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진실의 방으로
어떤 일이 생겼다고.
다른 일이 멈추지는 않는다.
스토커 건은 스토커 건.
촬영은 촬영.
어느 일이 안 그렇겠냐만.
배우는 이런 직업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일이 있든, 자신의 일을 할 때만큼은 가면을 써야 한다.
하물며 수많은 시청자들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야 한다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한올은 배우로서 충실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두칠이 자신 주변을 지켜준 이후부터는 걱정을 덜고 촬영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되게…… 순박하시네.’
평소에는 무서운 표정으로 주변에 위협이 없나 두리번거리다가도.
“저기, 장 프로님. 커피 드시겠어요?”
“아! 감사합니다!”
한올이 말을 걸면 언제 그랬냐는 듯, 헤실헤실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한올은 슬슬 그 모습에 적응하고 있었다.
겉보기엔 저래도.
마음이 순박하다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얼마 전, 우연찮게 꽃 이야기가 나오자 해박한 지식을 뽐내며 신이 나서 이야기하던 모습을 떠올리니-
웃음이 나온다.
“어, 왜 그러세요?”
“아뇨. 그냥 재미있어서요. 감사해요, 장 프로님.”
“헤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배우분을 제가 다 경호하다니. 그리고 사실…… 저기 계신 최도윤 배우님, 아니 형님 덕분이죠.”
“형님이요?”
“형님이라 불러도 되겠냐고 하니까 바로 오케이하시던데요?”
붙임성도 상당히 좋다.
하긴.
저런 덩치의 두칠이 다가가서 친하게 지내자고 하면 과연 몇 명이나 거절하겠냐만.
여하튼.
좋아 보였다.
단.
멀리서 보는 사람들은 조금 다르게 느꼈다.
“미녀와 야수?”
“에이, 형. 야수보다는 산이죠, 산. 산과 미녀?”
“이상한 비유 할 거면 때려치워라.”
“저는 초선과 여포 같은데요.”
“그거 여포가 죽는다면서?”
“이번엔 안 죽을 것 같기도 하고요.”
의외로 잘 맞아 보이는 조합에.
팀 최도윤 3인방은 열심히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런 한편.
“최도윤 배우님.”
“아, 강수연 배우님.”
“진짜 저분 소개 안 시켜주실 거예요?”
이렇게 강수연처럼 두칠을 소개시켜 달라고 몇 번이나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그럴 만하다.
멀리서부터 위압감이 느껴지는 데다.
가까이서 보면 더 크게 느껴지는 두칠이가 주변을 지켜주면 감히 엄한 마음을 품을 엄두도 못 낼 테니.
연예인이라면 누구나 탐을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두칠을 탐내는 사람은 강수연뿐만이 아니다.
“저…… 최도윤 배우님. 죄송하지만 저분 소속된 업체 한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저희 애들이 요새 사생들한테 엄청 시달리고 있어서…….”
<그 시절의 우리>에 조연으로 출연 중인 모 여자 아이돌 그룹의 매니저는 물론.
“선배님, 선배님? 진짜 안 알려주실 겁니까?”
유준도 탐을 냈다.
물론 도윤은 그냥 다 모른다는 식으로 말하며 수철에게 떠넘기거나.
적당한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여하튼.
효과 한번 장난 아니다.
그리고.
“넌 나중에 뭘 해도 먹고살겠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민주의 정체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유명 샵 원장과 친한 건 물론.
당시 ‘급’이 안 되던 도윤임에도 고가의 협찬품을 턱턱 받아내온 데다.
이 바닥 사방에 아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저런 두칠을 쩔쩔매게 만들 정도라니.
“누나 혹시 재벌 3세 아니에요?”
그런 와중에 성호가 내놓은 어처구니없는 추측.
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말이 되는 소리 좀 해라.”
“그, 그렇죠?”
아무튼 뭐.
두칠의 능력은 증명되었다.
두칠과 계약을 맺은 이후 한올이 불안을 호소하는 경우는 거의 사라졌고.
주변을 맴돌던 스토커 녀석도 자취를 감췄다.
하지만 잠시뿐일 것이다.
언제까지나 두칠과 함께할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도윤은 이제 움직일 때라고 생각했다.
* * *
저녁이다.
한 남자가 챙이 긴 볼캡을 눌러쓰고 이엔 엔터 소속사 맞은편 건물에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올 때가 됐는데.’
특정 연예인의 동선을 기가 막히게 추적하는, 어느 아이돌 사생팬에게 산 정보에 따르면.
한올은 이제 곧 회사로 돌아올 때가 됐다.
요새는 회사에 들렀다가 집이 아닌 호텔로 가고 있어 추적이 조금 애매하지만.
혹시 모른다.
매일같이 호텔로 갈 수는 없을 테니까.
짧은 시간 만났지만-
그는 한올이 가족들을 아주 아낀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며칠이 걸리든.
기다릴 생각이었다.
한올이 나올 때까지.
이런 한편.
“올까요?”
“올 거야. 분명히.”
“위험할 수도 있는데, 지금이라도 경찰에 전화해 보는 건요?”
소속사 건물 근처 차에 앉은 도윤과 성호.
“경찰은 해결 못 해. 접근금지가처분신청도 오래 걸릴 거고, 기껏해야 벌금형이야.”
세상엔.
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많다.
정확히 말하면.
법이 현실을 못 따라가는 경우다.
그래서.
도윤도 준비했다.
“안 들키면 암살이다. 들어봤냐?”
“오. 형 게임 좀 하세요?”
성호가 맞장구치는 사이.
도윤이 씩 웃었다.
“그리고 우리 장 프로가 있잖아?”
“그렇긴 한데…… 혹시나 해서요.”
“세상에는 법 외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지.”
성호는 그 말에 도윤이 무섭게 느껴졌다.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생각하는 건 자신보다 열 살은 많은 형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형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세상 참 오래 산 사람 같아요.”
“그렇게 느낀다면 다행이고.”
“예?”
회귀까지 한 마당에.
정신이 그대로여선 되겠는가.
이런 덕분에 미래에 다가올 불안의 싹도 잘라낼 수 있는 거겠지.
“아무튼 기다려. 오늘은 장 프로가 일부러 멀리 떨어져서 채 배우 혼자 걸어갈 거니까, 분명히 접근할 거야.”
“무슨 일만 안 생기면 좋겠는데.”
“사람 때릴 일은 없을걸.”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 수철의 도움을 받아 이엔 엔터에서 거래하는 경호 업체 사람 몇 명을 더 고용하긴 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녀석이 나오길 기다리는 것뿐.
이런 가운데.
한올이 드디어 소속사 건물에서 걸어 나왔고.
“역시.”
맞은편 건물에서 모자를 눌러쓴 한 녀석이 이에 맞춰 나왔다.
녀석이었다.
도윤은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지금, 움직이시면 됩니다.
“우리도 이동하자.”
“네. 바로 출발할게요.”
덜컥.
기어가 움직이고 두 사람이 탄 차가 움직이는 가운데.
한올은 최대한 침착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적당히 연기만 해주시면 됩니다. 위험한 일은 없을 거예요.]
도윤이 당부한 말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도윤이 이후에 해준 말로는-
이번 일을 잘 해내면, 다시는 시달릴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고마웠다.
같은 소속사 배우라는 이유로 이렇게 자신을 도와주는 도윤이 고마웠고-
거의 2주 가까이 안전하게 자신을 지켜준 두칠이 고마웠다.
‘꼭…… 보답해야지.’
하지만 보답은 나중의 일.
지금은 시킨 일에 집중할 때다.
한올은 그렇게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이야기된 대로 방향을 틀어 한적한 골목 사이로 향했고.
마침내.
뒤쪽에서 자신을 쫓는 기척을 느꼈다.
두근두근.
이전의 트라우마가 떠오르며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지만 한올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할 수 있어.’
한올은 속으로 되뇌었다.
이건 연기다.
지금 나는 촬영을 하고 있는 거다.
보이진 않지만, 어딘가에 PD님과 스태프들이 숨어서 카메라로 날 촬영하고 있다.
꿀꺽.
마른침이 넘어가는 가운데.
뒤쪽에서 다가오는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마침내.
들을 수 있었다.
“자기야.”
소름 끼치는 그 목소리를.
한올은 그 말을 들은 순간 걸음을 멈춘 채 자신이 해야 할 ‘대사’를 떠올렸다.
‘이건 연기야.’
그리고 다시 한번 다짐을 되새긴 뒤.
고개를 홱 돌리며-
“미친 또X이 새끼. 아직도 나 쫓냐?”
생전.
평소에 입에 담아보지도 않았던 욕과 함께 눈앞의 이상곤에게 쏘아붙였다.
“그렇게 할 일이 없어? 그딴 쓰레기 짓 하는 거, 너 동기랑 후배들은 알아?”
그리고 이어지는 욕의 향연은 스토커, 이상곤을 당황시키기엔 충분한 수준이었다.
“자, 자기야. 갑자기 왜 그래.”
“쓰레기 같은 새끼. 너는 정말…… 재활용도 안 될 것 같은데 어쩌지? 내가 말했지. 연락하지 말라고. 그 집착 때문에 헤어지고 그렇게 협박을 하더니 아직도 정신 못 차렸어?”
그도 그럴 게.
이상곤의 기억 속 한올은, 수줍고 소심하고 싫은 소리 한 번 못하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지금 자신에게 증오 가득한 눈으로 이렇듯 욕을 퍼부어대고 있는 것이다.
“자, 자기야.”
“왜 이러는지 궁금해? 너 때문에 그렇지. 이 개 같은 새끼야. 너 나 몇 달이나 쫓아다녔니? 내 사진 몰래 찍고, 번호 바꿔가면서 나한테 전화하고, 니 물건이랑 편지 끝도 없이 보내고. 소름 끼쳐, 이 쓰레기 같은 새끼야.”
자신이 했던 짓들을 조목조목 짚는 한올의 모습에.
이상곤은 혼란을 느꼈다.
당연히.
이번에도 이상곤은 한올이 자신을 보자마자 두려움에 떨 줄 알았다.
그게 자신이 기대한 일이다.
그리고 어르고 달래서 다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당연히 자신의 손아귀 안에 있을 줄 알았던 한올이.
지금 자신을 온몸으로 격렬히 부정하며.
증오하고 있는 것이다.
“자, 자기야. 너 배우 생활 많이 힘들구나? 내가 도와줄 건 없어?”
“그딴 말 쓰지 마. 소름 끼쳐. 자기? 왜 내가 니 자기야?”
그래서 이상곤은 최대한 다정하게.
정말 남자친구라도 된 것처럼 물었다.
하지만 한올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리고 도와줄 거? 너 같은 쓰레기 새끼, 그냥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데?”
두려움 따위는 완전히 사라진 모습.
스토킹이라는 건.
스토킹하는 상대가 자신을 두려워할수록 더더욱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이렇게 강하게 나오고, 스토커를 하잘것없는 녀석으로 취급하는 순간.
스토커는 세계가 부정당하는 느낌 속에서 당황해 버린다.
지금 이상곤처럼.
그래서 이상곤은 실수해 버렸다.
지금까지 ‘영리하게’ 스토킹했던 것들을 잊고.
한올의 팔을 잡아채려 한 것이다.
하지만 한올이 한발 먼저 물러났고.
이상곤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이런 개 같은 년이…….”
그리고 이상곤이 본색을 드러낸 그 순간.
“거기서 한 발만 더 옮기면 넌 뒤진다.”
저벅, 저벅.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골목 반대편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엄청나게 거대한 덩치였다.
손에는 고성능 캠코더를 든 채였고.
그 모습에 이상곤은 다급히 한올의 손을 놓으며 뒤로 물러났지만.
“늦었어. 이미 다 찍혔거든.”
남자, 두칠은 히죽거리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이상곤은 다급히 도망치려 했지만.
“뭐, 뭐 하는 짓이야! 놔!”
한올이 도망가려던 이상곤을 용감하게 붙잡았고.
예정에 없던 일이었지만 두칠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빠르게 달려와 이상곤의 멱살을 붙잡았다.
엄청난 속도와-
엄청난 힘이었다.
“끄으으윽…….”
“친구, 우리 이제 이야기 좀 해볼까?”
“겨, 경찰 부를 거야…… 이, 이거 놔!”
“그래? 그럼 나도 뭐…… 여기 찍은 거 너희 학교 게시판에 올리지. 아니다, 대나무숲인가 거기가 좋으려나? 요새는 그게 대세라던데.”
이상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그제야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두칠의 얼굴을 본 순간.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알아보니까 학교생활 착실하게 하는 것 같던데…… 지금까지 스토킹한 거 싹 다 까발리면 반응이 어떨까? 응?”
그 말에.
이상곤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두칠은 한올을 등진 채, 한올에겐 보여주지 않았던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우리 막다른 골목에서 이야기 좀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