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87화 (87/200)

87.연기대상

연기대상.

누군가는 어차피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냐 말하기도 하지만-

배우들에게는 더없이 중요한 자리다.

결국.

대중들의 인정도 중요하지만 ‘커리어’로 기록되는 이런 상을 받는 것 자체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니까.

그렇기에 오늘 CTBC 연기대상 시상식에 초대받은 배우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수상을 기대하는 한편.

자정이 넘어가면 시작될 연기대상 대상의 주인을 저마다 마음속으로 점치고 있었다.

‘무조건 최도윤이지.’

‘최도윤도 최도윤인데, 아무래도 오상철 선배님이…….’

‘최도윤 아닐까? 그 미친 연기를 보여줬는데?’

‘오상철 선배님 드라마 시청률이 살짝 밀리긴 해도 사극이니까…….’

현재.

CTBC 연기대상 대상 후보자는 둘로 압축되었다.

한 명은 CTBC 역대 최고이자 케이블 채널 역대 최고 시청률의 <그 남자의 메모리>에서 주연을 맡아 어마어마한 연기력을 선보인 최도윤.

다른 한 명은, 중년 배우들 중에서는 차정수와 더불어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연기력을 지닌 오상철.

참고로 오상철은 CTBC가 야심차게 편성한 조선시대 배경의 사극 <별무리>에서 가상의 왕 ‘이윤’ 역으로 엄청난 호평을 받았고.

그래서 지금 이렇게 도윤 못지않은 대상 유력 수상자로 꼽히고 있는 것.

물론.

도윤의 표정은 아주 편안했다.

상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듯.

천하태평하기까지 한 그 모습에 오히려 다른 사람이 더 불안해할 지경이다.

‘쟤는 못 타면 어쩌려고 그러나…….’

그중 한 명이 바로 유나.

유나는 도윤이 대상 수상이 거의 확실한 DBS 연기대상 시상식을 버리고 CTBC로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마 대상 수상에 실패한다면-

도윤의 상황이 꽤 곤란하게 될 텐데.

뭐 저렇게 편안한 표정인지.

‘원래 걱정 같은 거 안 하던 애이기도 했으니까…….’

하긴.

떠올려보면.

도윤과 촬영할 때 도윤은 인상 한번 찌푸리거나 무슨 일이 있어도 부정적으로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냥 무덤덤하게 있거나.

해결책을 제시하거나.

그도 아니면.

아무 일 없을 거라는 듯 웃거나.

그래서일까.

묘하게 믿음이 가는 얼굴이다.

“자, 2014년 CTBC 연기대상! 올 한 해 수많은 웰메이드 드라마들이 방영되었죠? 이제부터 2014년 CTBC 연기대상을 통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드디어 시상식의 막이 올랐고.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으레 하듯.

축하무대가 시작되었고.

“서, 서, 서, 서이솔!”

시상식 좌석 뒤편.

다른 매니저들과 함께 서 있던 성호의 몸부림과 함께.

[꽃잎을 손에 담아]

[당신의 눈에]

[우리의 사랑은]

[이제 시작된 거죠]

청명하고 맑은 목소리로 인트로를 열며 서이솔이 등장했다.

[사랑이 시작될 때]

[당신은 무엇을 말했었죠?]

[우리의 시작이 좀]

[갑작스럽긴 했어도]

부드러운 멜로디.

꿈결을 거니는 듯한 감각 속에서.

첫 곡이 끝나자 박수가 쏟아지고.

이어서 이솔이 최근 발매한 3집 의 타이틀곡 이 시작되었고.

‘노래 좋네.’

큰 성과는 못 거뒀어도, 그럭저럭 좋은 노래에 도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저도 모르게 박자를 맞춰 박수를 치자.

카메라가 도윤을 잡고 대형 디스플레이에 띄워주었다.

디스플레이에 뜬 도윤의 모습은 그야말로 정말…….

신난 것 같았다.

순간 디스플레이에 자신의 얼굴이 떠 있는 걸 본 도윤이 화들짝 놀랐지만-

오히려 그 모습 덕분인지 시큰둥해 보이기만 하던 다른 배우들과 더욱 비교됐으며.

덕분에 생각지도 못하게.

도윤과 연차가 비슷하거나 낮은 배우들이 하나둘 그 모습을 따라 조금씩 무대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분위기가 형성되자 점잖게만 앉아 있던 다른 배우들도 자연스럽게 박수를 치고 조금씩 환호했다.

‘케이블은 달라도 뭔가 다르구나!’

덕분에 케이블 방송국 시상식 축하무대가 처음이었던 이솔은 오해 아닌 오해 속에서 자신의 노래를 더욱 열창하기 시작했고.

결국 축하무대 분위기는 지금까지 시상식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파티 같은 느낌으로 흘러갔다.

“좋습니다! 손 머리 위로 들고!”

여기에 시상식 MC를 맡은 배우가 멘트를 치며 가세했고, 카메라는 더욱 바빠졌으며, 이를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역시 케이블이라며 치켜세웠다.

-ㅋㅋㅋㅋ ㄹㅇ DBS 지금 배우들 배우병 걸려서 엄근진하게 축하무대 보는데 역씌 케이블이다 ㅋㅋㅋㅋ

-와 ㅋㅋㅋㅋ 연기대상에서 분위기 실화? 개쩌네 ㅋㅋㅋㅋ

-최도윤 표정 ㅋㅋㅋㅋ 호응 잘하네 가수들이 좋아할 듯

-가수들 맨날 시상식 와서 엄근진하게 보는 배우들 때문에 개뻘쭘하게 무대하고 돌아갔는데 오늘은 좀 신날듯 ㅋㅋㅋㅋ

-DBS 시상식에서 박유준 호응하고 싶어서 참는 거 다 보이네 ㅋㅋㅋㅋㅋㅋㅋ

안 그래도 배우들이 근엄한 표정으로 호응 없이 앉아 있는 DBS 시상식과 비교되면서, CTBC 시상식 무대 시청률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고.

“카메라 좀 더 다이내믹하게 잡으라고 해! 줌아웃 때리고! 야, 음방 카메라 잡았던 감독 누구라고 했지?”

“김원중 감독입니다.”

“가서 카메라 잠깐 잡으라고 해! 야이 씨, 여기서 카메라 각도만 잘 잡으면 그냥 음방이잖아!”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으려는 시상식 총괄 PD의 노력이 더해지며.

이후 길이 회자되며, 타 시상식에 참가한 배우들의 태도까지 바꿔놓는 오프닝이 마침내 완벽히 마무리되었고.

“아, 시상식에서 이런 무대는 정말 처음인데요! 배우분들, 호응이 대단합니다! 지금까지 서이솔 씨의 멋진 무대였습니다!”

서이솔은 굉장히 기쁜 표정으로 인사한 뒤 무대를 내려가며.

도윤과 눈을 마주쳤다.

무대에 선 사람은 모든 관중들을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배우들 중 도윤만이 유일하게 몸을 조금씩이라도 움직이며 호응해 준 걸 볼 수 있었던 것.

감사의 인사를 받은 도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도 고개를 꾸벅, 숙이는 한편.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될 시상식 무대에 집중했다.

그나저나.

‘신인상은 누가 받으려나.’

도윤은 같은 시각 열리고 있을 DBS 시상식을 떠올리며.

과연, 유준과 한올 둘 중 누가 신인상을 차지할지 예상하고 미소를 지었다.

* * *

당연하게도.

연기대상 시상식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대상 시상식은 시상식 마지막에 진행된다.

때문에 최우수상, 혹은 대상 후보로 꼽히는 배우들은 상당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 자신의 차례가 되길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도윤은 시종일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배우들의 시상이 있을 때마다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소리를 지르거나 일어나서 방방 뛴 건 아니지만, 표정에 진심이 보였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1부가 마무리되고 잠시 휴게실로 돌아온 도윤은 성호가 건네준 휴대폰을 보고 물었다.

“어디 전화 왔었어?”

“네. 아, 근데 그것보다…… 기사 한번 검색해 보세요. 형 이름으로.”

“내 이름?”

아직 시상은 하지도 않았는데.

도윤은 뭔가 싶어 휴대폰을 받아들고 기사를 검색했고.

곧, 자신의 이름이 떡하니 박힌 기사들이 주르륵 뜨는 걸 확인했다.

“형 무대 호응 좋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아.

그제야 도윤은 기사가 뜬 이유를 알아챘다.

안 그래도 배우들이 축하무대에서 시큰둥한 표정을 보이는 건 매년 불거지는 문제.

그런데.

‘내가 이런 표정을 지었다고?’

절묘하게 캡쳐한 덕분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표정이 상당히 신나 보였다.

“엄근진하게 있는 것보다 그게 낫죠.”

민주의 말처럼.

훨씬 보기 좋은 건 맞다.

하지만 도윤이 의도한 건 아니었다.

그냥 아는 사람이 축하무대를 하고 있으니 당연하게 생각하고 호응한 건데.

이런 일이 생길 줄이야.

‘하긴, 이때 좀 심하긴 했었지.’

회귀했던 2020년대 들어서는 좀 나아진 편이긴 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런 문제로 가수들 좀 그만 무안하게 만들라며 질타를 받던 배우들이다.

그렇기에 도윤이 당연하게 생각하고 한 호응이 현시점에서는 꽤 신선하게 보인 셈.

여하튼.

“별일이 다 있네.”

도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당연한 일을 한 걸로 화제가 되기도 하는 게 연예인이라는 직업이지만.

그걸로 당장 기뻐하기에는.

아직 크게 기뻐할 일이 하나 남아 있다.

어쩌면, 기뻐할 일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도윤은 편하게 마음먹었다.

“아, 참. 그리고 박유준 배우가 신인상 받았대요. DBS에서.”

“잘됐네. 한올이는?”

“채한올 배우는 후보였대요. 근데 우수상이랑 최우수상 있으니까 거기도 기대해 볼 만하지 않을까요? 박유준 배우도 그렇고요.”

하긴.

DBS에서 이번에 성공한 작품이 <그 시절의 우리>뿐이니.

DBS에서 안 챙겨줄 리 없다.

안 그래도 도윤이 시상식에 불참했지만 대상 수상자로 논의될 만큼, <그 시절의 우리> 외엔 다른 드라마들이 모두 망했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운이 좋아 상을 받는 건 아니리라.

<그 시절의 우리>에 출연했던 배우들은 모두 놀라울 만큼 멋진 연기를 선보였으니까.

도윤도 DBS 시상식에 가지 못한 게 아쉬울 만큼.

여하튼.

도윤은 민주가 건네준 2부 협찬 액세서리인 ‘티네즈’ 손목시계와 ‘파들러’ 구두를 착용하고 다시 시상식 현장으로 향했고.

마침내.

“그럼, 최우수상 후보 발표하겠습니다!”

긴 기다림 끝에 도윤의 이름이 처음으로 불렸다.

바로 장르 액션부문.

[도망가면……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 남자의 메모리>에서 승원이 맡은 ‘최형식’과 벌인 추격전 장면과 뒤엉켜 싸우는 장면이 재생되는 걸 보고 있자니 감회가 새롭다.

물론.

도윤은 승원이 될 걸 알고 있었다.

“수상자는 <그 남자의 메모리>, 이승원 배우님. 축하드립니다!”

울려 퍼지는 박수 소리 속에서.

도윤은 승원이 펼쳤던 연기를 떠올렸다.

몸을 사리지 않고, 미친 듯이 열연하던 모습.

“감사합니다. 함께한 제작진, 함께 촬영한 배우분들.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승원은 수상소감 말미.

“아울러…… 함께 연기하면서 제 연기의 차원을 올려준 최도윤 배우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도윤을 언급하며 도윤을 당황시켰다.

‘내가?’

“이야기하면 오늘 시상식 시간이 부족해질 테니, 나머지는 뒤풀이 자리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윤이 멍해진 사이.

승원은 부끄러운 듯 시상대를 내려오며 도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다음은 여자 부문입니다. 후보, 발표하겠습니다!”

“<그 남자의 메모리>, 한유나 배우님 축하드립니다!”

이어서 유나 역시 당당히 수상하며 <그 남자의 메모리>가 시상식을 휩쓸 거란 예상이 맞아떨어져 가고 있었고.

마침내.

대상 후보가 발표되었다.

[<그 남자의 메모리>, 최도윤]

[<별무리>, 오상철]

[<오피스 생존기>, 유인재>

총 세 명.

후보들의 이름이 차례로 뜨고.

이어서 각 드라마의 하이라이트가 재생되었다.

도윤의 경우.

[제가…… 제가 연예인이라구요? 그게 무슨…….]

기억을 잃은 순수한 톱스타 ‘이다한’의 모습과-

[아니지…… 그게 아니지…… 넌 내 기분을 나쁘게 만들어서 죽는 거야.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사이코패스 ‘이다한’의 모습이 교차로 재생되며 배우의 연기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제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이어서 <별무리>의 오상철과 <오피스 생존기>의 유인철 역시 만만찮은 후보라는 걸 증명하듯 멋진 하이라이트가 지나갔지만.

사람들은 서서히 직감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최도윤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런 가운데 시상자로 나선 사람은 바로.

“안녕하십니까, 배우 유광섭입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초대해 주신 CTBC에 먼저 감사 인사 올립니다.”

<기적의 레시피>를 함께한 원로 배우 ‘유광섭’이었다.

지방 촬영 당시 도윤, 유준과 함께 꼬리찜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던 배우.

그러면서, 배우로서 중요한 자세를 알려준 배우.

“CTBC는 저에게 상당히 의미 깊은 방송사입니다. 과거에 함께했던 PD님, 작가님, 스태프분들이 다수 계시고 익숙한 배우분들도 계시죠. 아시는 분들도 아시겠지만, 저도 곧 CTBC에서 드라마 한 편을 찍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가 시청률 잘 내라고 불러주신 것처럼 느껴집니다.”

소소한 농담에 잔잔한 웃음이 퍼지고.

마침내 유광섭은 천천히 카드를 펼쳐들었다.

“자, 그럼. 2014 CTBC 연기대상 대상, 발표하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도윤과 눈을 마주쳤다.

착각이었나 싶었는데.

“2014 CTBC 연기대상, 영예의 대상! 그 수상자는…….”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그 남자의 메모리>, 최도윤 배우님. 축하드립니다!”

함성이 일고.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쏟아지는 박수 속에서.

도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다.

붕 떠서.

하늘을 나는 듯한 느낌.

“축하해요! 최도윤 배우!”

“축하드립니다! 선배님!”

“도윤아! 역시 너일 줄 알았지!”

사방에서 들려오는 축하 소리.

도윤은 잠시, 그 소리를 음미하다가.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마치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 같은 시상대 계단을 한 걸음, 천천히 곱씹으며 오른 뒤.

마침내 광섭과 마주했다.

“선배님.”

“도윤이, 축하한다.”

그리고 이어진 포옹.

이내 광섭은 도윤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이걸로 만족하지 말거라.”

도윤의 눈이 번쩍 뜨이게 만드는 한마디를 건넸다.

도윤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인 뒤.

마이크 앞으로 다가서서.

드디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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