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대상은 당연히
대형 법무법인 변호사의 일상은 보통 24시간 쉴 틈 없이 돌아간다.
법무법인에 들어온 사건을 살피고, 변론을 준비하고, 변호인을 만나고, 기록을 검토하고…….
그리고 그 변호사가 해당 법인의 에이스라면 더더욱 바쁜 업무를 소화한다.
은성이 그랬다.
최근 법무법인 ‘유성’에서 괴짜로 통하고 있는 그 변호사 말이다.
“1405호실 가 봤어? 온통 브로마이드래.”
“덕질도 그 정도면 정성이지.”
“저번에는 최도윤 소속사로 뭐 택배로 큰 상자 하나 보냈다던데.”
“강 변호사님이 그거 보고 자기도 배우 할까 심각하게 고민하셨다잖아. 채 변호사님 좋아하니까.”
“저번에 그 뭐더라, 팬미팅 추첨 떨어지고 무슨 곧 죽을 사람처럼 다녔다던데.”
그날.
도윤이 주연으로 출연한 <기적의 레시피> 시사회에 다녀온 뒤 본격적인 덕질을 시작한 은성.
그날 무대에 초대되어 도윤과 함께 찍은 사진은 보물 1호가 되었고.
도윤이 안겨준 팝콘통은 은성의 책상 한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오늘은 무려.
휴가까지 사용했다.
“사건 몰아서 싹 깔끔하게 처리하고 쓰셨다던데.”
“자기가 지금까지 맨날 재방만 봤는데 막방은 꼭 본방사수해야겠다고 하셨거든.”
“강 변호사님 억장 무너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들려.”
물론 변호사가 아이돌이나 배우 덕질을 하는 게 무슨 문제가 있다거나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만-
매번 일에 파묻혀 지내며 좀비처럼 회사를 돌아다니던 은성이 하는 덕질이었기에 이렇게 화제가 되는 것이다.
늦바람이 원래 무섭다던가.
은성은 만나는 사람마다 도윤의 포토카드를 나눠주며 영업까지 하고 있었으니.
“그놈의 최도윤이 뭐라고…….”
은성을 남몰래-그러나 은성 빼고 모두가 다 아는- 좋아하던 강 변호사가 은성의 휴가 소식에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드디어!’
은성은 침을 꼴깍, 삼키며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시작되는.
<그 시절의 우리> 마지막화.
와작.
최고로 애정하는 카라멜 팝콘을 하나 씹으면서.
시선은 TV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어떻게 될까?’
현재 <그 시절의 우리>가 주는 긴장감은 최고조다.
‘김하나’와 처음 만난 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서윤재’.
‘이성아’와 헤어졌던 곳에서 우연찮게 다시 마주한 ‘최호준’.
네 남녀의 모습을 분할한 화면으로 비춰주며 15화가 마무리되었고.
이제 마지막 화인 16화가 시작되었다.
[……잠깐 쉬었다 이야기할게요. 아, 솔직히 여기는 이대로 말하기가 조금 그렇네요. 오래된 일인데, 아직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을 건드리는 느낌이라.]
[그때 일 물어보셨죠? 이거 대답, 절대 그 사람 귀에 들어가면 안 돼요. 10년이 지났는데도 참. 그때만 떠올리면 기분이 묘해요. 절대 나쁘다는 건 아닌데…….]
회상씬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고.
‘서윤재’와, ‘김하나’의 답변이 차례로 흘러나온다.
이어서.
[솔직히…… 그렇게 마주쳤을 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죠. 헤어진 연인을 말도 안 되는 장소에서 우연히 마주칠 확률이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죠. 저는 처음에 호준이가 거기서 절 기다린 줄 알았어요.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는 만남이니까. 그런데, 우연인 걸 아니까 이게 필연처럼 느껴지더라구요. 아, 잠시만요. 티슈 좀……]
‘최호준’과 ‘이성아’의 회상이 흘러나왔다.
‘설마 넷 다 서로 잘 되나?’
지난 화의 예고편과
지금의 분위기만 본다면.
네 사람이 잘 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지금 이 마지막 화를 시청하는 은성을 비롯한 시청자들은 어쩐지 그렇게 될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냥 막연한 느낌이 아니라…….
박정훈 작가가 착실하게 뿌려둔 떡밥과 암시 등으로 인한 것이다.
그리고.
예감은 적중했다.
[……하나야.]
[윤재야. 내가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다시…… 시작해도 될까?]
시작은 ‘서윤재’와 ‘김하나’가 마주하는 씬.
‘서윤재’는 이제 ‘김하나’가 자신에게 이별을 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깨달았다.
단순히 자신의 태도뿐만이 아니라 ‘김하나’가 자신의 커리어에 찾아온 일생일대의 기회를 찾아 떠났음을 알게 된 것.
인간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기회였고.
그때 자신은 ‘김하나’를 보듬어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사랑으로서는 아니다.
[그럼 그때…… 그렇게 말해주지 그랬어.]
[…….]
두 사람 옆으로 놓인 밤바다에 파도가 치고.
그때 아이러니하게도.
휘이익-! 파앙!
누군가 터뜨린 폭죽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러나.
축하의 의미는 아닌 것 같다.
밤바다 위, 폭죽이 터지는 광경을 배경으로.
마침내 ‘서윤재’는 마지막 이별을 고한다.
[하나야. 우리…… 함께했던 기억들 안고 가자. 계속 생각나고, 계속 아프고, 계속 힘들겠지만…… 여기까지만 하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와... 결국 헤어지는구나...
-다시 서로 잡을 줄 알았는데... 키스씬 예상한 나 무엇??
-ㅋㅋㅋㅋㅋ 우리 가족 단체로 할 말 잃어버림 ㅋㅋㅋㅋㅋ
<그 시절의 우리>를 보는 시청자들과.
은성은 할 말을 잃은 채.
‘김하나’에게 등을 돌리며 걷는 ‘서윤재’를 바라보았다.
‘서윤재’의 걸음에 따라 서서히 카메라가 줌아웃으로 멀어지며.
마침내, 주저앉는 ‘김하나’의 모습을 끝으로.
둘의 씬은 마무리된다.
“대박…….”
지켜보던 은성은 감탄했다.
혹시나 싶었는데.
정말 이렇게 될 줄이야.
여타 로맨스 장르와는 다르게.
결국 이별을 고하고 아무와도 이어지지 않는 결말이 이렇게 설득력 있게 다가온 적이 있었을까.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었다.
[나…… 확실히 안 것 같아, 호준아.]
‘이성아’와 ‘최호준’이 우연찮게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난 장소에서 마주친 씬에서는-
[우리…… 다시 만나기 위해서 마주친 게 아닌 것 같아.]
[성아야.]
[이제 확실하게 하자. 너도, 나도.]
‘이성아’는 애써 싱긋 웃으며.
[알잖아. 깨진 유리는…… 붙여도 다시 깨지는 거.]
‘최호준’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 ‘최호준’은 그 말을 들은 순간, 지금껏 드라마에서 보여준 비글미 넘치는 모습 대신.
당장에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떤다.
[호준아. 우리…… 이제 정말 각자만 생각하자.]
그리고 역시.
마침내. ‘이성아’ 역시 자신의 마음 한켠을 정리하며.
이렇게 네 명의 남녀는 서로와 이별한다.
-말이 안 나온다... 진짜 이렇게 넷 다 헤어지네..
-커플 지지자들 어떻게함 ㅋㅋㅋㅋㅋ
-근데 납득 가는 이별임ㅠㅠ... 감정이입된다...
-생각해 보면 이게 맞긴 함... 다시 만났으면 찜찜했을 것 같은데...
실시간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은성의 눈에서는 눈물샘이 폭발했다.
[어, 음…… 그때 생각을 하면 아직도 좀…… 감성적이죠. 이런 말이 있잖아요. 사랑은 잊어도, 사람은 못 잊는다.]
[다들 그래요. 지금 함께하는 사람에게 실례가 되기 때문에 할 수 없지만, 누구나 과거의 사랑을 품고 있죠. 저에게는 고마운 사람이었어요. 과분할 정도로.]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은 아니었어요. 예상은 했으니까. 그런데…… 다시는 만나기 힘들 것 같아요. 그런 사람은.]
[그 시절이…… 그립죠. 네. 그런데…… 그 시절로 돌아가겠냐고 물어본다면, 글쎄요. 저는 그런 사랑 다시 할 자신 없거든요.]
다시 현대로 넘어가 마침내 소감을 이야기하는 네 사람.
<그 시절의 우리>는.
정말 ‘그 시절’을 아련하게 그려내며.
마침내 종영을 맞이했다.
그리고.
“와…….”
드라마가 종료되고.
광고가 흘러나오는 TV를 멍하니 바라보던 은성은 깨달았다.
<그 시절의 우리>는.
자신의 인생 드라마가 될 것 같다고.
* * *
<그 시절의 우리>는 기록적인 행보 속에서 드디어 종영을 맞이했다.
네 남녀의 회고를 통해 각각의 스토리가 전개된다는 신선한 발상.
그리고 모두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일상적인 이야기와 평범하고도 진한 사랑과 이별 이야기.
그러면서도 매번 다음 화를 궁금하게 만드는 창용의 기가 막힌 연출과 박정훈 작가의 스토리 역시 호평을 받았고.
최도윤.
강수연.
박유준.
채한올.
네 배우들의 연기력엔 말할 필요도 없는 극찬이 쏟아졌다.
여기에-
[<그 시절의 우리>, 예상지 못한 결말로 마무리…… 그러나 훌륭한 엔딩]
[시청자, “이보다 더 좋은 엔딩은 없을 것” 훌륭한 극찬]
[사랑 이야기에서 성장 이야기로…… 마지막까지 생각할 거리를 남긴 <그 시절의 우리>]
네 명의 남녀가 서로 아무도 택하지 않고 각자의 길을 떠나는 엔딩으로 드라마가 마무리되었고.
이는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충격을 안기고, 동시에 호평을 이끌어냈다.
로맨스 장르 드라마의 종착지란, 늘 그렇듯 A와 B가 이어지거나 B와 C가 이어진다는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시절의 우리>가 이런 엔딩으로 드라마를 마무리하기 전까지는.
물론.
반발하는 시청자들도 있었지만.
-복선 잘 깔았네 ㄷㄷ 4화랑 10화에서 나온 서윤재 행동이 이제 이해가 됨
-현대파트에서 회상하는 장소가 알고 보니까 서로 다름 미친;;
-각도 진짜 교묘하게 해놨네 ㅋㅋㅋㅋㅋㅋ 당연히 같은 장소에서 돌아가면서 인터뷰하는 줄 알았는데
-이 정도 복선이랑 암시면 킹정이지 와...
-윤재야 하나야... 꽃길만 걷자 제발 ㅠㅠㅠㅠㅠㅠ
-아 이제 유준이 댕댕미 못 봄 ㅠㅠㅠㅠㅠ
-결국 네 남녀가 서로 이어지지 않고 서로 성장하고 각자의 길을 가는 엔딩…… 내가 본 로맨스 드라마 중에서 최고의 엔딩인 듯
대체로.
이렇게 드라마의 결말이 지닌 설득력에 고개를 끄덕이며 ‘인생 드라마’라 추켜세웠다.
그래서일까.
“건배!”
“건배애애애애!”
“나 오늘 마시고 죽는다!”
“야! 빨리 관 짜라!”
<그 시절의 우리> 종방연 분위기는 최상이었다.
<그 시절의 우리>가 그려낸 엔딩처럼.
<그 시절의 우리> 제작진과 배우들 역시 최고의 엔딩을 맞이한 셈.
김창용 PD는 이 드라마로 스타 PD가 될 발판을 마련했고.
박정훈 작가는 ‘괴물 신인 작가’의 출현을 알리며 이미 수많은 제작사가 거액의 계약금을 싸들고 차기작 문의를 하는 상황.
“진짜, 진짜 내가 예상하는데 이번 연말 시상식은 우리 배우들이 싹 쓸어간다. 내가 분명히 말했어!”
“채한올 배우랑 박유준 배우 둘 중 누가 신인상일까요?”
“대상은 당연히 최도윤이지!”
배우들에게 들리진 않았지만.
스태프들은 틈이 날 때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신들과 함께한 배우들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사실이 그랬고, 언론 역시 <그 시절의 우리>에 참여한 4인방의 수상을 점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굳이 수상하지 않더라도.
4인방은 이미 제대로 떴다.
‘김하나’ 역의 강수연은 이제 주연 배우로 확실히 입지를 다졌고.
‘최호준’ 역의 박유준은 <청춘 에세이>에 이어 또 한 번 매력적인 캐릭터를 선보이며 여성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채한올은 청순한 비주얼과 아련한 분위기 덕에 속된 말로 ‘빵’ 떠버렸고.
마지막으로 도윤은…….
“긴장할 거 없어. 쫄 필요도 없고. 그냥 서로 만나서 술 한잔하고 이야기나 좀 하면서 즐겁게 놀다 가는 거지.”
지금, 차정수의 최고급 외제차에 탄 채 강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임’.
한국에서는 정점을 찍은 배우 차정수가 도윤에게 몇 번이나 언급했던 그 모임에 드디어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뭐랄까.
긴장되거나 떨리진 않았다.
‘급’이 올라가서 그런 걸까.
아니면…….
별 기대가 없어서 그런 걸까?
“짓궂은 사람도 있고, 조용한 사람도 있어. 그냥 가서 네 이야기를 하면 돼. 나랑 카테고리가 좀 겹치긴 해도 너는 20대잖아. 안 그렇냐?”
그래도 정수는 도윤과 함께 그 모임에 간다는 사실이 못내 기뻤던 모양이다.
“사실 거기 배우는 나밖에 없거든. 이런 말은 좀 그런데, 원래 있는 집 자식인 애들이 많아요. 근데 나는 알지? 흙수저였던 거. 그래서 처음엔 애 좀 먹었고. 원래는 그만둘까 생각도 했는데…….”
그럼에도 계속 모임에 나가고.
도윤에게 권유까지 하며 모임 멤버로 정식 초대한 건-
그만한 이득이 있다는 뜻이겠지.
‘솔직히 뭔지 잘 모르겠지만.’
도윤은 회귀자다.
그래서 앞으로 몇 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안다.
때문에 사실상 돈에는 큰 관심이 없다.
원하기만 한다면.
미래에 ‘떡상’할 주식을 사두거나, 당장 비트코인을 구매해도 된다.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많은 돈을 벌고 있기에, 돈 그 자체보다는 그래서 자신의 가치가 얼마나 되느냐가 중요한 것.
거기에 사치를 부리는 데도 흥미가 없다.
만약 남에게 보여지는 걸 중요시했다면, 애초에 국산 중형 SUV를 뽑진 않았겠지.
때문에.
궁금했다.
과연.
금전적인 부분 이상으로 도움이 될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권력?
그도 아니면…….
‘국회 진출은 너무 나갔나?’
너무 우스꽝스러운 나머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그렇게 실없는 생각에 피식거리는 사이.
“내리자.”
차가 멈췄고, 도윤과 정수가 내리자 잘 차려입은 발레파킹 요원이 달려와 능숙하게 키를 받아들고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그리고 도윤은 다른 직원의 안내를 받아 정수와 함께 거대한 건물의 지하실로 향했다.
더 시그니처.
지하 입구에 도착하자 보이는 검은색 바탕에 황금색 글씨가 쓰인 간판.
보기만 해서는-
도대체 뭐 하는 곳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확인됐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죠.”
거기다 안쪽에서 풍기는 분위기를 보건대.
보통 장소는 아닌 모양.
그러나 곧.
“별거 없어. 괜히 다들 구설수 오르기 싫어서 이렇게 숨어서 만나는 거지.”
정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도윤을 안심시켰고.
그사이 한 30초쯤 걸었을까.
어느 방 앞에 멈춰선 정수는 씩 웃으며 도윤을 돌아봤다.
“긴장 하나도 안 한 것 같다?”
도윤은 대답하는 대신 어깨를 으쓱였고.
정수는 그걸 대답으로 알아들으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엄청나게 큰 공간.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
퀸사이즈 침대로 써도 무방할 소파 몇 개가 놓여 있고.
그 가운데 놓인 커다란 테이블엔 이미 술잔들이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이미 자리를 차지한 네 명 정도의 사람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린 가운데.
도윤은 네 명이 모두 아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라.
도윤이 회귀 전 ‘알고 있던’ 얼굴이다.
언론, TV 등을 보면서.
그도 그럴 게.
저기 있는 네 명은 모두…….
이 나라 각 분야에서, 이미 정점을 찍은 사람들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