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지금 자리에 같이 있거든요
배우와 감독, 혹은 배우와 PD의 미팅은 다음과 같은 절차를 거친 뒤 진행된다.
배우가 시나리오, 시놉시스를 체크하고.
소속사와 제작사가 몇 가지 사전 협의를 마친 뒤.
이후 일정을 조정해 자리가 마련된다.
하지만 오강선의 경우 조금 달랐다.
그는 국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거장이며, 해외에서도 명성을 떨친 사람.
그래서 보통.
저런 과정들을 모조리 무시해도 될 만한 사람이다. 그냥 배우에게 전화를 걸고, 한번 얼굴이나 보자는 식으로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야 할까.
심지어 그 정도 명성이라면 배우들은 모든 스케줄을 제치고 달려간다.
그게 바로 거장이 지닌 힘이자 명성이다.
다만.
이번 경우는 조금 달랐다.
오강선의 미팅 요청이 있었고.
독특하게도-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자리에는 강선과 도윤.
그리고 수철과 유정이 앉았다.
“한잔 받지.”
쪼르르륵.
도윤은 두 손으로 강선이 따라주는 소주를 받고 고개를 돌린 뒤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강선에게 소주병을 넘겨받아 공손히 술을 따르고, 그가 잔을 비우는 것까지 지켜본 뒤에야 양미리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맛이 어때?”
“좋습니다. 서울에 이런 맛집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정말이다.
이 묵직한 자리가 주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
미각으로는 충실하게 잘 익은 양미리의 고소한 감칠맛을 느끼고 있었다.
도윤의 대답에.
강선이 만족스레 웃었다.
“KAMA(Korean Academy of Movie Arts) 시절에 동기들이랑 자주 오던 곳이지. 벌써 20년째 하는 집인데, 그래서 인테리어가 좀 낡았어. 내 얼굴처럼.”
생각지도 못한 농담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수철이 당황하고 고민하던 그때.
“제가 보기엔, 세월의 멋스러운 풍미가 더해진 것 같습니다.”
도윤이 명답을 내놓았다.
수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내 얼굴도 그렇다면 다행이고.”
생각지도 못한 대답인지 강선도 씩 웃었다.
그리고 유정은.
‘또 저러시네.’
배우랑 처음 만난 자리에서 꼭 저렇게 말하고 반응을 지켜보는 강선의 습관을 떠올리며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여하튼.
술자리는 이제 막 시작되었고.
본론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도윤은 구태여 오늘 만난 목적을 성급하게 꺼내지 않았다.
이 작품을 꼭 하고 싶다는 열의를 보여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겠지만-
어째서인지.
오강선이라는 감독 앞에서는 다급함을 드러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차올랐다.
듣기로는…….
‘종잡을 수 없다고 하던데.’
강선은 현재도, 회귀 전에도 이미 거장으로 불리던 감독이다.
그래서 강선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촬영 스타일과 성격, 촬영장에서의 일화 등이 꽤 널리 알려진 편.
그렇기에 도윤은 지금 이렇게 나름대로 판단을 내리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매력을 굳이 깎진 않았다.
“필모를 보니까 영화는 한 편 찍었던데. <기적의 레시피>였지?”
“네, 그렇습니다.”
“창욱이, 실력 있는 친구지. 걔도 KAMA 시절에 소문 자자했거든.”
흐뭇한 웃음을 짓던 강선이 물었다.
“이 자리 나온 거 보면 앞으로도 영화 쭉 찍을 생각은 있는 것 같고…… 시나리오는 어땠나? 아직 평을 못 들었는데.”
“좋았습니다. 진심으로요.”
“구체적으로는?”
“표현하시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명확했고, 대립구도가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두 남자 주인공이 지닌 각각의 매력이 좋은 시너지를 발휘한다는 점이 가장 좋았습니다.”
오강선이 고작 일주일 만에 구체화시킨 시나리오.
그러나 그 시나리오는 강선의 머릿속에 거의 5년을 표류하던 시나리오다.
일주일 만에 나올 수 있었고.
그 일주일 만에 나온 시나리오가 도윤을 만족시킬 수 있었던 건 그 이유 때문.
실제로 도윤은 지금 눈앞의 거장이 자신에게 직접 묻는다는 권위적인 상황 때문에 이렇게 답한 게 아니라, 정말 매력적인 시나리오라 생각하고 있었다.
“알코올 중독 퇴직 형사와 조직에게 철저히 배신당한 남자의 조합,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던데요.”
그리고 도윤이 제안받은 배역은 저 두 명의 주인공 중 조직으로부터 배신당한 ‘주강훈’역.
강선 역시 도윤이 지금 꺼내는 감상이 단순히 립서비스가 아님을 직감했다.
“원래는 <무간도> 같은 느낌을 원했지. 하지만 생각하는 사이에 비슷한 게 나와버리더라고. 명색이 그래도 ‘거장’인데 괜히 후배 감독 건드릴 필요는 없잖아?”
“말씀하신 대로 그런 쪽으로 갔어도 좋은 시나리오가 됐을 것 같습니다. 저도 아쉽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건 확실히 마음에 든다는 건가?”
“네. 정말 마음에 듭니다. 꼭 하고 싶을 만큼요.”
도윤은 진심이었다.
오강선이 자신에게 제안했다는 이유도 컸지만.
이 시나리오는 분명히 매력적이다.
다른 시나리오가 다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심지어, 성공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시나리오들조차.
하지만 그 대답으로는 부족한 듯했다.
“아, 그리고 이야기 들었겠지만, 이거 ‘지플릭스(Gflix)’에서 투자받고 진행하는 영화야. 스크린에 올라가는 영화가 아니라는 뜻이야.”
“예, 숙지했습니다.”
지플렉스.
아직 한국 시장에 진출하지 않았지만.
몇 년 내로 전 세계 OTT(Over-the-top media service) 시장을 장악할 공룡 플랫폼.
당연히 도윤은 지플릭스의 존재를 알고.
지플릭스가 이후 엄청난 영향력을 떨치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오강선이 지플릭스의 투자를 받았다는 사실도 이미 예전에 알고 있었다.
다만.
그때의 시나리오와.
지금의 시나리오는 다르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솔직히, 그때 실험적으로 지플릭스에 런칭시킨 영화보다 시나리오가 훨씬 좋은 느낌이다.
“괜찮겠나? 일반적으로 스크린에 걸리는 영화가 아니야. 아마 기존 제작사나 배급사가 겐세이…… 아니, 어깃장을 놨으면 놨지, 환영하진 않을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플릭스는 앞으로 더욱 성장할 거라 생각합니다.”
시원시원한 대답이다.
일절 망설임도 없고.
오히려 그래서 자신과 함께하고 싶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듯하다.
강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그리고 그 말에 유정은 속으로 피식거린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시긴.’
유정이 알기로.
강선은 단 한 번도 스스로 쓴 시나리오를 불신한 적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과신이지만.
지금 거장으로 불리며 성공했기 때문에 오히려 확고한 믿음이라 부를 수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처음으로 도전하는 느와르풍의 작품이기에 준비할 게 많겠지만.
걱정은 없다.
“찍었던 작품들은 대부분 봤어. 전체적으로 느낌이 좋더군. 뭐랄까…… 음, 칭찬은 많이 들었을 테니까 이런 걸 묻고 싶던데. 혹시 말이야, 평소에 배역 연구를 어떻게 하지?”
그 물음에 도윤은.
“대본을 보고 또 봅니다.”
실로 교과서적인 답변을 내놓았고.
오히려 그 대답에 강선이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는데. 막 연기 시작한 애들도 안 하는 대답을 할 줄은 몰랐어.”
강선은 흥미롭다는 듯 도윤을 바라봤다.
“보통은 그렇거든. 내가 동네 아저씨 같아도 거장이라고들 부르잖아?”
그리고 도윤은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자신을 스스로 ‘거장’이라 칭하는데.
저렇게 격의 없이 느껴지는 건 처음이다.
약간의 뻔뻔함도 엿보이고 말이다.
“웃음 참는 것 같은데.”
“죄송합니다.”
“아냐. 웃겼으면 됐어. 이쯤 되면 사람들이 내가 아재개그를 쳐도 웃어주거든. 뿌듯하구만.”
강선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아무튼, 어떤 배우들은 내 앞에서 자기 연기법을 무슨 논문 수준으로 설명하려 하거든. 이유가 뭔지는 대충 알겠는데, 가끔 보면 오히려 초라해 보일 때가 있어. 그래서 난 도윤 씨 대답이 마음에 드는데. 담백해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내가 해야지. 덕분에 양미리 먹을 명분도 생겼잖아? 우리 조감독은 양미리 별로 안 좋아해서.”
그때 유정이 발끈했다.
“회식 때마다 양미리만 1년을 먹으면 누구나 그럴걸요.”
“이거 봐. 내가 무서워서 어디 감독 하겠어?”
건수 잡았다는 듯 낄낄대는 강선과.
툴툴거리면서도 양미리를 하나 집어 소금에 찍은 뒤 입에 쏙 집고 와작와작 씹는 유정.
나쁘지 않은 분위기다.
이런 가운데.
‘그럼 된 건가?’
수철은 흘러가는 좋은 분위기에 당장에라도 동민에게 문자를 보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다른 감독도 아니고.
오강선이다.
2년의 공백을 깨고 드디어 용이 기지개를 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용과 함께하는 주연 배우가 바로 도윤이라니.
“좋아. 촬영 시작은 빠르면 4월. 늦어도 8월까지는 모두 끝내는 쪽으로. 어때?”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케이. 그럼 주연 한 명은 정해졌네. 잘해보자고.”
“잘 부탁드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담백한 제안과 담백한 대답이 오가며 도윤의 영화 출연이 확정되었고.
수철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참. 이거 제목, <협조>야. 직관적이지? 더 긴 제목도 있었는데, 요새는 짧고 간단한 제목 아니면 관객들이 안 본다더라고. 제작사에서 지랄하면 그대로 갈 생각이었는데, 관객들이 원한다니까 뭐.”
“좋은 것 같습니다. 내용도 대략적으로 파악이 가능하고요.”
“그치. 그리고 이번에는 힘 쫙 빼고 찍어보려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볼 수 있게. 거기에 도윤 씨 비주얼이 더해지면 금상첨화겠지?”
강선의 말마따나.
도윤이 읽어본 <협조>의 시나리오는 강선이 평소 추구했던 예술성이나 미장셴의 강조와는 조금 동떨어진, 상업적인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이번엔 그래서 더 좋았다.
도윤도 느와르풍의 영화를 한번 찍어보고 싶기도 했고 말이다.
거기다.
무려 오강선의 작품이다.
회귀한 도윤도 어떻게 참여할 만한 타이밍을 못 잡은 감독.
어지간해서는 오디션보다는 주변의 추천과 자신의 눈으로 출연 배우를 결정하기에, 도윤조차 끈을 만들지 않고서는 출연 기회 자체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놀라운 기회가 찾아올 줄이야.
“흠, 그럼 ‘주강훈’ 역은 정해졌고.”
숯불에 잘 구워진 양미리 하나를 집어 맛있게 씹은 강선은 유정을 바라봤다.
“이제 남은 건 ‘김석진’ 역인가?”
“‘김석진’뿐만 아니라 나머지 배역들도 필요하죠.”
“그거야 뭐, 하고 싶어 할 녀석들은 널렸지. 내 마음에 드느냐의 문제고.”
강선이라서일까.
자신감이 넘치는 말임에도.
전혀 오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하튼.
저 말에 따르면.
도윤은 강선의 마음에 든 셈.
‘역시, 도윤이야.’
수철은 기뻐하는 한편.
마음 한구석에서 솟아오르는.
‘부러움’이라는 감정에 당황했다.
‘왜?’
배우에 대한 미련은 버린 지 오래다.
아니, 버렸다고 생각했다.
잘 나가던 이수철이라는 배우의 커리어를 끊어버렸던, 소속사의 강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출연했던 영화.
그 영화 이후로.
수철은 회의감을 느끼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배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잊었다고 생각했다.
그저, 이제는 소속 배우들을 지원해 주고 뒤에서 묵묵히 일만 하면 된다고 느꼈는데…….
왜.
이제 와서 부러운 걸까.
‘아니야.’
수철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벌써.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대중들은 수철을 거의 잊었고.
수철도 이제 더 이상 카메라 앞에 설 자신이 없다.
꿈틀거리는 욕망을 애써 억누르며.
수철은 그렇게 치미는 부러움을 외면했다.
“‘김석진’ 역은 제가 한번 연락해 보겠습니다. 안 그래도 조준석 씨랑 얼마 전에 만났었거든요.”
“그래? 뭐라고 하든?”
“감독님 신작 언제 시작하냐는데요.”
유정의 대답에 피식거리는 강선.
“뒤에서 그렇게 욕을 해놓고 콩고물은 처먹겠다 이거지. 적당히 받아주다가 연락 끊어. 그런 새끼들이랑은 오래 못 가지.”
“네.”
“아. 도윤 씨. 혹시 ‘김석진’ 역에 추천할 만한 배우 있나? 알다시피, 오디션은 안 여는 주의라서.”
추천.
강선은 이런 식으로 출연진을 구성한다.
오디션을 열면 보석을 찾아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번거롭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윤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있습니다.”
“그래? 누구?”
“지금 바로 부를 수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나야 좋지. 두 번 안 나가도 되니까. 양미리 더 시킬까? 조감독아, 한 2인분만 더 시켜라.”
“아뇨, 안 그러셔도 됩니다.”
도윤은 씩 웃더니 옆에 있던 수철을 바라봤다.
“이미 지금 자리에 같이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