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85화 (85/200)

85.너희 회사 좀 어떠냐?

“자, 좋습니다! 오케이, 포즈 잡고 갈게요. 손 좀 더 아래로! 조금만 더! 표정 잡고. 아! 훌륭합니다! 원더풀! 캬, 역시 명불허전입니다!”

찬사 속에서.

셔터 누르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려 퍼졌다.

“좋습니다. 한 컷 더 갈게요. B컷 따로 모아서 화보 내면 잘 팔리겠는데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촬영감독의 말처럼 정말 B컷들만 모아서 화보집으로 내도 잘 팔릴 것 같았다.

도윤의 지금 ‘위톡’ 광고 촬영 말이다.

“오케이. 잠시 쉬었다 가시죠. 이거, 오늘 칼퇴하겠는데요?”

주문하는 족족 완벽한 자세를 취해 주는 도윤 덕분일까.

촬영 현장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고.

현장 스태프 몇몇은 손에 종이와 펜을 든 채 매의 눈으로 휴식시간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다 촬영감독의 휴식 선언이 떨어지자.

“저, 최도윤 배우님…….”

“사인 한 장만 부탁…….”

<그 남자의 메모리>에서 ‘이다한’의 이미지가 박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때는 사인을 요청하면서도.

약간 무서워하는 모습이었는데.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스태프들의 눈에는 하트가 가득했다.

그래서 도윤도 걸맞게 보답했다.

“물론이죠.”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와 ‘서윤재’를 연상시키는 아련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자.

‘와…… 숨넘어가겠네.’

‘눈빛 미쳤어…….’

스태프들은 도윤이 사인해서 건네주는 그 순간까지도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제 오빠도 좀 연예인 같은데.”

그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민주가 중얼거리자 옆에서 성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까지는 꼭 아니었던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그렇게 안 보였니?”

“……생각해 보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성호는 도윤의 평소 모습들을 떠올렸다.

카메라 앞에 있을 때를 제외하면.

‘연예인’이란 단어에서 떠오르는 흔한 모습이 별로 없긴 하다.

딱히 사치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우월감에 젖어 누군가를 깔보는 것도 본 적이 없다.

굳이 말하자면 성호를 갈구긴 해도-

이유 없이 그러는 것도 아니다.

그냥.

성호와 민주가 부르는 것처럼 편한 형, 오빠 같다고 해야 할까.

‘신기한 형이긴 해.’

새삼.

처음 만나고 갑자기 인기를 얻으며 확 달라져 그렇게 개차반일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러다가도 또 바뀌어서 지금은 저렇게 됐다.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가끔 무섭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어려운 건 아니다.

사실 그래서 틈만 나면 개기는 거지만.

반응도 재미있고 말이다.

찰칵!

“감사합니다! 최도윤 배우님!”

“오빠! 저 팬카페 가입했어요! 언제 팬카페 한번 꼭 들르세요!”

그러는 사이 도윤이 사인을 마치고 정성스레 사진까지 찍은 뒤 자리로 돌아왔고.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아, 아뇨.”

“그럼 그만 쳐다봐. 정드니까.”

뻔뻔한 그 멘트에 성호가 멍해진 사이.

민주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참, 너 내가 말한 보육원 알아봤어?”

“아, 그, 네네. 알아봤어요. 전화번호 저장해 뒀는데, 바로 넘겨드릴까요?”

“어, 바로 넘겨줘. 그리고 후원 품목도 한번 생각해 보고.”

도윤이 한마디 덧붙였다.

“아, 그리고 회사에는 이야기하지 말고.”

“왜요?”

왜 굳이 숨기냐는 성호의 말에 도윤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굳이 그걸?”

도윤은 생각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굳이 알릴까.

도윤은 그러다 문득 성호에게 물었다.

“너, 살 좀 빠진 것 같다?”

성호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요새 다이어트에 집중하며 살이 빠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동도 운동이고.

도윤이 슬쩍슬쩍, 아는 동생을 소개시켜 준다는 약속을 상기시키자 콜라를 입에 가져가다가도 바로 버리는 성호.

거기다.

명분이 하나 더 있었다.

“하와이 가면 그래도 수영복은 입어야 하니까요.”

바로 <그 시절의 우리> 하와이 포상휴가.

연말에 몰린 시상식들이 끝나고.

새해가 되면.

도윤을 비롯한 배우 및 제작진은 하와이로 떠난다.

물론 성호와 민주도 함께다.

그래서 성호는 하와이에서 다이빙도 하고 수영도 할 생각에 요새 미친 듯이 다이어트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가서 외국 여자랑 대화해 보는 게 소원이래요.”

“제, 제가 언제요 누나!”

“이상하다. 나 기억력 좋은데.”

“…….”

도윤은 한술 더 떴다.

“그럼 영어 공부도 하겠네?”

“바, 바디랭귀지가 있잖아요? 세상은 하난데!”

“안 도망가면 다행이겠는데.”

궁지에 몰린 성호는.

그만 실책을 범했다.

“그, 그러는 형은 영어 할 줄 알아요?”

성호가 아무렇게나 던진 항변에.

도윤은 기다렸다는 듯 씩 웃으며 물었다.

“나 어느 대학 다녔게?”

“갑자기 대학은 왜…… 아!”

성호는 그제야 떠올렸다.

자퇴하긴 했어도.

도윤이 명문대 출신이며.

그것도…….

경영학과에 다녔다는 사실을.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도윤의 승리였다.

* * *

연말이 되었고.

도윤은 일단 차기작에 대한 모든 제안들을 보류하거나 정중히 거절하며 지냈다.

그렇다고 마냥 논 건 아니다.

혼자서 차를 몰고 드라이브도 다녀오고.

그간 바빠서 보지 못했던 영화나 드라마를 분석하며 시야를 넓혔다.

물론 대부분은 이미 봤던 것들이지만, 작품에 따라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른 것들도 있어서 딱히 지루하진 않았다.

그러면서 시간을 쪼개 지금까지 바빠 만나지 못했던 강민혁 셰프, 진주섭 PD, 유재훈 PD 같은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지는가 하면-

오늘은 곧 입대하는 선우의 송별회에 참석했다.

“으아아아앙…….”

그런데.

정작 울음을 터뜨린 사람은 선우가 아니라 해영이었다.

“얘 왜 이러냐.”

석준이 펑펑 우는 해영의 모습에 당황해 버렸고, 도윤은 그런 해영을 바라보는 선우의 모습에 알만하다는 듯 피식거리며.

“둘 다 작품도 안 겹치는데, 신기하네?”

“…….”

지금 같은 상황에선.

침묵은 곧 긍정의 의미.

하긴.

서로 원래부터 알고 지내던 친한 사이에.

이전부터 조금 심상찮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저희 사실…… 사귀고 있어요.”

“그런 것 같더라.”

“별로 안 신기해.”

시큰둥한 반응에.

선우와 해영은 멍해졌다.

“…….”

놀랍거나 한 건 아니다.

청춘남녀가 그렇게 친하게 붙어 다니는데.

없던 사랑도 싹트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저 둘은 낌새가 예전부터 보였다.

본인들은 아닌 척해도.

물론 도윤은 남녀 사이에 친구는 무조건 없다고 생각하는 쪽은 아니다.

“누가 먼저 고백했는지 안 궁금하세요?”

“어. 별로 안 궁금해. 술 마시다 눈 맞아서 키스라도 한 거면 모를까.”

“…….”

술 마시다 키스한 모양이다.

“소속사에서는 알아?”

석준의 질문에.

한 명은 고개를 끄덕였고.

한 명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오빠…… 말했어?”

고개를 젓지 않은 쪽이 화들짝 놀랐다.

“……어차피 군대 가는데 숨길 게 뭐 있어.”

“그야 그렇긴 한데…….”

둘의 모습을 보며 도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세상 참 심각해 보인다. 그쵸, 형?”

“니들이 무슨 아이돌도 아니고. 나중에 들키면 그냥 오픈해. 요새 하루에도 몇 개씩 기사 떠.”

석준이 맞장구치는 가운데.

선우가 재빨리 화살을 돌렸다.

“혹시 형님은 연애 안 하세요?”

“할 시간이 있겠냐?”

너무 빠른 대답이라 의심할 법도 한데.

“하긴, 그렇게 바쁘시다는데. 오늘도 진짜 간신히 만난 거잖아.”

“맞아. 오빠 또 바로 다음 작품 들어갈 거죠?”

둘은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믿어버린다.

“아니. 좀 쉬려고.”

“진짜요? 오빠가요?”

“대박. 형님 바로 다음 작품 들어가실 줄 알았는데.”

도윤이 미간을 좁혔다.

“내가 무슨 인조인간이냐?”

“어, 아니었어요?”

“헐, 인간이었대. 대박.”

“…….”

그때 석준이 다시 화제를 돌리며 도윤을 지원사격했다.

“그나저나 해영아, 굳이 고무신 신어야겠냐? 얘 연예병사 아니야. 해병대라고.”

“제가 매주 면회 갈 거예요!”

“퍽이나. 그것도 일병 때까지지.”

일말상초.

일병 말과 상병 초 사이.

군화와 고무신 커플이 가장 많이 헤어지는 시기.

사실 보통.

그 시기쯤 되면 헌신적으로 편지와 선물을 보내주던 고무신들도 슬슬 지쳐간다.

매번 오지에 있는 부대에 면회를 가는 것도 힘들어지고, 몸이 멀어지다 보니 마음도 멀어지고…….

여하튼.

수많은 사례를 눈으로 직접 봐 온 도윤과 석준은 그저 걱정, 또 걱정이었다.

“근데 괜찮겠냐? 차라리 알보병이 낫지.”

참고로 선우는.

기어이 해병대 수색대를 지원했다.

도윤은 그때 포병 이야기를 꺼낸 걸 후회했다.

사실.

어차피 시간만 날리는 곳, 기왕 가는 거 몸 편한 곳 다녀오는 게 최곤데 말이다.

물론.

연예인이니만큼 해병대 수색대를 나왔다고 하면 이미지에 엄청난 도움이 되겠지만…….

도윤이 보기엔 선우는 그런 것보다는 그냥 ‘멋있어 보여서’ 지원한 게 큰 듯했다.

“가서 남자가 되어 나오겠습니다. 두 형님처럼요.”

“그래. 훈련소 가서 다음날 눈 뜨면 후회할 거다. 진짜로. 딱 그 느낌이거든. 눈 뜨고 하얀 관물대 보이면 아, 내가 여길 왜 왔지? 딱 그렇거든.”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그 느낌.

쪼르르륵.

도윤은 선우의 잔 가득 소주를 따라주었고.

“흐아아앙…… 오빠…… 가서…… 다치면 안 돼, 알았지?”

“다치긴 누가 다쳐. 가서 훈련도 잘 받고…….”

해영과 선우의 눈물겨운 포옹에 피식거렸다.

저런 걸 보면.

영락없이 어린애들이 맞다.

그렇게 두 사람이 울고불고 청춘 로맨스를 찍는 사이.

“그나저나 요새 도윤이 네 이야기 많이 들리더라?”

도윤과 석준은 서로 술을 따라주었다.

“이번 시상식 말이야. 2관왕은 거뜬할 거란 이야기가 많던데.”

<그 남자의 메모리>.

<그 시절의 우리>.

서로 다른 방송사의 작품이지만.

올해 역대급 기록을 세운 작품이란 공통점이 있고.

도윤은 그 두 개의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아 엄청난 연기를 선보였다.

때문에 그리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다.

“잘 모르겠어요. 되면 좋겠죠.”

“넌 욕심도 없냐? 그냥 좋은 게 아니라 엄청 좋은 거겠지.”

엄청 좋기야 할 것 같다.

당장 작년에 신인상 하나 받았을 때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그리고 바로 다음 해에 대상이면-

도윤이 배우로서 엄청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는 증거.

물론.

대상 받는다고 배우 인생의 정점을 찍는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 도윤은 상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더 꾸준하게 연기를 할 수 있냐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회귀 전.

도윤이 원한 건 상이 아니라.

연기 그 자체였으니까.

“아무튼 좋겠다, 좋겠어. 난 너처럼 보는 눈이 없어서…… 올해는 완전히 망했다. 상은 바라지도 않고, 그냥 잊히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석준은 부럽다는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게.

석준은 올해 찍은 드라마가 모조리 망해 버렸으니까.

거기다 그중 하나는 주연이다.

그 드라마의 각본이 안 좋았던 것도 사실이나-

아무리 그래도 주연 배우는 드라마 실패의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위치.

결국 대중들은 ‘실패한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로 기억할 테니까.

그래서 석준의 심경은 꽤 복잡해 보였다.

“안 그래도 계약 기간도 끝나가고…… 회사에서는 재계약 이야기 나오곤 있는데 조건은 별로 마음에 안 들고…….”

거기다 소속사 문제까지 겹치니.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하다.

하지만.

도윤은 석준이 지금 슬럼프라는 것과 조만간 슬럼프를 깨고 날아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회귀 전에 보고 와서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래서 말인데…… 너희 회사 좀 어떠냐?”

지금 이 물음은 꽤나 매력적이다.

“저희 회사요?”

짐짓 모른 척 되묻는 도윤에게.

석준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응, 요새 잘 나가더만. 저번에 오디션으로 신인들도 수급했고.”

맞는 말이다.

이엔 엔터는 확실히 커지고 있었고.

도윤이라는 확실한 배우와 한올이라는 괴물 신인을 얻고 날아오르는 중이다.

거기에 동민의 확실한 비전과.

수철의 완벽한 비즈니스까지.

“혹시…… 나 같은 30대 중반 노인네는 안 받아주냐?”

만약 여기에 석준 정도의 경력 있는 배우가 합류해 준다면…….

“그럴 리가요. 말 나온 김에 한번 연락해 볼게요.”

분명히.

회사는 더욱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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