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놀라지 말고 들어
흔히들 상상한다.
성공한 ‘거장’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영화나 드라마에 나올 법한 대저택에 가정부를 두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진 않을까?
아니면 고풍스러운 작업실에서 다음 작품을 구상하며 손끝으로 펜대를 돌리고 있진 않을까?
그도 아니면.
자신을 써달라고 찾아오는 배우들의 조아림 속에서 거장의 위치가 주는 우월감을 음미할까?
하지만 그런 수많은 상상들은.
지금 모니터를 바라보는 거장 오강선과 어울리지 않았다.
덥수룩한 수염.
뒤로 질끈 동여맨 긴 머리칼.
입에 물린 담배까지.
3평 남짓한 작업실에서 빛나는 건.
오강선의 눈과 모니터 화면뿐이다.
[제발, 제발 좀! 도대체 왜 그러는데! 알아듣게 말하라고! 그때 그렇게 매몰차게 떠났으면서 이제 돌아온 이유가 뭔데!]
[제발…… 나 좀 놔주라. 나…… 너 보면 미칠 것 같아서 그래…….]
모니터 속의 배우는 연기를 펼치고.
오강선은 드물게도 그 배우의 연기에 집중한 채 몇 번이나 같은 장면을 리플레이시켰다.
그게 한 열 번쯤 되었을까.
덜컥.
“아우, 환기도 잘 안 되는데 담배를 무슨…… 감독님, 그러다 일찍 죽어요!”
문이 열리며 잔소리가 폭풍처럼 쏟아졌다.
이른바 ‘오강선 사단’의 조감독이자.
유일하게 오강선에게 잔소리를 할 수 있는 인물.
“바쁘다. 용건만 말해.”
후우.
오강선이 뱉어낸 담배연기가 모니터 위에서 흩어지고.
치이이이익.
이미 산더미처럼 쌓인 꽁초 위에 꽁초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조감독, 서유정은 그 광경에 투덜거리면서도 손에 들린 비닐봉지에 능숙하게 꽁초 더미를 쓸어 담고 새 재떨이를 턱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한마디 던졌다.
“그러다 칸 가기 전에 폐암으로 돌아가시겠어요.”
“그럼 네가 대신 가든가.”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시긴. 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시면서.”
오강선이 피식거리는 사이.
서유정은 모니터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꽤 오래 보시네요. 마음에 드셨나 봐요. 세 시간 전에 들어왔을 때도 그 배우 영상 보고 계시더니.”
“나쁘지 않더라고.”
“그 배우 계 탔네요. 우리 감독님이 그렇게 말하면 엄청 마음에 들었다는 뜻인데.”
“엄청 마음에 들긴.”
아닌 척해도.
오강선의 눈빛은 여전히 서유정 대신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서유정은 그게 못내 서운한 건지 입술을 비죽이며 탕! 소리가 나게 물병을 올려놓았다.
“뭐야?”
“목 축여가면서 피우시라고요. 세포가 연기에 다 메마르겠어.”
괜한 심술에.
오강선은 굳이 반응하지 않았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대신 손을 휘휘 내저었다.
“바빠. 용건 없으면 가.”
“네네. 근데 하나만 물어보고 갈게요. 다음 작품 언제 하시게요? 아까도 투자사에서 연락 와서 또 징징대던데.”
“2년밖에 안 쉬었잖아.”
“걔들 2년이 어디 우리 2년이랑 같나요. 백날 말해도 모르잖아요. 작품 구상하고 준비하는 데 시간 걸리는 거.”
서유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이미 세 개 이상의 제작사가 서로 눈치를 보며 오강선을 모셔 가려 안달이 난 상황이다.
거장 오강선.
4개 작품에서 무려 3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2년 전 작품이자 가장 최근작인 <도망자>로 베를린 영화제에서 무려 ‘은곰상’을 수상하기까지.
참고로 은곰상은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를린 영화제에서도 대상격인 ‘황금곰상’ 다음으로 꼽히는 상.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으로 추앙받고.
배우들은 오강선의 작품에 출연하기 위해서라면 무급 봉사도 불사하겠다고 말할 정도.
명성이 이 정돈데 제작사에서 가만둘 리 없고, 덕분에 서유정이 말한 것처럼 쉬지 않고 이렇게 제작사에서 연락이 오는 것이다.
감독 명성만으로도 몇백만은 너끈히 모을 테니까.
그러니 제발, 우리가 얼마든 투자할 테니 작품 좀 시작해 달라고.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물론.
기대하고 있기는 서유정도 마찬가지.
제작사의 요청을 귀찮다는 듯 말했지만.
그간 오강선과 10년을 함께했고, 충분히 독립할 능력이 되는데도 2년 동안 서유정이 기다린 건…….
다 이유가 있는 법.
탁.
오강선은 스페이스바를 눌러 영상 재생을 잠시 멈추더니 몸을 돌리고 서유정을 바라봤다.
“넌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냐?”
“그야…… 슬슬 시작하시는 거죠.”
“아까는 우리 2년이랑 그쪽 2년이랑 어떻게 같냐고 말하지 않았나?”
“그거야 뭐.”
서유정은 능글맞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 오강선은 피식거리더니 모니터를 바라봤다.
짙은 감정을 머금은 한 배우가.
떨리는 시선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다.
분명히 젋고-
경력도 얼마 안 되는 걸로 아는데.
이상하게 눈에 밟힌다.
심지어 오강선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마스크임에도…….
“괜찮네.”
탁.
다시 플레이어를 재생시키자.
[그만…… 그만하자고. 우리 충분히 했잖아. 너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냥…… 가슴 속에 서로 묻자, 하나야.]
굳이 모니터를 보지 않아도 절절한 감정이 스피커를 타고 전달된다.
‘역시, 이렇게 나오셔야지.’
서유정은 다시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오강선의 모습에 씩 웃으며.
조심조심, 뒷걸음질쳤다.
10년을 함께하며 경험한 바에 따르면.
지금 오강선의 머릿속에서는 분명히 새로운 시나리오가 떠오르고 있을 것이다.
정확한 증거는 없지만.
직감이 그랬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탁.
플레이어를 정지시킨 오강선의 목소리가 막 문고리를 잡은 서유정의 귓가를 때렸다.
“이 배우 소속사 사장이랑 미팅 잡아봐.”
“네? 갑자기요?”
시나리오도 안 나왔는데.
배우부터 만난다고?
“한 달 내에 아무 때나. 알아서 잡아.”
“네, 그럴게요.”
서유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가던 그때였다.
“아. 시나리오는 한 일주일 걸릴 것 같다. 잡을 거면 가급적 일주일 안으로는 잡지 말고.”
역시나.
오강선이었다.
그리고.
“네, 그럴게요.”
일주일 안에 시나리오를 준비한다는 말에 서유정 역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야말로 그 감독에.
그 조감독이었다.
* * *
성호는 아마.
하와이에서 민주와 했던 모든 내기에서 패배한 것 같았다.
그래서 저렇게 짐을 잔뜩 들고 낑낑대고 있는 거겠지.
“운동이에요, 운동.”
민주는 운동이라고 말했지만.
뭔가 속 시원히 말하지 못하고 끙끙대는 성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쓰럽기도 하다.
여하튼.
회귀 후 처음으로 다녀온 즐거운 해외여행이었다.
모든 근심을 잊고 일광욕과 수영을 즐겼고.
체중 관리 때문에 먹을 수 없었던 음식도 잔뜩 흡입하며 거의 먹방 수준으로 포식했다.
그뿐 아니라, 여행을 떠난 덕분에 경계심을 푼 사람들끼리 눈이 맞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지켜본 것도 쏠쏠한 재미.
스태프들 사이에서 물씬 흐르는 사랑의 기류는 물론.
배우들 사이에서도 그런 게 보였을 지경이니.
‘유준이는 잘했으려나 모르겠네.’
이런 와중에 유준은 절절매다 결국 한올에게 한마디 말도 못 걸고 시무룩한 채 귀국했다.
매번 강아지처럼 쫄랑쫄랑 쫓아다니던 녀석이.
막상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런 말도 못 하는 모습이 의외이기도 했지만.
원래 그런 거 아니겠는가.
관심 있는 사람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법.
그래도.
오늘만 날이 아니니.
앞으로 알아서 잘하겠지 싶었다.
물론 도윤은 한올의 마음에 정작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여하튼 그 뒤로 도윤은 쭉.
아주 푹 쉬었다.
하와이에 다녀온 뒤 가족들과 유럽으로 떠났고.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유럽을 쭉 돌며 편안한 관광을 즐겼다.
해외라 아직 도윤을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선글라스를 쓸 필요도 없었고, 평소처럼 너무 신경 써서 행동할 필요도 없었던 것.
하지만 그보다 더 좋았던 건.
매일매일 신이 나서 웃고 다니는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덕분에 사진도 많이 남겼고.
에펠탑 아래에서 찍은 가족사진은 지금 도윤의 지갑 속에 고이 담겨 있었다.
“헉, 헉. 다 옮겼어요. 와, 진짜 많네요.”
와중에 들려오는 성호의 엄살 소리.
그래도 마냥 엄살이라 하긴 미안하다.
왜냐하면, 보육원에서 지내는 아이들이 쓸 옷과 신발, 각종 책 등 온갖 물건들을 옮겼으니까.
“고생했다.”
“근데 형, 원장님이 되게 고마워하시던데요. 어쩜 이렇게 꼭 필요한 것만 골라서 보내주셨냐고.”
“그러셨어?”
도윤은 피식거렸다.
보육원에서 잠시 지내는 동안 겪었던 불편함들.
아주 어린 시절의 이야기고.
짧은 기억이지만.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남은 기억.
“그리고 너무 감사하대요. 기부자 성함도 끝까지 물어보셨는데 끝까지 대답 안 했어요.”
“잘했다. 앞으로도 말하지 말고.”
“당연하죠.”
이걸로 도윤이 계획했던 보육원 기부가 1차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나머지는 이후 시간을 내서 순차적으로 방문하고 상황을 체크해 볼 생각이다.
그리고 추후 취합해서 기부 현황을 팬카페에 공지할 예정이기도 하고 말이다.
“근데 민주는?”
“아까 애들 좀 보고 온다고 했어요. 올 때 됐는데.”
말하기 무섭게.
민주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텅 빈 상자를 바닥에 턱 내려놓았다.
“다음에 한 번 더 와야겠어요. 애들 클 거 생각하면 사이즈 큰 옷들 더 필요할 것 같은데요.”
장기를 살려 어디서 질 좋은 옷들을 잔뜩 구해왔는데, 그것마저도 부족하다니.
도윤이 고개를 저었다.
“무리 안 해도 되는데.”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죠.”
“그거 총합해서 얼마야?”
“됐어요. 저도 좋아서 하는 건데요. 저도 오빠만큼은 아니더라도 정기적으로 기부하고 그럴까 봐요. 옷 버려지고 그러는 거 보면 되게 아깝고 그랬거든요.”
매사 시큰둥하고, 표정이야 무뚝뚝해도.
민주도 마음이 따뜻한 편이다.
“그리고 애들이 거지는 아니잖아요. 저도 사비 좀 보태서 옷 좀 사려구요. 나중에 쟤들도 메이커 이야기 꺼내면 안 입겠지만…… 그래도 꼬맹이들은 좋은 거 입어야죠.”
“고맙다.”
“고맙긴요.”
민주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지만.
그 모습에 도윤은 웃고 있었다.
자기가 스타일리스트 하나는 제대로 뽑은 것 같아서.
“슬슬 가자. 오늘 저녁 뭐 먹을까?”
“고기요.”
늘 그렇듯, 같은 대답.
도윤은 성호를 보고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넌 살 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왜, 왜요! 10킬로나 뺐는데!”
“그리고 다시 요요 왔잖아. 넌 항상 결과를 꼭 축소하더라.”
“…….”
“됐다. 오늘은 고생했으니까 먹자.”
“역시, 형. 제가 충성하는 거 아시죠? 종신계약!”
“떨어져, 더워.”
“지금 2월인데.”
그렇게 달라붙는 성호와 떼어내려는 도윤이 투닥대던 그때.
“오빠. 또 문자 왔네요.”
“누구한테 온 건데?”
“직접 보세요.”
도윤은 대충 예상하며 휴대폰을 받아들고 내용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슬슬 소문이 퍼져서 잠시 잠잠하나 싶었는데.
[KW 스튜디오 박원후 PD입니다. 이번에 저희 측에서 준비 중인 드라마 <달이 걸린 바다> 주연 제안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휴식하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꼭 한번 모시고 싶은 생각에…….]
잘 알려진 배우의 전화번호는 공공재라더니.
최근에 하도 이상한 전화가 많이 와서 번호를 바꿨는데 어떻게 용케 알고 연락했는지 궁금할 지경이다.
‘실력 좋은 PD라 들었는데.’
다른 배우들로부터 몇 번 들어 알고 있던 이름이라 관심이 동하긴 했지만.
안 그래도.
슬슬 차기작을 고민할 때가 왔다.
또 드라마를 할지.
아니면 다시 영화 쪽으로 고개를 돌릴지.
‘두 달이면 오래 쉬었지.’
도윤은 일단 차에 타서 답장을 보낼 요량으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또 제안 왔나 보네요.”
“어. 그런 내용이더라.”
“형 이제 진짜 슈퍼스타네요.”
도윤이 피식거렸다.
“됐다. 차에 타. 배고프다.”
“마침 저도 그 말 하려고 했습니다. 헤헤.”
신이 나서 뛰어가는 성호를 보며 피식거리던 도윤은 민주와 함께 차에 올랐다.
참고로 오늘은 카니발이 아니라 도윤의 차를 끌고 왔다.
기부하는 게 배우의 의무는 아니고.
둘은 동원될 의무가 없는 거니까.
그래서 운전도 도윤이 하고, 내리는 건 두 사람이 도와줬지만 짐 자체는 모두 도윤이 실었던 것.
“이야, 조수석 풍경 좋네요. 저는 언제 조수석 앉아보나 했는데.”
“그럼 다음에 카니발도 내가 몰게.”
“……형 무섭게 왜 그러세요.”
“왜. 조수석 앉고 싶다면서?”
성호가 벌벌 떠는 사이.
수철로부터 전화가 왔다.
“네, 팀장님.”
-어, 도윤아. 지금 바쁘냐?
“아뇨. 말씀하세요.”
-그래. 그럼 놀라지 말고 들어.
잔뜩 흥분한 듯한 수철의 도윤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지?’
수철은 도윤과 함께 성장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제 도윤이 하도 유명해진 나머지 어지간한 제안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게 되었다고 해야 하나.
원래도 침착한 성격이었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수철의 목소리가 이렇게 떨리고 있다니.
-야…… 도윤아. 오강선 감독이 너 한 번 미팅하고 싶다더라.
“누구요?”
-오강선! 오강선 감독!
아.
그제야 도윤은.
수철이 흥분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강선이라는 이름에.
자신의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것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