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88화 (88/200)

88.속이 확 풀리네

“안녕하십니까, 배우 최도윤입니다.”

도윤의 소감이 시작되자.

모든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다.

도윤처럼 어린 나이에 연기대상을 받은 배우들이 없는 건 아니나-

지금 도윤의 이 수상은.

분명히 놀라운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예상했다고 한들.

대상은 대상이니까.

“올 한 해, 많은 사랑을 주신 덕분에 제가 이런 큰 상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윤이 싱긋 웃는 가운데.

조명 아래 반짝이는 도윤의 미소는 지켜보던 팬들을 감상에 젖게 만들었다.

어느새 <달달한도라떼> 월간 활동량 10위권에 진입한 은성도.

다른 수많은 팬들도.

기다렸던 이 순간을 만끽했다.

“솔직히 어떤 이야기로 시작해야 할지 많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본을 써서 외우는 건 뭔가 취지에 맞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현장의 감동과 수상의 기쁨에 젖은 상황에서 소감을 준비해 보자 생각했습니다.”

도윤은 잠시 말을 멈췄고.

한 명 한 명.

<그 남자의 메모리> 팀과 눈을 마주친 뒤.

“감사합니다. <그 남자의 메모리> 팀. 이건 제가 받은 상이 아니라, <그 남자의 메모리>에서 제가 함께한 분들과 함께 받은 상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소감을 지켜보던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비록.

소감이니만큼 그냥 저렇게 말하는 걸수도 있지만.

사람들은 안다.

도윤이 얼마나 촬영장에서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고, 수월한 촬영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었는지.

그렇기에.

저 말을 의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아울러…… 절 캐스팅해 주신 뒤 배우의 길로 이끌어주신 저희 이수철 팀장님, 제 선택을 전적으로 믿어주신 김동민 대표님께 감사드립니다. 저희 가족들, 어머니, 아버지, 동하, 리나. 사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윤은 고마운 사람들을 빼놓지 않고 언급했다.

“매번 고생하는 저희 최고의 매니저 성호, 그리고 제가 아는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민주. 두 사람에게, 가장 깊은 감사를 보냅니다.”

소감을 듣던 성호는.

울컥한 나머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민주는 그 모습에 피식거리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하여간.

맨날 혼내고.

맨날 개겨도.

둘도 없는 사이다.

“배우는 혼자 일하는 직업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배우 한 명이 카메라 앞에 서서 한 마디 대사를 내뱉기 위해 수많은 분들이 애써주고, 노력합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보이지 않는 그런 노력들 덕이죠. 때문에 늘 그래왔듯, 앞으로도 겸손과 초심을 잃지 않고 노력하며 가슴 속에 남을 수 있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하튼.

그렇게 수상 소감은 마무리되었고.

짝짝짝짝…….

드넓은 강당에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며.

도윤은 드디어 꽃다발과 트로피를 안고 시상대를 내려올 수 있었다.

그야말로.

2015년을 여는 최고의 시작이었다.

* * *

대상 수상.

예상은 했지만.

막상 시상대에 올라가 소감을 이야기하고 박수를 받으니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최도윤! 대상 거머쥐었다!]

[CTBC 연기대상 대상에 최도윤!]

[최도윤, 접전 끝에 대상 영예…… 진정한 전성시대는 이제부터]

[최도윤, 20대 배우의 가파른 성장]

거기에-

놀라운 일이 하나 벌어졌다.

바로, 상 하나 안 챙겨줄 것처럼 굴던 DBS에서 결국 도윤에게 ‘최우수상’을 수상한 것이다.

[DBS, 결국 백기 들고 최도윤에게 최우수상 수상……]

[‘안 줄 수 없었다’ DBS, 최도윤 최우수상 선정!]

대상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시상식에 불참한 배우에게 무려 최우수상을 줬다는 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알던 대로 DBS에 그만큼 작품이 없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최우수상조차 주지 않기에는 도윤의 연기가 너무 뛰어났다는 것.

물론.

팬들은 왜 최우수상이냐며 아우성을 쳤지만…….

사실 시상식에 불참한 배우에겐 예상 이상의 성과다.

오죽하면.

대상을 수상한 배우가 당황한 나머지 자기가 왜 이 상을 받았는지 모르겠다면서 지나치게 솔직한 소감을 이야기하는 바람에.

DBS 관계자가 난리를 쳤다는 소문이 돌 정도.

물론.

대상을 수상한 배우 입장에서도 불편할 것이다.

누가 봐도 도윤이 받았을 상을.

시상식에 불참한 괘씸죄로 자신에게 넘어왔으니.

심지어 수상한 배우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의 시청률은 8% 내외로, 30%를 넘어간 <그 시절의 우리>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래도.

도윤은 소식을 전해듣고도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덤덤한 표정.

중요한 건.

참석한 CTBC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했다는 것이고.

그래서 회귀 후 처음으로 마음껏 취할 수 있었다.

도윤은 시상식 뒤풀이에서 마시고 또 마셨던 것이다.

주는 술을 마다하지 않았고, 오늘만큼은 살찔 걱정을 접고 맛있는 안주를 마음껏 골랐다.

돈 걱정이야 당연히 없었다.

CTBC 드라마국 국장이 법인카드를 주면서 오늘 한번 제대로 긁어보라고 직접 ‘지시’했으니까.

그런 이유로.

“아으…….”

도윤은 회귀 후 처음으로 필름이 끊겼고, 방금 막 일어나 지독한 두통을 느꼈다.

이게 바로 숙취인가 싶었다.

사실.

회귀 전, 사건이 터지고 배우 생활을 접어야 했던 이후로 술에 취한 적이 없었다.

마음을 다잡고.

어떻게든 아등바등 재기하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기여서 취하지 않으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취해서 실수라도 하면-

혹시라도 그때 누군가 알아본다면…….

정말 끝이라 생각했었으니까.

‘내가 다시는 마시나 봐라.’

숙취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으레 하는 덧없는 후회 속에서.

도윤은 주변을 둘러보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왜.

다른 사람들이 있는 거지?

“크어어어어…….”

“큭, 크음…… 아음…….”

“음…… 으히히히히.”

탱크 굴러가는 소리.

숨을 쉬는 건지 마는 건지 의심스러운 소리.

거기다 도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이상한 웃음소리까지.

도윤은 각양각색의 자세로 널브러져 잠들어 있는 다섯 사람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이승원.

유종탁.

한유나.

세 명의 배우와.

강미나.

유재훈.

한 명의 작가, 한 명의 PD.

“아.”

도윤은 그제야 끊겼던 필름 조각을 되찾았다.

[저희 집으로 가시죠! 제가, 5차 쏩니다!]

[우와아아아아아!]

[최도윤! 최도윤!]

[짱도윤! 짱도윤!]

실로.

얼굴이 확 달아오를 만큼 부끄러운 기억이다.

도대체 뭐에 그렇게 텐션이 올랐는지.

이 좁은 투룸 오피스텔에 무려 다섯 명을 끌고 와 이불이며 베개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재워버린 것이다.

거기에 어떻게 마셨는지.

족히 열 병은 넘는 듯한 소주병과 맥주 피처가 널려 있었다.

그것도 안주 하나 없이.

바닥에 구토한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게 기적이라면 기적이라고 해야 할까.

‘더 없겠지. 설마.’

도윤은 하나둘 떠오르는 필름 편린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혹시나 흑역사가 될 만한 게 없는지 가늠했다.

몇몇 부분은 뚝뚝 끊겨 있었지만.

당장 생각나는 건 없으니 다행인가.

물론.

저 다섯 명도 만취 상태였으니.

그딴 걸 신경 쓸 겨를이 어디 있을까.

승원은 종탁의 다리를 베고 잠들어 있었고.

종탁은 신나게 코를 골며 창용의 배에 머리를 대고 있었다.

덕분에 재훈은 악몽을 꾸는지 끙끙대는 대다.

유나는 구석에서 새우잠을 잔다.

그리고 강미나 작가는.

“……내 이불.”

한 벌뿐인 도윤의 이불을 차지한 채.

새근새근, 옅은 숨을 내쉬며 잘도 자고 있었다.

참고로 베개는.

현재 승원의 발아래 깔린 상태.

여하튼.

참 볼 만한 광경이었다.

그래서.

찰칵, 찰칵, 찰칵.

도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여러 각도에서 전체 사진을 찍는가 하면.

“흐흐…….”

아직 술이 덜 깬 건지.

이상한 웃음소리와 함께 개인 사진도 하나씩 찍어두었다.

그리고 연예인들의 은밀한 사생활을 발견한 파파라치처럼 비열한 미소를 짓곤 천천히 방을 나선 뒤.

“재료가…… 몇 개 없는데.”

냉장고부터 뒤졌다.

자고로.

술을 퍼마신 다음 날에는 해장을 해줘야 하는 법.

도윤은 머릿속으로 요리를 정한 뒤 빠르게 재료들을 세팅했다.

본가에서 김장하고 보내준 지 한 달 정도 지나서 알맞게 익은 김치.

짬이 날 때 썰어서 냉동해둔 파.

며칠 전 사 와 다행히 아직 싹이 나지 않은 양파.

같은 날 사 온 두부.

마찬가지로 같은 날 사 와 아직 숨이 죽지 않은 콩나물까지.

“국은 됐고.”

도윤은 곧장 밥솥도 열어 쌀을 안쳤다.

어차피 숙취가 심해 밥이 잘 들어가진 않을 테니, 그냥 맛만 보는 정도로 약간의 쌀만 안친 채 취사 버튼을 눌렀고.

치이이익…….

취사가 진행되는 사이 강민혁에게 선물을 받은 칼 중 하나를 꺼내 빠르게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탕탕탕탕탕!

자주 쓰진 않아도 정성스럽게 날을 관리해 재료들이 빠르게 썰려 나갔고, 멸치육수가 끓어오르자 도윤은 재료들을 차례로 넣은 뒤 갖은 양념으로 간을 맞췄다.

후르릅.

“아. 속 풀린다.”

그리고 맛을 본 도윤이 행복하단 표정을 짓던 그때.

“어…… 도윤아?”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려보니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던 미나가 이쪽을 바라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어나셨어요, 작가님?”

“아유, 미안해. 어제 술에 취해서…… 여기 도윤이 너 집 맞지?”

“네. 그리고 제가 가자고 했는데요 뭘.”

“그……렇지. 가자고…… 하긴 했지…… 하하하.”

뭔가 떨떠름한 표정의 미나.

“우웁!”

그러나 더 물어볼 새도 없이 미나는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고.

차마 표현하기는 좀 그런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차례로.

“최, 최 배우님. 벌써 일어났네요?”

PD 재훈과.

“……도윤이 머리 안 아프냐?”

“도윤아. 뭐 만들어? 우와! 해장국!”

“도윤 씨. 냄새 좋네요.”

차례로 종탁, 유나, 승원이 나왔다.

근데.

다섯 명 모두 숙취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묘하게 웃는 표정이다.

눈치 빠른 도윤이 그걸 모를 리 없었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어 그냥 묵묵히 국을 끓였고.

마침내 화장실에 한 번씩 다녀온 다섯 명 앞으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김치 콩나물 해장국이 놓였다.

“와…… 대박. 이걸 아침에 끓였다고?”

유나의 감탄과.

“우리 마누라보다 잘 끓인다.”

제보를 고민하게 만드는 재훈의 멘트.

“……진짜 대박인데.”

어지간해서는 감탄하지 않는 승원의 귀한 감탄이 뒤따랐고.

곧바로 여섯 사람은 걸신이 들린 듯 해장국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커다란 양은냄비 한가득 끓인 해장국이 바닥을 드러내는 데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어우, 잘 먹었다. 캬. 속이 확 풀리네.”

“저도요. 와, 진짜 얼큰한 게…… 도윤아, 술 마시고 여기 와서 자도 되는 거냐?”

“저도 같이요.”

도윤이 그 말에 씩 웃는 사이.

미나가 배를 두드리며 감탄했다.

“연기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못하는 게 뭐야?”

“맞아. 거기다 노래도 잘…… 으읍!”

그때 종탁이 다급히 재훈의 입을 막았다.

순간 도윤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노래요?”

“어우, 아니야. 노래 너무 잘한다고.”

“아. 그거야 뭐.”

도윤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눈을 의심했다.

너무 자연스러운 대답이라.

어젯밤, 노래방에서 애절한 발라드를 ‘열창’하던 도윤의 모습이 자동으로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안다.

도윤이 무려 스무 번을 트라이한 끝에.

피처링을 간신히 완성시켰고.

그때 음악감독이 일생일대의 도전 끝에 도윤의 피처링을 원곡에 집어넣었다는 걸.

물론.

도윤은 아직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 말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은 도윤이 노래 잘하는 거로 알던데…….’

‘해장국 먹었으니까 당분간 입 닫아야지…….’

여하튼.

그렇게 다섯 명이 눈빛을 교환하며 암묵적인 합의가 완료되었고.

공교롭게도 노래방에서의 일만 유일하게 기억 못 하던 도윤은.

으쓱으쓱.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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