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76화 (76/200)

76.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니까?

사건 이후.

<그 시절의 우리> 촬영장에서는 암묵적인 금기 하나가 생겼다.

바로-

<대책없는 로맨스>에 대한 언급을 일절 하지 않는 것.

분명 <그 시절의 우리>는 잘 만들어졌고, 8화 촬영이 진행 중인 현재 4화 방영 시청률은 18%를 기록하며 잘 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도 떠돈다.

<대책없는 로맨스>가 망했기 때문에 어부지리로 기록한 시청률 아니냐.

<그 시절의 우리>는 뒤늦게 시작했음에도 악재가 터지기 전 당당히 경쟁하며 좋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디테일함까진 보진 않는다.

그래서 은연중-

오해받고 싶지도 않고.

우리 드라마가 <대책없는 로맨스>가 망해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게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다들 언급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더더욱, 자신들의 드라마에 집중하기 위해서.

“자, 바로 슛 들어가겠습니다! 바스트 따고 바로 이동하겠습니다. 스탠바이해 주시고! 레디…… 액션!”

어느 때보다 더 우렁찬 창용의 외침 속에서.

늘 그렇듯.

주변 상황이 어떻든 흔들림 없이 연기를 이어가는 배우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아니, 엄마! 선은 무슨 선이야! 됐다고 몇 번을 이야기해.”

바로 도윤이었다.

결국, 10년을 만난 ‘하나’와 헤어진 ‘윤재’는 한동안 텅 빈 집에서 폐인처럼 지낸다.

그러다.

그런 아들이 보기 안쓰러워 찾아온 엄마 ‘김희연 여사’와 선자리를 두고 설전을 벌이는 장면.

“아니, 그냥 만나나 보라고. 내가 너 모르니? 그냥 엄마 체면 한 번만 살려주렴, 응?”

“선 안 봐. 지금 그럴 시간도 없고. 엄마 나 그리고…… 하나랑 헤어진 지 한 달도 안 됐어.”

“그러니까 보라는 거 아니야 이놈아! 원래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법이여. 잔말 말고 그냥 가서 앉아 있다 만이라도 와!”

“아 글쎄 안 간다니까!”

‘윤재’는 끝까지 선자리를 거절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못내 지우지 못한다.

그리고 아들의 그런 표정을 보던 ‘김희연 여사’는 속으로 눈물을 흘린다.

아들과 10년을 만났던 ‘하나’는 ‘김희연 여사’에게도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두 사람이 결혼할 줄 알았다.

하지만.

결국 둘은 헤어졌고.

자신의 아들은 거의 일주일 가까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지내고 있었다.

둘만의 사정이 있었겠거니, 이해하려다가도.

더 이상 이런 모습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서윤재. 엄마 말 한 번이라도 들어. 누가 가서 사귀랬니? 결혼 이야기를 하랬니? 그냥 앉아서 이야기만 하다 오라는 말이잖아.”

“엄마, 엄마까지 나한테 이러면 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엄마 걱정하는 거 알아. 근데, 근데…… 나 아직 눈 감으면 하나 생각해. 자다가도 수십 번씩 깬다고. 엄마, 나 진짜…… 지금은 아니야.”

하지만.

‘윤재’는 10년을 만난 연인과 헤어진 충격으로 결국 엄마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만다.

매번 괜찮다, 힘들지 않다, 난 잘살고 있다며 강한 척하던 아들이 처음으로 보인 눈물.

“윤재야…….”

그리고 이 연기를 펼치는 도윤은.

이전의 작품들에서 보여줬던 감정선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감정선을 아주 훌륭히 소화해내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감정이 결여되어 있거나, 까칠하거나, 그도 아니면 냉정하다 못해 얼음처럼 차가운 이미지였다면.

지금은 아주 친숙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모두가 한 번씩은 겪는 이별.

그 아픔을 자신만의 연기로 승화시키며 공감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멍한 눈빛.

힘없이 늘어진 어깨.

시도 때도 없이 쏟아지는 눈물.

긴 연애 끝에 찾아온 이별의 충격이란-

이런 것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역시,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니까?’

사실 그랬었다.

도윤이 찾아와 주연을 하겠다고 말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캐스팅하고 주변에서 꽤 많은 훈수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사이코패스, 깐깐한 상사, 까칠한 셰프 뭐 이런 역할만 한 배우를 로맨스 장르, 그것도 주연으로 쓸 수 있겠냐.

안 그래도 서정적이고도 일상적인 장르라 친숙한 느낌과 더불어 아련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생긴 우려들.

하지만.

‘선배님 말씀이 맞았어.’

창용은 <그 남자의 메모리>에서 도윤을 주연 배우로 발탁한 재훈이 해줬던 말을 믿었다.

도윤은.

어떤 장르든 완벽하게 소화해 낼 배우라고.

재능도 재능이지만.

자신이 본 바로, 배역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만큼 노력하는 배우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다는 말.

그 말이 맞았다.

“컷! 오케이! 좋습니다! 감정 아주 잘 살렸습니다!”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창용과 정훈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도윤은 곧바로 차에 들어가는 대신 매니저에게 대본을 받아들고 다음 씬 연구를 시작한다.

보는 사람이 걱정될 만큼의 열정이다.

연기에 미쳤거나.

아니면 그냥 미쳤거나.

“보고 있으면 느끼는 건데요. 눈이 높아질까 봐 걱정됩니다.”

도윤의 모습을 보던 정훈이 한 말이다.

창용도 동의했다.

저런 재능까지 갖추고.

저만한 노력을 하는 배우가.

과연…….

실패할 거란 상상을 할 수나 있을까?

* * *

순조로운 촬영.

좋은 분위기.

높은 시청률.

그리고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당연하게도.

도윤은 또 한 번 큰 주목을 받았다.

[최도윤, 또 한 번 안방 시청자 홀렸다…… 이슈메이킹 1위 등극]

[‘20% 돌파’ <그 시절의 우리>, 이번에도 일등공신은 최도윤]

[‘배우계의 폭풍’ 최도윤, 치솟는 몸값 속 광고 모시기 전쟁 벌어진다]

<알고 있는가>.

<그 남자의 메모리>.

그리고 이번 <그 시절의 우리>까지.

세 번 연속으로 큰 비중의 배역 혹은 주연을 맡아 자유자재로 배역을 바꾸고 걸맞은 연기를 보여준 도윤은.

이제 정말 유명한 배우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 전체적인 커리어로 따지면 경력도 짧기에 몇몇은 그래 봐야 반짝이라며 폄하하기도 했지만.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극소수.

여기에 예능, 그리고 행사 등에서 보여준 친숙한 모습들까지 더해지며 이미지 역시 좋았고.

특히 이번 드라마에서 펼친 열연이 큰 화제가 되고 있었다.

-와 최도윤은 드라마 나올 때마다 치이게 만드네 ㅋㅋㅋ큐ㅠㅠㅠ

-아 보고 있으면 미칠 것 같음…… 나 저 느낌 진짜 잘 앎. 오래 만난 남친이랑 헤어졌는데 시도 때도 없이 눈물 나고 눈감으면 생각나고 집 주변 어딜 가도 걔랑 함께한 흔적이고……

-최도윤밖에 안 보인다... 하나야 왜 윤재 버렸니 ㅠㅠㅠㅠㅠㅠㅠㅠ

-이해는 하는데 현실에서 윤재가 내 남친이면 내가 풀대출 땡겨서라도 모신다...

팬들 반응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좋지만, 도윤이 없으면 드라마가 설득력을 잃을 거라 말하는 사람도 다수.

[<그 시절의 우리>, 회고를 통한 ‘액자형 구성’ 드라마의 매력]

[과연 누가 이어질까? 네티즌, <그 시절의 우리> 커플 두고 추측 이어져]

[‘재나 커플’ 결합? ‘재성 커플’ 새로 탄생? 4인 4색의 매력적인 배역의 향방은?]

덕분에 안 그래도 쉼 없이 들어오던 광고 문의는 폭증 중이고.

차기작 제안 역시 벌써부터 쏟아진다.

그리고 도윤뿐만 아니라.

한올 역시 차세대 신인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채한올 배우한테도 제안이 엄청 들어오네요.”

“이제 빽 논란은 사라졌으니까.”

드라마에는 이른바 ‘패키지 출연’이라는 게 있다.

대형 배우 하나를 섭외하면서.

같은 소속사의 다른 배우를 마치 사은품처럼 끼워 넣고 출연시키는 것.

때문에 한올은 처음에 ‘패키지’ 취급을 받았다.

심하게는, 최도윤이 아니었으면 저기 어디서 단역이나 전전했을 배우가 처음부터 주조연을 꿰찼다며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논란은 사라졌다.

[연기력으로 ‘증명’한 채한올…… 우리는 또 한 명의 괴물 신인을 마주한다]

이런 기사처럼.

거기에.

[이엔 엔터, 떠오르는 기획사의 비결은?]

최도윤과 채한올을 보유한 이엔 엔터도 덩달아 주목을 받았고 말이다.

“광고는 큰 건 몇 개만 골라서 하자고. 자잘하게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으니까. 어느 쪽에서 들어왔지?”

“주로 화장품 쪽이 많고 그다음은 패션 쪽입니다.”

“좋네. 이미지도 어울리고.”

그러니 동민과 수철이 해야 할 일은 알맞은 광고를 골라주는 것.

“배우 반응은 어때?”

“별로요. 도윤이랑 비슷한 과는 아닌 것 같은데, 크게 기뻐하는 모습은 안 보입니다.”

“그래? 생각보다 침착한 성격인가?”

“그보다는…… 갑작스럽게 얻은 인기에 적응을 못 하는 쪽이겠죠.”

동민이 새삼 놀랍다는 듯 미소지었다.

“생각해 보면 도윤이가 참 대단해. 도윤이도 비슷한 일을 겪었는데 구설수 한번 없었잖아. 자만한 적도 없…… 아, 처음에는 좀 그랬었지.”

“그것도 얼마 안 갔죠.”

새삼.

그렇게 빠르게 인기를 얻고 지금까지 별달리 말 한 번 안 나오는 도윤이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모든 신인들이 도윤 같으면 참 좋겠지만.

어디 그게 쉬운 일이겠는가.

“멘탈 케어 잘해주라고. 쉽게 얻은 인기,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거 명심하라고 말해주면서.”

“대표님이 직접 하시죠? 그쪽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는데요.”

동민은 고개를 저었다.

“이 팀장, 대표는 그냥 돈 필요할 때 돈 내주고 서류에 사인만 해주면 돼.”

동민은 지금이 좋았다.

매번 업체 미팅을 다니느라 몸이 수십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지만.

그래서 지금이 좋았다.

다만.

“이렇게 하면 내가 일해도 되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네가 연기하고, 내가 팀장하고. 이러면 내가 기꺼이 일하지. 어때? 필드로 돌아가는 거야.”

“참 끈질기십니다.”

수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 대신 다른 의미의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그 시절의 우리>는 7화 방영 현재 시청률이 24%까지 치솟은 상태.

때문에 이제 더 이상 <대책없는 로맨스>를 의식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종종 소식은 들려왔다.

유정연이 정신 못 차리고 문하생 몇을 아직도 협박한다더라.

드라마작가협회를 찾아가서 난동을 피웠다더라.

그러다 결국 방송국 PD들도 이젠 사적으로조차 만나주지 않는다더라-

인과응보.

시대를 풍미할 뻔했던 한 드라마 작가는 그렇게 몰락했고.

<대책없는 로맨스>는 방송사에서 말했던 대로 이미 지난주에 8화로 종영했다.

여하튼, <그 시절의 우리>가 <대책없는 로맨스>가 무너져서 성공한 게 아님을 증명했다.

“이제 앞으로 선배님만 졸졸 따라다니면 되는 거지 말입니다?”

오죽하면.

이런 말이 나올까.

최도윤이 하는 드라마에 참여하면 최소한 망할 일은 없고.

대박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모든 기획사와 소속 배우들이 도윤의 행보에 귀를 기울일 것 같았다.

“너 찍고 싶은 거 찍어.”

“저는 선배님 찍는 게 제가 찍고 싶은 거지 말입니다.”

“너 스토커냐?”

“선배님 마음에 월세방 없으십니까? 반지하라도 좋으니 들어가서 살고 싶지 말입니다.”

유준의 주옥같은 멘트에 도윤의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오늘 촬영 시마이합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촬영이 마무리되고, 도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태프와 선배 배우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던 몇몇 배우들이 얼른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고생하셨습니다, 선배님!”

도윤도 이제는 촬영장에서 꽤 많은 후배 배우를 두게 되었다.

촬영장마다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도윤의 경력도 길어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명성으로 따지면 어지간한 배우들은 명함도 못 내미니까.

“고생하셨어요.”

도윤은 싱긋 웃는 한편.

묘하게 어두운 표정의 한올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 있어요?”

“아, 아뇨.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올의 큰 특징은.

걱정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

지금처럼 말이다.

하지만 도윤은 더 묻지 않고 한올이 차에 오르는 것까지 바라봤다.

“형, 안 가세요?”

“가야지. 출발하자.”

“넵.”

그렇게 도윤도 차에 오르고.

이어서 성호가 운전하는 카니발이 촬영장을 빠져나가 곧 고속도로를 달렸다.

부우우웅.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각자의 일에 열중하는 가운데.

인터체인지를 지나 서울에 도착했고, 그즈음 성호가 입을 열었다.

“형, 회사 잠깐 들르신다고 했었죠?”

“어. 들렀다가 집 가려고. 민주도 회사 들른다고 했었지?”

“네. 의상 점검할 게 많아서.”

“의, 의상?”

의상이란 말에 도윤의 몸이 움찔거렸다.

“네. 협찬받은 거 아마 지금 회사에 도착했을 텐데. 이번에는 한 20벌? 별로 안 많아요.”

차마.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그래…….”

“걱정 마세요. 오늘은 안 입힐 거니까.”

“그래?”

“대신 내일 준비하세요.”

“……그래.”

또 내일 지옥의 옷 입히기 게임이 예정되어 있구나.

저 심드렁한 얼굴만 보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열정 하나는 어마어마한 스타일리스트다.

도윤이 생전 찾지도 않던 신을 찾으며 마음속으로 열 십자를 그리는 사이.

“다 왔습니다.”

카니발은 회사 건물 앞에 멈췄고, 도윤과 민주가 먼저 내렸다.

그리고 두 사람이 막 걸음을 옮기려던 그때였다.

“뭐지?”

“왜?”

“사람 하나가 건물 앞에서 계속 서성이는데요.”

그 말에 도윤이 고개를 돌렸다.

민주의 말처럼.

사람 한 명이 건물 입구 부근에서 서성였다.

물론 저것만으로는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다.

하지만 뭔가…….

불안한 모습이었다.

사람이 불안해 보이는 게 아니라.

행동 자체가 다른 사람들의 불안을 사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쉴 새 없이 손을 넣었다 뺐다 하는가 하면.

손을 물어뜯으며 건물 위를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가 싶더니 신경질적으로 씩씩거렸다.

“경비분 부를까요.”

“아니, 잠깐만.”

뭔가.

직감이 차오른다.

‘스토커.’

도윤은 곧장 휴대폰을 들어 한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들을 수 있었다.

-서, 선배님…….

한올의 아주 불안해하는 목소리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