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쟤는 뭐 하냐
[이상곤. 26세. 한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3학년이네요.]
문자가 도착했고.
골목 근처에서 대기하던 도윤은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채한올 배우는요?]
[상태 괜찮습니다. 마음 단단히 먹은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요. 결정은 그쪽에 맡기죠. 때린 데는 없죠?]
[멱살 살짝 잡았습니다. 알아서 기던데요.]
웃음이 흘러나온다.
하긴.
그 희미한 불빛만 있는 곳에서 두칠을 마주하고 어느 누가 겁을 안 먹을까.
[돌발상황 있으면 바로 연락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여하튼.
‘작전’은 성공했다.
사실 작전이라 하기에도 뭐할 만큼 간단한 일이었지만.
스토커들이 원하는 건 자신의 행위에 스토킹 대상이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괴로워하거나, 아파하거나, 혼란스러워하거나.
하지만 그간 한올의 번호가 바뀌고 두칠이 경호에 나서면서 이상곤은 한올에게 접근할 수 없어 미칠 지경이었으리라.
뭔가 접근해서 어떤 일을 해야 반응을 보일 텐데.
그럴 수 없었으니까.
그러던 차에 두칠이 잠시 한올의 곁에서 사라졌다.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적인 것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급했겠지.’
그러다.
결국 함정에 걸려들었다.
아주 보기 좋게.
“저희 할 일이 없겠는데요?”
그리고 성호의 말처럼.
두칠이 쭉 지켜보고 있다가 타이밍 좋게 나서준 덕분에 두 사람이 할 일은 없어졌다.
물론.
이 계획을 세운 건 도윤이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일이다.
한올의 결정을.
평소 소심하고, 정이 많은 성격을 생각해 보건대 어쩌면 그 자리에서 스토커를 보내줄 수도 있겠지만.
글쎄.
도윤이 생각하기로-
한올은 분명 달라졌다.
처음 봤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 * *
두칠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뒤.
다시 이상곤에게 다가갔다.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며 엉엉 우는 모습이 참 추해 보였지만.
두칠은 그런 모습에 동정심을 품을 만큼 무른 사람이 아니다.
두칠이 그 거구를 천천히 쪼그리더니 이상곤을 바라봤다.
“우리 친구, 그거 알아? 나는 너 같은 인간들이 제일 싫어.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줘야지. 안 그래?”
“허윽. 마, 맞습니다.”
“그걸 아는 놈이…….”
쾅!
“이런 사람 마음을 아프게 해?”
후두둑.
주먹을 떼자.
우수수 떨어지는 벽돌 조각.
이상곤은 기겁하며 머리를 숙였다.
“히끅! 죄, 죄송합니다!”
“나한테 할 거 없고.”
두칠은 고개를 돌려 한올을 바라봤다.
“이쪽에 해야지.”
한올이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싸늘한 눈길로 이상곤을 내려다봤다.
당연하게도-
한올은 모른다.
도윤만이 아는 미래에서, 자신이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상곤이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한다는 사실도.
하지만.
이 스토커의 존재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는 같다.
그래서 결심했다.
“자, 자기…… 아니, 한올아. 내, 내가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정말 자, 잘못했어. 나 앞으로 어디 가서 네 이야기도 안 하고 쥐 죽은 듯이 살 테니까…….”
“이미 늦었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로.
“내가 말했었지. 제발 그만하라고. 근데 넌…… 그때마다 나한테 사랑한다고, 제발 다시 만나자고, 우리 아직 헤어진 거 아니라고…… 솔직히 미칠 지경이었어. 너한테 연락 올 때마다. 그리고 그림자만 봐도 기절할 것 같았고.”
떠올리기만 해도 트라우마로 온몸이 떨릴 일들을…….
아주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한올의 눈은 놀랍도록 무서웠다.
옆에 있던 두칠이 순간 움찔할 만큼.
지금껏.
매번 자신을 걱정해 주던 한올의 모습만 봐 와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놀라기는 이상곤도 마찬가지.
‘이, 이럴 수는 없어.’
그는 현실을 부정했다.
자신이 아는 채한올은.
항상 자신이 하자는 대로 하고.
조금만 세게 나가도 고개를 끄덕이는.
그냥 소심하디 소심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지금 자신의 목줄을 쥔 채 저렇게 싸늘히 말하고 있었다.
거기에.
“난 너 용서 못 해.”
사형선고까지 내렸다.
“하, 한올아 제발…….”
“내가 겪은 고통, 똑같이는 아니어도 다르게 겪어봐.”
한올은 곧장 두칠에게 캠코더를 넘겨받고 그걸 들어 보였다.
“이거 보여? 여기 안에 다 담겨 있어. 네 얼굴도 찍혔고. 이것뿐만이 아니야. 너 나한테 전화한 거, 문자한 거, 택배 보낸 거. 전부 다 보관해두고 있어.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한올아, 한올아! 내, 내가 잘못했어! 아, 앞으로 얼씬도 안 하고 쥐죽은 듯이 살 테니까 제발…… 형님! 형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엉엉 울며 이상곤이 엉금엉금 기어가던 그 순간이었다.
“이익!”
한순간 이상곤이 벌떡 일어나며 한올이 들고 있던 캠코더로 손을 뻗었지만.
턱.
“이 새끼 봐라.”
그보다 훨씬 더 빠르게 움직인 두칠의 손에 가로막혔고.
“정신 못 차렸네.”
콰당!
이상곤의 몸은 내동댕이쳐져 볼썽사납게 바닥을 뒹굴었다.
이상곤은 흐느끼며 어깨를 들썩였다.
하지만 동정심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고.
오히려 소름이 끼친다.
이 상황에서도 그런 짓을 하려고 했다는 게.
때문에 한올은 더 굳게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연기’가 아니었다.
“난, 너 용서 못 해. 이상곤.”
진심이 담긴 차가움이 호흡에 묻어나왔고.
그 말을 들은 이상곤의 등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 *
“채한올 배우님! 아주 좋습니다! 이별을 고하는 연기, 훌륭했습니다!”
촬영장에 힘찬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역시나 오늘도, 김창용 PD는 흐뭇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터뜨렸다.
“역시, 최고야. 최고. 4인방이 진짜…….”
“채한올 배우님 오디션 안 봤으면 어떻게 할 뻔했어요.”
옆에서 박정훈 작가가 맞장구를 치는 것처럼.
종종.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현재 연기하는 배역을, 이 배우가 아니면 상상할 수 없는 순간.
한올이 연기하는 ‘이성아’가 그랬다.
신인답지 않은 발성과 디테일한 연기, 거기에 완벽한 마스크가 어우러져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내뿜는다.
창용이 알기로.
현재 한올에게 쏟아지는 러브콜은 한두 건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채한올은 예약된 배우다.
라이징이 예약된 배우.
‘다음 작품이 더 기대되는데.’
어떤 PD나 감독이 찍을지도 모르고, 자기 드라마 신경 쓰기도 바쁜 와중에 다음 작품이 기대되기는…….
참 오랜만이다.
이런 가운데.
도윤은 웃고 있었다.
그날 이후.
확실히 달라진 한올의 모습에 말이다.
아직 소심함을 완전히 벗어던진 건 아니지만-
점점 당당해지고 있었고,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게 좀 더 자연스러워졌다.
아마.
원래 예정된 미래보다 일찍 극단을 나오게 된 것과.
며칠 전 겪었던 스토커와의 그 일 덕분이겠지.
쉽게 말해.
이제 우려하던 미래는 완전히 사라진 셈.
그리고.
한올에게 도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은인이 된 모양이다.
“저, 선배님.”
“또 감사합니다, 하려고?”
다만.
지금 이 모습이 그렇듯.
감사함이 차고 넘쳐서 그런지 며칠 사이 감사하다는 말만 몇 번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한 번 했으면 됐잖아? 누가 보면 네가 큰 죄 지은 줄 알겠다.”
“……감사합니다.”
“또, 또.”
짐짓 다그치는 말투였지만.
도윤의 표정 역시 밝았다.
“감사하다는 말, 너무 많이 해도 안 좋아.”
“아,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아무래도.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긴 하다.
도윤은 한결 편한 걸음으로 멀어지는 한올을 보며 생각했다.
물론 불안요소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이상곤.
“진짜 기사는 하나도 안 떴네요.”
“원래 그런 일들은 내부적으로 덮거든. 학교 쪽에서도 재학생이 스토커라는 걸 밝혀봐야 좋을 일이 하나도 없으니까.”
기사 한 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에 놀라는 성호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는 민주.
이상곤은 빠르게 제적 처리당했다.
증거를 모아 소속사가 학교 쪽에 제출한 덕분이다.
거기에 이상곤이 자신의 행동을 인정해 버렸고.
학교는 결국 제적 처분을 내렸다.
단.
학교 측의 이미지 문제도 있고.
스토커에 시달려왔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배우 역시 알게 모르게 타격을 입을 테니.
그쪽에서 합의점을 찾아낸 것.
“그럼 그 스토커 놈은 어떻게 되는 거죠?”
“쥐죽은 듯 살아야지. 개명하고 새 삶 살든가. 적어도 그쪽 바닥에서는 더 이상 얼굴 못 들고 다니겠지.”
수많은 협박 문자.
수백 통의 부재중 전화.
수십 건의 택배.
그리고 계속해서 한올을 미행했던 것까지.
증거는 차고 넘쳤고.
결국 이상곤은 걸맞은 결말을 맞이한 셈.
그런 의미에서.
촬영을 마치고 잠시 의자에 앉아 쉬는 한올의 표정은 참 밝아 보인다.
“근데 사람이 미치면 또 무슨 짓 할지도 모르는데.”
“그대로 용서해 줬으면 더 심했을걸.”
민주의 말마따나.
거기서 한올이 마음이 약해져 그냥 보내줬다면-
결국 피해를 본 사람은 한올밖에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상곤을 처벌한다 한들.
협박 문자에 시달리고.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에 떨고.
그림자를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는 기억은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이상곤이 용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도윤이 아는 미래와 달리.
한올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인 것이다.
‘잘된 일이지.’
용서해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바엔.
용서하지 않고,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실제로 이상곤은 스토커 신고를 했으면 받았을 처벌보다 더한 처벌을 받았다.
기사만 안 나왔지, 이상곤에 대한 소문은 분명히 교내에 퍼졌을 것이고.
‘사회복지사를 꿈꾸던 교우 관계 좋은 이상곤’의 인생은 끝났을 테니까.
“아무튼 형이 또 한 건 했네요.”
그리고 성호의 말에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어디 가서 함부로 하지 마라.”
“왜요, 계획 짠 건 형인데.”
“근데 말을 한 사람은 내가 아니잖아.”
도윤은 확실하게 선을 그어 두었다.
이건 자신이 아니다.
한올이 해낸 일이다.
도윤이 계획을 짰다고 한들…….
한올이 그 자리에서 이상곤을 또 한 번 용서했다면 모든 일이 되풀이됐을 테니까.
“그래도 오빠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안 변해요.”
그러나 이번만큼은 민주도 성호의 말에 동의했다.
민주가 본 도윤은 그랬다.
냉철하고, 자기 일에만 집중하는 사람처럼 보여도.
주변 사람들을 은근히 신경 쓴다.
티가 잘 안 날 뿐이지.
물론.
그런 수준을 넘어 도윤이 여러 사람의 인생을 바꿨다는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었지만.
“참, 오빠. 솔잎의 눈 고마워요. 세 박스나 사주실 줄은 몰랐는데.”
“많이 마시고 협찬 따 오라고 사주는 거야.”
“그럼 다음 작품에선 한 50벌 따 올까요?”
식은땀이 흐른다.
도윤은 방금 한 말을 후회해 버렸다.
역시.
민주한테는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게 낫다.
성호한테 하는 거라면 모를까.
“근데 형, 장 프로님은 어떻게 하시는 거래요?”
그런 와중에 성호는 지금 한올 못지않게 ‘모두’의 관심을 받는 두칠의 거취를 물어왔다.
“계약 기간 끝나면 바로 가신대.”
아쉽게도.
두칠은 계약 연장 의사를 밝히지 않았다.
일이 마무리되고 보고를 받은 수철이 이엔 엔터 전속 경호원은 어떠냐며 은근히 권유했지만.
[저는 꽃 만지는 게 좋아요.]
-라며 수철은 멍하게 만들었던 두칠.
“이쪽 업계로 나오시면 떼돈 벌 것 같은데.”
성호 역시 아쉽긴 매한가지다.
실력뿐만 아니라 성격도 좋은 두칠이었고, 그사이 정이라도 붙은 모양이다.
안 그래도.
두칠은 한번 크게 화제가 됐다.
한올의 광고 촬영 현장에 함께했다가.
한 팬이 그걸 사진으로 찍어 올린 게시글이 큰 관심을 부른 것.
[오늘자 채한올 경호원.jpg]
-ㅅㅂ 덩치봐라 ㅋㅋㅋㅋㅋㅋㅋㅋ
-경호원 세 명 합쳐야 할 듯 ㅋㅋㅋㅋㅋ
-브록 레스너임? 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더락같은데
-ㄹㅇ 마운틴 그 자체네
하지만.
도윤이 아는 한.
두칠은 절대 이 업계에 남을 사람이 아니다.
“너 몰랐어?”
“네?”
“장 프로님 플로리스트 하면서 얻는 수입이 더 많을걸.”
성호가 입을 쩍 벌렸고.
민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나마 이번에 세게 불러서 오케이한 거지, 원래대로면 두칠 오빠 본업 수입은 못 넘죠. 그리고 그 일 좋아하기도 하고.”
도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들었지?”
“꼬, 꽃 팔면 그렇게 많이 벌어요?”
“왜, 하고 싶냐?”
“제가 또 손재주가…….”
“종신계약.”
도윤은 시무룩해진 성호를 보며 낄낄거렸다.
그나저나.
‘두칠 씨가 가면 많이 아쉬워하겠는데.’
도윤은 해맑게 웃으며 두칠과 이야기하는 한올을 바라봤다.
여전히 두칠은 한올이 말을 걸 때마다 연예인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준다는 사실 자체가 안 믿기는지 당황하는 모습이지만-
한올은 이제 그 모습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새삼.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게 느껴진다.
‘근데 유준이 쟤는 뭐 하냐.’
도윤은 이런 와중에 한올과 두칠을 바라보며 슬픈 표정을 짓는 유준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