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드림카
아마 남자라면 누구나.
‘드림카’라는 게 있을 것이다.
당장 현 상황에서는 탈 수 없지만.
언젠가 미래에 꼭 한번은 타보고 싶은 차.
당연히 도윤에게도 ‘드림카’는 있었다.
회귀 전 도윤이 몰던 차는 10년도 더 된 낡은 경차였다.
이른바 ‘깡통’이라 불리는 편의옵션 하나도 없는, 누군가는 줘도 안 탈 차 말이다.
사이드미러를 손으로 직접 접어야 하고 차 키를 문에 넣고 돌려야 잠금이 풀리는 그런 차.
당연히 편의 옵션은 있지도 않았다.
이제는 어지간한 차에 다 들어가는 열선 시트라든가 내비게이션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고.
심지어 가끔 운전석 문이 열리지 않아 조수석으로 빠져나와야 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도윤에겐 소중한 차였다.
가끔 퍼지기도 하고 힘이 없어 달달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 차 덕분에 도윤은 이런저런 일을 하며 버틸 수 있었으니까.
때문에.
“온다!”
도윤의 드림카는 약간 남달랐다.
“누나, 저기 와요!”
“누가 보면 네가 뽑는 줄 알겠다.”
“새 차잖아요! 누가 뽑든 무슨 상관이에요!”
그리고 성호의 환호 속.
도착한 탁송차에 보이는 건…….
“어?”
성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차였다.
성호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도윤에게 물었다.
“저 탁송차 아니죠? 로고가 이상한데.”
“맞는 것 같은데.”
그러거나 말거나 도윤은 탁송차에 다가갔다.
“기사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이고, 여기 차 대기가 쉽지 않네요. 최도윤 씨 맞죠? 어, 그러고 보니까 연예인! 연예인 맞죠? 그 드라마 나오는 배우! 우리 딸내미가 엄청 보는데!”
“맞습니다.”
도윤은 씩 웃으며 탁송기사가 내민 서류에 사인을 마쳤고.
곧장 기사가 차량 뒤로 가서 탁송차를 조작하더니 올라타 SUV 한 대를 후진으로 멋지게 빼내곤 다시 돌아왔다.
“본인이 직접 타시는 차예요?”
“네. 그런 셈이죠.”
“난 또 유명한 연예인이라고 해서 엄청 좋은 차 타는 줄 알았는데, 혹시 세컨카 뭐 그런 건가?”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게 제 첫차입니다.”
“어이구, 첫차? 검소하시네. 하긴, 요새는 국산도 잘 나온다니까 뭐. 참, 괜찮으면 사인 한 장만 부탁해도 돼요? 우리 딸내미가 맨날 노래를 불러서…….”
“물론입니다.”
그렇게 도윤이 사인을 하고 사진을 찍는 사이.
현실을 부정하는 성호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진짜 형 드림카가 저 차예요……?”
도윤은 뒤를 돌아보더니 피식거렸다.
“왜, 실망했냐?”
“네, 완전…….”
하긴.
그럴 만도 하다.
그렇게 알려달라고 해도 안 알려주고 애를 태웠는데.
막상 뽑은 건 국산 SUV였으니까.
하지만.
이건 정말 도윤의 드림카였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 목표였었으니까.’
오만하던 시절.
도윤이 몰던 차는 이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멋지고 비싼 차였다.
하지만 몰락한 후 그 차들은 모두 처분해야 했고.
도윤은 결국 추락을 거듭하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그 낡은 경차 한 대를 간신히 몰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오만하던 시절에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이 차가 너무도 갖고 싶었다.
나름의 드림카라고 해야 할까.
만약 저걸 산다면.
자신이 비로소 배우로 다시 서게 된 거고.
어려움을 극복해냈다는 증표가 될 것 같았으니까.
“차 좋은데요. 요새는 국산도 잘 나온다던데. 디자인도 괜찮고. 로고는 좀 마음에 안 들지만요.”
“민주가 뭘 좀 아네.”
도윤은 성호와 달리 심드렁한 표정이지만 칭찬하는 민주를 보며 엄지를 세워 주었다.
“누, 누나는 안 아까워요? 대표님이 뭐든 다 뽑으라고 했는데?”
“무슨 상관이야. 내가 뽑는 것도 아니고, 오빠가 타고 싶은 거 타는 거지.”
“그래도…….”
성호는 울상이었다.
차에 관심이 그렇게 많은 녀석이니.
저럴 법하다.
그리고 솔직히, 민주라 이런 거지 어지간해서는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정상일 것이다.
이엔 엔터가 이제 돈 없는 회사도 아니고.
심지어 동민이 사비로 하나 뽑아주겠다고 했는데, 다른 차 다 제쳐두고 국산 SUV라니.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독일 3사든 그 윗급의 외제차든 하나 뽑는 게 정상일 텐데.
굳이 국산을 가겠다면 최상위 등급 차도 있을 텐데.
하지만.
도윤의 눈에는 그 어느 차보다 예뻐 보였다.
‘지금 봐도 예쁘네.’
어차피 어디 갈 때 매번 운전은 성호가 하는 데다가.
도윤의 취미가 드라이브인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냥 이동수단의 의미라고 해야 할까.
그런 면에서 옵션이 충실하게 들어간 이 차로도 아주 충분했다.
스윽.
천천히.
손가락으로 반짝거리는 새 차를 쓸어내리던 도윤은 차 문을 열며 둘을 바라봤다.
“시승식 안 할 거야?”
민주는 곧바로 뒷좌석에 탔고.
성호는 여전히 현실을 부정하는 표정으로 있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 얼른 조수석에 올랐다.
“형 진짜 검소하네요.”
“그렇게 보일 건 생각 못 했는데.”
“혹시 노린 건 아니죠?”
도윤이 피식거렸다.
그런 비슷한 이미지를 노릴 생각이었으면.
차라리 봉사활동을 하고 보도자료를 뿌리거나 에코백을 들고 다녔을 것이다.
여하튼.
도윤은 비닐조차 뜯지 않은 시트에 앉더니 버벅거림 없이 시트 위치를 조정했다.
그리고.
쿠르르릉!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능숙하게 시동을 걸었다.
마치 한번 타본 것처럼.
물론 시동 거는 거야 차가 다 비슷하니 대충 봐도 안다지만.
“……어?”
각종 옵션들을 능숙하게 만져보고 기능 몇 개를 간단히 조작하더니 곧장 기어를 당겨 엑셀을 밟는 모습은.
꽤 오래도록 운전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부우우우웅!
곧 차체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가더니.
적절한 타이밍에 차량 대열로 합류하고 부드럽게 멈춰 섰다.
그리고 신호를 받고 출발하는 것 역시 아주 부드러웠으며.
결정적으로 긴장한 기색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민주가 감탄했다.
“오빠 운전 부드러운데요. 옆에 타면 금방 자겠다.”
그리고 성호는 당황해 버렸다.
“……형, 면허 따고 운전 거의 안 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었지.”
도윤은 어깨를 으쓱이며 한마디 툭 던졌다.
“근데 해보니까 뭐 별거 없네.”
성호는 결국 크게 좌절해 버렸다.
* * *
좌절한 성호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무렵.
<그 시절의 우리>는 고공행진 끝에 14화에서 32%의 기록적인 시청률을 달성했고.
이미 또 한 번 신화를 쓰고 있었다.
특히, 방송사 측에서 크게 기뻐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그 시절의 우리>, 제작진 및 배우들 전원 포상휴가 떠난다!]
[‘사장 특별지시’, <그 시절의 우리> 팀. 포상휴가 받다!]
[‘2년’ 만의 30% 시청률…… 공중파의 저력 보여준 <그 시절의 우리>!]
무려 포상휴가가 떨어졌을 정도다.
안 그래도 ‘드라마 천국’이라 불리던 DBS는 옛 명성을 되찾지 못하고 이제 ‘지는 해’라 불리고 있었는데-
<그 시절의 우리>가 시청률 30%를 기록, 각종 광고를 완판시키고 커다란 수입을 가져다준 것.
덕분에 <그 시절의 우리> 팀은 환호했고.
“세상에, 하와이래! 하와이!”
“살다 살다 DBS에서 해외여행 보내주는 걸 다 보네. 사장님 혹시 무르시는 거 아니겠지?”
“에이, 그랬다간 내가 사장실 처들어간다!”
“퍽이나.”
도윤도 난생처음 해외여행을 간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원래대로였다면 가족들과 가장 먼저 갔겠지만.
일정이 안 겹치니 뭐, 아무래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운동해 두길 잘했는데.’
도윤은 이젠 윤곽이 꽤 선명하게 잡힌 복근을 만지작거렸다.
12월에도 평균기온이 20도를 넘어가는 하와이.
그간 헬스장이 아니면 몸 자랑할 일이 전혀 없었는데,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역시, 운동해 두길 잘했지 말입니다.”
물론 기뻐하는 건 도윤뿐만이 아니었다.
“너 2개월 하다가 때려치웠잖아.”
하지만 도윤이 알기로 유준은 운동을 할 때만큼은 의지박약이었다.
유준이 당황해 외쳤다.
“그, 그건…… 지금부터라도 다시 다닐 거지 말입니다!”
“퍽이나.”
도윤은 뒤늦게 의지를 불태우는 유준을 보며 피식거렸다.
이런 가운데.
“저 제주도도 안 가봤는데…… 너무 떨려요!”
한올은 무척이나 솔직하게 기뻐했다.
너무 기뻐한 나머지.
벌써부터 안절부절못한다는 게 약간의 문제였지만.
“무슨 문제 있어?”
“해외여행 가려면 여권 필요한데…… 혹시 늦게 나오면 어쩌죠?”
참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아무튼.
드라마, <그 시절의 우리>는 현재 역대급 성공을 거두고 있었고.
그에 걸맞은 보상도 약속받았다.
거기다.
“이만하면 연말 시상식 우리가 다 먹겠지?”
“말이라고 하냐? 여기 배우들이 싹 쓸겠지.”
“DBS에서 올해 된 게 이거밖에 없으니까 뭐, 당연하겠지.”
“이래서 드라마는 연말에 맞춰서 종영시키라는 말이 있는 거라니까.”
“대상은 무조건 최도윤?”
“말이라고 하냐?”
스태프들 사이에서 도윤은 유력한 대상 후보로 꼽히고 있었다.
공중파 방송 3사에서 동시에 진행하는 데다, 줄 사람이 없으면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주는 상이라 요즘 들어 그 권위가 떨어졌다고 할지언정.
이제 20대 중반인 배우가 유력한 ‘대상’ 후보로 언급된다는 건 결코 가볍게 볼 만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DBS에서 올해 성공한 드라마가 <그 시절의 우리>밖에 없다지만-
아마, 성공한 드라마가 있었어도 도윤이 언급되는 건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물론 도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드라마를 마치는 게 중요하지.
벌써부터 김칫국을 마실 필요는 없다.
“자자. 진정들 하고 이제 촬영 다시 준비합시다! 우리 드라마 아직 안 끝났습니다! 이러다 막판에 조지면 발리가 아니라 부곡 하와이로 갈 수도 있어요!”
창용의 말마따나.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혹시라도 막판에 망해서 부곡 하와이에 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한다.
그나저나.
<그 시절의 우리>는 <그 남자의 메모리>가 그랬던 것처럼 대본을 무슨 수능 시험지 운송하듯 철저한 보안 속에 감추고 있었다.
원래는 그럴 계획이 없었다는데.
드라마 인기가 올라가며 긴급하게 내린 결정이었다.
덕분에 도윤도 ‘서윤재’가 마지막까지 누가 누구와 이어질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옛 연인이자 자신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던 이유를 품은 ‘김하나’일까?
아니면, 새롭게 찾아온 사랑이자 현시점에서 긴장감을 뿌리는 ‘이성아’일까?
그도 아니면…….
“대본 왔습니다!”
그때 들려오는 외침.
드디어 도착한 마지막 화 대본.
“자, 우리 최 배우.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PD님.”
<그 남자의 메모리> 때처럼, 잘 봉인된 상자가 열리고 가장 먼저 대본을 건네받은 배우는 도윤이었다.
도윤은 대본을 확인하며.
묘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배우들도 마찬가지.
‘김하나’ 역의 강수연은 상당히 심각한 표정이었고.
‘최호준’ 역의 유준은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이성아’ 역의 한올은…….
‘아…… 결국.’
‘이성아’가 끝내 ‘서윤재’와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고개를 떨궜다.
‘이성아’는 한올의 첫 배역이다.
그래서 누구보다 몰입해서 연기했고, 스스로 ‘이성아’의 삶을 산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푹 빠져 지냈었는데-
이런 결말을 마주하니 너무도 아쉬웠다.
극중 ‘이성아’는 ‘서윤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만을 보내왔기 때문에 더더욱.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심이었다.
“한올아…… 진짜 이거 괜찮을까?”
대본의 결말에 유준은 울상을 짓고 있었지만.
차라리 이게 나았다.
‘서윤재’가 이제 더 이상 고통받지 않아도 되니까.
‘김하나’.
‘이성아’.
어느 한쪽과도 이어지지 않는 결말이었던 것이다.
“자자. 스탠바이는 2시간 뒤에 들어갑니다! 그때까지 준비해 주세요!”
이제.
결말은 나왔고.
배우들은 이에 따라 움직여야 할 때.
도윤은 창용의 외침에 자리에서 일어난 뒤.
마침 자신과 눈을 마주친 박정훈 작가를 보며 씩 웃었다.
아무 걱정 하지 말라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