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버리시면 안 됩니다?
생각보다.
어둡고.
음모가 오갈 것 같은 그런 모임은 아니었다.
그냥.
각계에서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노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그래서 그게 말이 돼? 지나가다가 누가 알아봐서 사인해 줬는데 폭행으로 고소를 했다고?”
“그렇다니까! 아, 너무해. 진짜 좋은 마음도 이러다 사라지겠어.”
“생긴 게 좀 험상궂어야지.”
“뭐 인마?”
국회의원.
기업 CEO.
기업 총수의 외동딸.
배우.
발라드 가수.
총 다섯 명으로 이뤄진 모임에.
도윤이 추가되어 여섯 명이 된 모임은.
꽤 밝은 분위기다.
흔히 상상할 법한 은밀하고 엄청난 계획이 오가는 게 아니라, 그냥 친구들끼리 모여서 노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도윤은 꽤 신선한 충격을 받았으면서도.
상당히 잘 녹아들고 있었다.
“그래서 도윤 씨는 어떻게 생각해요? 여기, 이 친구 엄청 험상궂게 생기지 않았어? 기업 CEO? 혹시 <새세계>에 나오는 ‘실버문’ 같은 기업 아니냐?”
지금 질문을 던진 사람은.
무려 재계 3위 ‘청진그룹’ 회장의 외동딸이자.
현재 다섯 개의 계열사를 관리하는, 36세의 재벌 2세 ‘주안나’.
돈이 많아 피부관리를 제대로 해서 그런지.
아니면 타고나서 그런지.
말이 36살이지.
20대 초중반이라 그래도 믿을 정도.
“와, 너무하네. 누나. 내가 아무리 그렇게 생겼다지만 실버문이 뭐냐? 내가 무슨 주먹질로 회사 세웠나.”
그리고 이 말에 반발하며 항변하는 사람은 바로.
한국의 국민 메신저 ‘위톡’의 개발자이자 창업자 ‘유동환’이다.
주안나의 말마따나.
험상궂다.
길 가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지간한 사람들은 눈을 깔 정도로.
이어서, 아직 30대 중반인데 한국 발라드의 전설을 ‘예약’한 ‘신재우’가 도윤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진우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는데.”
도진우.
도윤이 출연한 <맛대결>에서 로건 킴 셰프 팀에 있던 가수.
“요리 좀 한다면서요? 정수 형보다 잘한다던데. 형 어쩌려고 캐릭터 겹치는 친구를 데려왔어?”
“그러게. 후회 중이다.”
정수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후회하던 그때.
“반가워요, 이원재라고 합니다. 음, 그리고 내 소개는 다른 사람이 좀 해줬으면 좋겠는데……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해서.”
정장 차림의 한 남자가 손을 내밀자 도윤은 그와 악수하며 바로 답했다.
“강북구 ‘이원재’ 국회의원, 맞으시죠?”
“어?”
순간 이원재의 시선이 정수에게 향했다.
“정수 형. 혹시 오기 전에 말한 거 아니지?”
“그럴 리가 있나.”
정수도 놀랍다는 반응이다.
이원재는 잠시 미간을 좁히다가 물었다.
“이런 질문 하는 거 좀 그런데, 혹시 정치에 관심 있어요?”
“아뇨. 그냥 뉴스 보다가 알게 됐습니다. 아, 공약 지키신 거는 잘 봤습니다. 어린이 보호구역 관련 공약이었죠?”
“……정치에 관심 많은 것 같은데?”
“유명하셔서요. 그리고 16년도 총선에서 재선 도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진짜 정치에 관심 많네. 보수예요, 진보예요?”
이원재는 웃으며 농담했지만.
시선만큼은 꽤 흥미롭다는 듯 도윤의 표정을 쫓고 있었다.
‘나이가…… 26살?’
사실 한국에 국회의원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그래서 어지간히도 화제가 되지 않는 한, 자기가 사는 지역구 국회의원이 누군지도 모르는 경우가 태반.
물론 이원재가 30대 초반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화제를 부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도윤의 반응을 그냥 넘기기도 좀 그렇다.
때문에 마찬가지로.
주안나와.
유동환.
그리고 신재우도 상당히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냈다.
미리 알려준 거 아니냐는 의심스러운 시선도 있었지만.
“왜 그렇게 봐? 진짜 아니라니까? 내가 미쳤다고 너희들 정보를 미리 불겠냐? 아직 모임에 한 번도 안 온 애한테?”
“아니, 형이 평소에 최도윤 씨 이야기를 좀 많이 했어야지. 무조건 데려오겠다고 그렇게 벼르던 사람인데 혹시 알아?”
“속고만 사셨나. 진짜 아니라니까?”
정수의 강한 항변에 다들 의심을 거두고.
이제 도윤을 향한 흥미로운 시선만이 남았다.
그래서 기대 반.
궁금한 반의 마음으로.
“도윤 씨, 정치 말고 경영 쪽에는 관심 없어요? 경영학과라고 들었는데. 기사 봤거든요.”
위톡의 경영자 유동환이 물었다.
그리고 도윤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관심이 없다고 하긴 좀 그러니, 있다고 답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럼…… 아, 이건 좀 다른 질문인가? 우리 위톡 쓰면서 불편한 건 없었어요?”
그때 정수가 나섰다.
“에이, 무슨 면접 보는 것도 아니고. 소개하는 자리에서 뭐 해?”
“왜,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 나이에 원재 국회의원인 거랑 공약 아는 친구가 몇이나 있다고. 그리고 경영학과라니까 반가워서 그러는 거거든?”
물론 정수가 말하든 말든 유동환은 얼른 질문을 이어갔고.
“그냥 편하게 말해봐요. 사실 그냥 외부에서 사람 만날 때마다 다 하는 질문이라서.”
별 기대 않는다는 말투지만.
표정에는 기대감이 가득하다.
하지만 부담을 느낄 법한 상황에서도 도윤은 정말 ‘편안하게’ 답했다.
“그럼……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편하게요.”
“멀티프로필 기능이 추가되면 좋겠습니다.”
유동환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했다.
“나는 상대에게 동의한 적도 없는데 고작 내 번호 하나 아는 걸로 내 사진들이 공개된다는 게 좀 아쉬워서요.”
“그 말은…… 개인정보 문제로 불쾌한 면이 있다, 이런 건가요?”
“좀 더 간단히 말씀드리면, 각 사람마다 제가 원하는 프로필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에게나 공개되는 기본 프로필에는 아무 사진이나 넣고, 제가 원하는 사람에게는 원하는 사진들을 공개하는 거죠.”
상당히.
괜찮다는 느낌이 온다.
왜냐하면.
도윤이 말한 건 2020년 정도가 되어서야 ‘위톡’에 추가된 기능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당시 호평을 받은 기능이고.
회귀한 도윤은 그 기능의 부재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고 있어 마침 말해본 것이다.
그래서 도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으나.
‘괜찮은 제안 같은데.’
유동환에게는 꽤.
흥미롭게 느껴진다.
물론.
뭔가 기능을 추가한다는 게 이런 제안만으로 시작되는 건 아니고, 인력과 구체적인 기획 및 예산 편성이 필요하지만.
여기 있는 26살의 배우가 흥미로운 제안을 던졌다는 건 확실하다.
그것도, 망설임 없이 말이다.
‘동환이 앞에서 저렇게 말할 줄이야.’
지금 이 정수의 감탄처럼.
유동환을 마주한 사람은 둘 중 하나의 반응을 보였다.
어떻게든 뭔가 얻어내기 위해 지나친 저자세를 보이거나.
자신이 위축되지 않았음을 어필하려는 나머지 복어처럼 가시를 세우거나.
그런데.
도윤은 다르다.
마치 동등한 관계에서 비즈니스 미팅을 가진 것처럼, 망설임 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그래서.
첫인상이 꽤 좋게 느껴졌다.
“검토해 보죠. 긍정적으로. 아니, 이 말은 좀 그러니까…… 빠른 시일 안에 회의 안건으로 올려보겠습니다.”
“별거 아닌 의견입니다.”
“아뇨, 분명히 흥미로운 의견입니다. 멀티 프로필이라…… 확실히, 개발만 된다면 저희 이용자들이 느끼는 불편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유동환의 만족스러운 웃음에.
주안나도 나섰다.
“혹시, 청진그룹 계열사 상품 뭐 쓰는 거 있어요?”
정수가 일단 제지했다.
“어우, 이거 무슨 청문회도 아니고. 신입한테 다들 뭐 하고 있는 거야?”
“왜요, 신기하니까 그렇지. 오빠가 여기 사람들 누군지 안 알려줬다면서요?”
그러나 주안나 역시 20대 배우 도윤이 유동환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다는 점에서 큰 흥미를 느낀 듯했고.
“부담 없이 말해봐요.”
아주 부담스럽게 물었다.
물론 도윤은 이번에도 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동차보험 청진화재 쓰고 있습니다.”
“오!”
“그리고…… 청진식품 음식들도 재료로 쓰고 있죠. 브랜드가 믿을 만해서요.”
주안나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럼, 혹시 쓰면서 불편하거나 했던 점 물어봐도 돼요?”
도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질문과 약간 다른 대답을 꺼냈다.
“청진이 지금 사업 확장을 시도하고 있죠?”
“……뉴스 기사 자주 보나 봐요? 그렇게 보도를 막 부탁하진 않았는데.”
도윤은 청진그룹이 엔터 사업에 진출한다는 기사를 떠올렸고.
그 엔터 사업에서 처참하게 실패하고 철수하는 미래도 떠올렸다.
“차이나머니가 그리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진 않을 것 같습니다.”
“아직 정해진 건 없는데.”
“그냥요. 요새 차이나머니 쪽에 눈을 돌리는 기업들이 많아서요.”
주안나는 잠시 대답하지 않은 채 도윤을 바라봤다.
다른 경우였으면, 코웃음만 쳤겠지만.
방금 유동환에게 개선점을 제안하는 모습을 막 본 터라 마냥 웃어넘길 수도 없었다.
물론.
다수의 계열사를 관리하는 기업인이 일개 한 사람의 의견에 휘둘리는 것도 웃긴 일이다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의견 고마워요.”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한 뒤 생각에 잠겨버렸고.
그 모습을 본 정수는 도윤이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의 사람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으며.
“이 친구 재미있네.”
마지막 한 명.
지금까지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신재우마저 입을 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공개 안 한 제 신곡 한번 들어볼래요?”
그리고 노래라는 말에.
도윤의 눈이 반짝거렸다.
* * *
모임은.
그리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생각 이상으로 건전한 모임이라고 해야 할까.
물론 각계각층에서 정점에 오른 사람들이 그리 한가한 것도 아니고, 특히 기업인들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란 사람들이라 술을 마시면서 일출을 본다는 게 어불성설이긴 하다.
그래서 그날 모임은 12시 전에 마무리되었고.
도윤은 아주 좋은 첫인상을 남겼다.
도윤은 그걸로도 만족했다.
그런 사람들과 끈을 만들어둔 것만으로도 미래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효과는 생각보다 빠르게 나타났다.
며칠 뒤.
“세상에, ‘청진화재’에서 전속계약 제안했네?”
도윤은 두 곳의 기업으로부터 엄청난 제안을 받은 것.
동민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었다.
청진화재는 보험업계에서도 1위를 차지하는 곳.
안 그래도 보험회사는 이미지 문제로 모델을 아주 까다롭게 선정하기로 유명한데.
주안나로부터 이렇게 거액의 전속계약 제안이 온 것이다.
아마.
청진그룹 회장 딸이자 현재 세 개 계열사를 관리하던 주안나의 결정이었을 테지.
‘대단한데.’
“연간 8억…… 혹시 뭐 독소조항 있는 거 아닌가?”
수철이 계약서를 꼼꼼히 살폈지만.
별다른 이상은 발견할 수 없었다.
4년 계약에 연간 9억, 그러니까 총액 36억짜리 계약.
“그냥…… 대박이네.”
이 한마디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는 수준.
도윤은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내던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다.
“도윤이가 급이 많이 올라오긴 했나 보다. ‘위톡’에서도 제안 왔어.”
위톡.
이른바 국민 메신저라 할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
그 위톡을 만들고 위게임, 위택시, 위쇼핑 등 이른바 ‘위톡 왕조’를 완성한 유동환.
그런 사람이 역시나 모임 다음날 엄청난 제안을 한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마음에 들었으면 이런 제안을 턱턱 건네는 걸까.
“3년 계약에 모델료가 총합…… 백…… 억?”
입이 떡 벌어지는 액수에.
어지간해서는 놀라지 않는 동민도, 수철도 할 말을 잃었고.
오로지 도윤만이 묘한 미소를 띠었다.
“우리 회사…… 진짜 이러다 상장하겠는데?”
“전문가…… 부를까요? 저희 진짜 IPO(기업공개)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두 사람의 머릿속으로 핑크빛 미래가 펼쳐지고.
동민은 벌써부터 상장을 마치고 주식시장에서 격전을 펼칠 이엔 엔터를 상상하고 있었다.
“도윤이 이제 인생 폈네. 이사도 조만간 하겠다?”
도윤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직요. 지금은 정신없어서. 그리고 지금 사는 집도 좋은데요 뭘.”
“누가 보면 우리 회사 정산금 떼어먹는 줄 알겠다. 차도 그게 뭐냐? 대표님이 뽑아주신다고 할 때 좋은 거 좀 고르지.”
도윤이 그 말에 짐짓 미간을 좁혔다.
“그것도 몇 개월 기다린 건데요. 인기 많은 모델이에요.”
“에휴, 내가 뭔 말을 하겠냐. 그래도 나중에 공익광고는 잘 들어오겠다. 그쵸, 대표님?”
동민이 피식거렸다.
“도윤이 알아서 하게 냅둬. 왜, 이미지 좋아지고 좋구만. 이 바닥에 돈 좀 벌었다고 바로 스포츠카 뽑고 공도에서 쏘고 다니는 애들이 어디 한둘이냐?”
“그야 그렇긴 해도…….”
수철이 뒤통수를 긁적이는 사이.
도윤은 새삼.
자신이 모르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시작부터 백억 단위의 계약이라니.
정수가 모임을 언급할 때마다 호들갑을 떨며, 후회 안 할 거라고 이야기하던 모습이 떠올랐지만…….
“배, 백억…… 형 아시죠? 저 종신계약. 충성 맹세한 거. 버리시면 안 됩니다?”
언제 개겼냐는 듯, 불길 속으로 뛰어들 각오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 성호의 모습에.
오늘따라 굳이 응징하지 않고 피식거리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