귀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동민은 수철의 배우 시절을 지켜본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그래서.

수철이 이 기회를 꼭 잡았으면 했다.

“그래서 오케이하면 사람부터 뽑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근데, 수철이가 하겠다고만 하면야 그게 무슨 문제겠어.”

사실.

수철 몰래 봐둔 대체자가 몇 있긴 하다.

하지만 당장 연락해서 데려오는 건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수철의 복귀 여부다.

“어떻게 될 것 같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충분히 갈등하는 걸 보면 가능성이 없진 않습니다.”

“그래, 복귀만 한다면…… 전사적으로 지원해 주고도 남지. 그리고 스크린에 걸리는 게 아니라 지플릭스라는 곳을 통해서 복귀하는 거니까 상대적으로 부담도 적을 테고.”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스크린에 걸리는 영화였다면.

수철은 지금쯤 거절 의사를 밝혔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그래서 도윤은 수철이…….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 한편으로-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더 이상 설득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 정도 상황에서도 거절하는 사람을 붙잡고 괴롭히는 것도 할 만한 짓은 아니니까.

여하튼.

여기 있는 두 사람이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건 확실하다.

수철의 배우 복귀.

과연.

지이이잉.

그때 울리는 도윤의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은 ‘이수철’이었고.

“네. 팀장님. 네, 지금 같이 있습니다. 네. 그럴게요.”

전화를 끊은 도윤에게 동민이 물었다.

“뭐래?”

“지금 온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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