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그만하면 충분한데요
또 하나의 일이 해결되었지만.
그런 일과 관계없이 <그 시절의 우리>는 순풍에 돛을 단 듯 부드럽게 나아가며 시청률 갱신을 거듭했다.
9화 29%.
10화 30%.
이제는 공중파에서도 힘들다는 마의 30% 고지를 넘어서자-
[<그 시절의 우리>, 훈훈하고도 아련한 로맨스의 성공……]
[‘최도윤 출연=성공’ 공식 이어진다]
[신인 작가 박정훈의 독특한 각본…… 새롭게 해석한 로맨스의 선율!]
기사가 쏟아지고.
쉴 새 없는 극찬이 이어졌다.
<대책없는 로맨스>가 조기종영되고 긴급 편성된 <너의 기억 속에서>는 별 힘을 못 쓰는 가운데
<그 시절의 우리>는 왕좌의 자리를 완벽하게 지켜내고 있었다.
팬들 사이에선 벌써부터 블루레이 소장판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고.
드라마의 성공을 분석하는 다양하고도 진지한 의견도 나왔다.
-이게 일상적인 로맨스가 맞긴 한데 긴장감이 아예 없는 게 아님. 딱 봐봐. 매 편 시작할 때 현재 시점에서 네 사람이 회고하고, 그 회고에 맞춰서 우리가 본편 내용 보고 예측하잖아?
-ㅇㅇㅇ 누가 누구랑 이어질지 보는 재미가 있음. 그렇다고 막 꼬는 것도 아니고, 막장드라마처럼 네 사람 사이에서 헤어졌다 결합했다 하는 것도 아님.
-개인적으로는 네 배역 이야기를 전부 비중 있게 보여줘서 그렇다고 생각함. 수동적인 인물이 하나도 없음.
-배우들 연기도 개쩔지 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이거 보는 내 인생이 레전드다 ㅋㅋㅋㅋ
신인 작가 박정훈이 쓴 각본의 뛰어남이야 이제 말하면 입 아픈 사실이고.
로맨스에 딱 알맞은 김창용 PD의 연출 구도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그 각본과 연출을 완성시킨 건 배우들이다.
강수연.
박유준.
채한올.
3인방은 제각기 다른 색을 보여주며 구멍 없이 멋진 연기들을 펼쳐주고 있었고.
특히.
이전의 어둡고, 차갑고, 까칠한 이미지를 완벽하게 벗어던지며 일명 ‘워너비’로 등극한 도윤의 연기는 최고였다.
-ㅋㅋㅋㅋㅋㅋ 우리조카 더뉴보이즈 탈덕하고 최도윤 입덕함 ㅋㅋㅋㅋㅋ 8살짜리임 ㅋㅋㅋㅋㅋ
-도라떼 3호는 언제 나오나요?
-아 팬사인회 또 언제하냐 ㅋㅋㅋ 가서 또 드립치고 싶다!!!
-근데 로맨스 연기 왜 이리 찰떡임? 연애를 한 만 번은 해본 사람 같네
-찌질한 모습도 엄청 귀여움 ㅋㅋㅋㅋㅋ 내 남친이 저랬으면 바로 싱글벙글하며 용서해 준다 ㅋㅋㅋㅋ
-여자친구랑 같이 드라마 보다가 헤어질 뻔했읍니다... 이 드라마... 넘모 위험합니다...
-ㄹㅇ 애인이랑 보면 안 됨 ㅋㅋㅋㅋㅋ
그저.
이제는 누구도 토를 달 수 없다는 것만 또 한 번 증명되었다.
지금 젊은 배우들 중 최고는 최도윤이라는 사실에 말이다.
그런 덕인지 최도윤 팬카페 신규 회원 가입 숫자가 나날이 늘어가는 가운데-
드디어 도윤의 팬카페 <달달한도라떼>에서 주최하는 첫 팬사인회 날이 다가왔다.
민주가 저번에 했던 말처럼.
이제 슬슬 공식 팬카페 팬사인회 한번 열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그 한마디에 수철이 기다렸다는 듯 마케팅팀에 기획을 지시했고.
순식간에 공지가 뜨고 추첨까지 완료해 장소 대관 및 행사까지 빠르게 세팅했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고.
“신청자만 1만 명이 넘고 초대받은 사람만 500명이야. 오늘 도윤이 팔 빠지겠는데?”
수철은 마냥 싱글벙글이었다.
“다음에는 규모를 좀 늘려도 될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참, 다음에는 박 실장이 한번 해볼래? 도윤이도 도윤인데 나중에 다른 연예인들 팬사인회 생각하면 계속 내가 담당하긴 그래서.”
“하하. 맡겨만 주세요.”
500명.
엄청난 규모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적은 규모도 아니다.
500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장소를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고-
이렇게 일사천리로 잡음 없이 행사를 주최하는 건 더더욱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
심지어 이엔 엔터는 이런 식으로 팬사인회를 개최한 이력이 단 한 번도 없는 회사.
그런 의미에서.
수철의 능력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동민의 말마따나.
수철이 정말 배우로 복귀하면 당장 이엔 엔터 업무가 모조리 마비될 테니까.
이런 가운데.
“근데 도윤이 표정은 왜 저러냐. 생전 긴장 안 하는 녀석이.”
수철은 이상할 정도로 긴장한 도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대로라면 옆에서 코디해 주는 민주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롭게 굴 녀석이.
오늘따라 상당히 경직되어 있다.
“아, 그거요? 도윤이 팬들이 좀 특별…… 아니, 특이하잖아요.”
“특이해? 아, 혹시 그거? 도윤이 울먹거리던 영상?”
이렇게 팬사인회를 개최하고 심지어 추첨까지 해서 참가자를 가려야 할 만큼 도윤의 인기가 대단한 건 맞지만.
정작.
연예인 본인은 평소와 달리 잔뜩 긴장한 이 아이러니함.
여하튼 도윤은 오늘.
“오빠! 오늘은 안 울 거죠?”
“꺄아아아아아악!”
인생 최초로.
개인 팬사인회를 앞두고 있었다.
‘침착하자.’
만반의 준비를 해온 팬들과-
이에 맞서 그간의 모든 주접 사례들을 연구하고 정리한 뒤 단단히 대비한 도윤의 시선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연예인이랑 팬클럽은 아니야.”
지켜보던 민주의 그 한마디처럼.
어떻게 도윤을 울먹거리게 만들까 고민하는 팬들과.
그런 팬들에 맞서 최대한 덤덤한 표정을 짓는 도윤의 모습은 뭐랄까.
일반적인 팬사인회 느낌은 전혀 아니었다.
“오늘도 수첩 준비 완료했습니다.”
“성호 너 종신계약 아니야? 뒷감당 되겠어?”
“그러니까 이제 막 나가려고요. 몰라요. 이제 갈 곳도 없는데.”
될 대로 되라는 듯.
이제 막 나갈 것을 선포한 성호의 중얼거림이 들려오는 가운데.
도윤은 마침내 긴장된 기색으로 첫 번째 팬을 맞이했다.
그리고.
“오빠. 오빠 영어 이름 있어요?”
“영어…… 이름이요?”
“네. 없으면 하나 제가 지어드릴까요?”
시작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네, 뭐. 하나 부탁드릴게요.”
최대한 긴장한 티를 안 내려 무심하게 답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조지 부시’ 어때요?”
“……네?”
“내 마음을 ‘조지’고 ‘부시’니까.”
시작부터 넉다운되고 말았다.
* * *
팬사인회가 성황리에 끝나고.
도윤은 또 한 번 화제의 주인공이 되었다.
삼백 번째였나.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팬 앞에서 울먹이며 저한테 왜 이러시냐고 얼굴을 묻어버린 영상이 유튜브 화제의 동영상 탭에 올라간 것이다.
덕분에 도윤의 팬카페, <달달한도라떼>에선 도윤을 만나면 써먹을 다양한 주접들이 연구되고 있었다.
특히.
이번 팬사인회에 당첨되지 못한 팬들은 더더욱 전의를 불태우며 다음에 당첨되면 무조건 20개 이상씩은 준비해 가겠다는 각오를 다져댔다.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그러니까요.”
결국 사인회라도 하는 날에 즐거운 건 역시 민주와 성호뿐.
특히, <달달한도라떼>의 부매니저인 민주는 팬들의 반응을 보는 게 취미가 됐을 정도로 아주 즐거워했다.
성호야 뭐.
“형, 덥지 않아요?”
“지금 10월이다.”
“에이, 형이 너무 빛나서 더운 것 같은데.”
늘 그렇듯, 목숨을 걸었고.
구두 종신계약을 맺은 후 반쯤은 막 나가는 것 같았다.
물론.
“형, 형. 스, 스톱! 스토옵!”
“민주야. 문 닫아. 날 잡아야겠다.”
매번 이렇게 응징이 뒤따랐지만 말이다.
“오빠. 오늘도 선물 산더미네요.”
도윤은 성호를 내팽개치고 선물이 쌓인 곳으로 다가갔다.
모두, 도윤의 팬들이 보내준 선물이다.
그러나 도윤의 표정은 그리 좋지만도 않았다.
“나중에 카페에 내가 직접 공지해야겠다.”
“어떻게요?”
“선물 최대한 안 받고, 받아도 2만 원 이하로 받겠다고.”
선물을 받는 것도 좋고, 그 마음도 고마운 일이지만.
도윤은 이렇게 고가의 선물을 받는 걸 원치 않았다.
팬심은 고맙다지만…….
수백만 원에 달하는 선물을 살 돈으로 차라리 다른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가령.
“성호야. 시간 나는 대로 사정 어려운 보육원 몇 군데 알아봐.”
이런 식으로.
“기부하시게요?”
“어. 다음부터는 선물 주지 말고 기부해달라고 부탁하게.”
도윤은 어린 시절 부모님은 잃었다.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
물론 친구 동하의 부모님 덕분에 부족함 없이 잘 자라났지만.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아직 어렴풋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그래서 잘 알았다.
부모님이 이 세상에 없는 게.
무슨 느낌인지.
홀로 남겨지는 게 무슨 느낌인지.
“좋네요. 저도 알아볼게요.”
민주도 도윤의 의도에 맞장구쳤다.
여하튼.
모든 게 순조로웠다.
드라마는 또 한 번 승승장구 중이고.
도윤뿐만 아니라 한올과 유준 역시 잘 되고 있었으며.
도윤은 이제 어떤 드라마나 영화도 골라서 갈 수 있을 만큼의 명성을 얻고 있었다.
물론 영화 쪽은 사정이 조금 다르고, 도윤이 영화 커리어가 아직 하나밖에 없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감독도 있겠지만.
“오늘도 풍년이구만.”
지금, 이렇게 이엔 엔터 사무실로 날아들어 도윤에게 전달되는 시나리오만 봐도 ‘골라서 간다’라는 말은 정확할 것 같았다.
“도윤이 너 드라마 촬영이…… 11월에 끝나지?”
“네. 종방은 12월이요.”
“다음은 어떻게 할래?”
도윤은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시나리오를 보고 의외의 답을 내놓았다.
“몇 달 쉬려구요.”
“그, 그래?”
아쉬워하는 게 아니라.
놀라움에서 비롯된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내 수철은 잘 생각했다는 듯 도윤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그래. 적당히 쉬기도 해야지. 또 계속 활동하면 이미지 소모가 심해지니까. 이참에 부모님 모시고 여행이라도 다녀오든가. 12월이면 시상식이랑 이것저것 마치고 1월 되면 딱 방학이네. 타이밍도 좋다야.”
수철의 말처럼.
가족들이랑 여행을 가려면 동하와 리나의 일정을 고려해야 한다.
물론 둘은 해외여행이라면 휴학이라도 때리고 갈 녀석들이지만.
그랬다간 어머니와 아버지 두 분에게 먼지 나게 털릴 게 뻔하니.
‘쉬긴 쉬어야지.’
회귀 후.
<그대 내 품에>부터 현재 <그 시절의 우리>까지.
거의 휴식 없이 쉼 없이 달려왔다.
그래서 최근 휴식의 필요성을 느끼긴 했다.
“이참에 쉬면서 좀 이것저것 보고 돌아다니고 그래. 국내는 가지 말고. 너 정도면 이제 어딜 가나 민폐다. 알지?”
수철의 말이 맞다.
유명 연예인들이 TV에 나와 단골 레퍼토리로 말하는 것처럼.
자신 때문에 인파가 몰리면 그때부터는 더 이상 휴식이 아니게 된다.
“아무튼 계획 세워지면 말하고.”
“네, 그럴게요.”
도윤의 차기작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제작자들이 오열할 결정이 내려진 가운데-
다음날도 도윤은 촬영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 열심히 대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만.
오늘은 평소보다 좀 더 일찍 왔다.
촬영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니.
스태프들도 막 도착한 건지 도윤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지금이 몇 시야?”
“심하게 열정적인데.”
그러다 스태프 한 명이 알았다는 듯 손뼉을 마주쳤다.
“맞아. 오늘 중요한 촬영 있다고 들었는데.”
“응? 무슨 촬영?”
“노래방 씬.”
“노래방 씬? 뭐 흔드는 연기라도 한대?”
“그게 아니라, 음치 연기.”
“아.”
그제야 스태프는 도윤이 맡은 배역, ‘서윤재’의 캐릭터를 떠올렸다.
부드럽고, 낭만적이고, 아픔을 간직한 캐릭터지만.
한편으로는 코믹한 면도 지닌 캐릭터.
그중 하나가 바로 ‘음치’ 캐릭터다.
“그 왜, 있잖아. 음치 연기가 의외로 엄청 어렵대. 그래서 일찍 와서 연습하나 봐.”
“하긴, 박자 일부러 안 맞추는 것도 엄청 힘들어. 그리고 최도윤 배우 노래도 잘하잖아. 저번에 피처링한 거 들어봤는데, 대박.”
그래서 스태프들은 큰 오해를 하고 있었다.
도윤이 너무 노래를 잘하는 나머지 음치 연기에 애를 먹을까 봐 미리 와서 연습하는 거라고.
하지만.
“어우, 이게 아닌데.”
“……형, 그만하면 충분한데요.”
“아니야. 이거 그대로 나가면 이게 무슨 음치냐고 할걸?”
“…….”
그 연기는 이미 완성된 지 오래였고.
그 사실은 도윤만이 모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