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잘 아시잖아요?
보통은 그렇다.
잃을 게 많고, 지금까지 이룩한 게 많은 사람들은 사건이 터졌을 때 사실을 부정한다.
아니면 아예 겉으로는 무시하고 뒷공작을 펼친다.
유정연은 전자와 후자 모두 해당되는 사람이었다.
[유정연, 작품 도둑질 부인…… ‘공동각본’ 주장]
[“공동각본 표기 늦었다. 이 부분은 죄송하다.” 유정연, 피해 문하생 모임 주장 전면 부인]
빠르게 기자회견을 열어 여론을 자신 쪽으로 돌리려 안간힘을 쓰는 한편.
“너희, 이대로 가면 이 바닥에서 끝이야. 적당히 합의 보자. 내 실수도 있지만, 너희 지금까지 나한테 배운 은혜까지 잊은 건 아니지?”
문하생 몇몇에게 개인적인 연락으로 회유를 시도했다.
“원하면 다음 작품에서 데뷔할 수 있게 도와줄게. 대신, 따로 증언해 줘야 하고.”
이 바닥엔 워낙 가난한 예술가들이 많고, 특히나 데뷔를 꿈꾸는 작가들이 많기에 그건 아주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유정연의 문하생들은 제대로 이를 간 것 같았다.
[피해 문하생 모임, 유정연 협박 사실 및 회유 녹취록 공개…… “우리는 분열되지 않는다.”
[‘공동작업’ 반박한 문하생 모임, “그 작품은 내가 문하생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집필한 것. 최초 파일 생성 내역이 있다.”]
유정연의 회유 사실을 날것 그대로 폭로해 버렸고.
유정연의 ‘공동작업’ 주장 역시 거짓임을 낱낱이 밝혀 버렸다.
이쯤 되자 여론은 유정연에게 완전히 돌아섰다.
사흘.
처음엔 유정연의 언론 플레이로 문하생들이 은혜도 모르고 스승을 음해한다고 이야기하던 여론이 완전히 돌아서는 데 걸린 시간.
유정연은 처음엔 부정했으나.
결국.
[유정연, 사과 기자회견 연다…… 스타 작가의 ‘민낯’]
[유정연, “죄송하다. 죽을죄를 지었다.”]
[<대책없는 로맨스>, 이제 어떻게 되나?]
여론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증거들이 속속 나오자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과한다고 돌아설 시선이었다면, 애초에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충격은 엄청났다.
지금까지 유정연이 선보인 작품과 전혀 다른 느낌임에도 퀄리티가 대단했기 때문에 ‘역시 유정연’을 외치던 사람들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
[피해 문하생 모임, “작품의 권리와 적절한 보상이 없으면 고소 취하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건 유정연 작가의 업계 퇴출”]
문하생들은 그간 참았던 분노를 쏟아냈고.
심지어.
문하생들의 이런 폭로에 몇몇 관계자들이 조심스럽게 용기를 냈다.
기회주의자라 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새롭게 밝혀진 유정연의 행동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유정연, 배우에게도 갑질했다…… ‘무소불위’ 권력의 작가]
[배역 출연 빌미로 협박…… “너 이 바닥에서 사라지고 싶어?”]
[모 PD, 유정연에게 맞아 다쳤던 상처 공개]
결국 몇 남지 않은 소수의 옹호론자들까지 등을 돌렸고.
여론이 불타오르는 가운데.
“이야. 손절 빠르네. 드라마 조기종영?”
“조기종영 카드를 꺼낼 줄은 몰랐는데.”
“방송사도 애가 타겠지. 시청률이 나와도 이대로 두자니 윤리적인 문제가 걸리고, 여론이 워낙 안 좋으니까.”
<대책없는 로맨스>의 방송사는 무려 ‘조기종영’을 선언해 버렸다.
그야말로 속전속결.
유정연의 사과 기자회견으로부터 다섯 시간 뒤에 벌어진 일.
동민은 혀를 내둘렀다.
“요새 여론이 무서워. 스마트폰 보급되고 SNS 발달하니까 원래대로면 모르고 지나갔을 사실도 다 밝혀지잖아.”
“그러네요. 이건 뭐…… 아, 드라마작가협회도 성명 냈네요. 제명한다고.”
수철의 말에 동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도 빠르네. 하긴, 스스로 인정했으니까 더 망설일 것도 없겠지.”
“근데 유정연 작가 정도 되는 사람인데, 이렇게 빠르게 가는 게 좀 신기하긴 하네요.”
“단순 표절만이었으면 오히려 일 별로 안 커졌을걸? 문제는 갑질이지. 문하생 임금 착취하고, 폭력 쓰고, 폭언하고.”
동민의 말마따나.
유정연은 표절에 더해 문하생들에게 가했던 갑질로 인해 몰락한 셈.
“드라마 조기종영이라……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우리 두 배우 출연한 드라마가 반사이익 가져가겠네요.”
“맞아. 그런데 대놓고 좋아할 일은 아니야. 어디 가서 티 내지 말라고.”
여하튼.
현재까지 찍어둔 8화로 조기종영이 확정된 <대책없는 로맨스>는 사실상 시청자들이 봐야 할 이유를 잃어버린 드라마가 됐다.
방송사에서는 후속작 편성을 앞당겨 배치한다는 입장이지만, 그건 그쪽 사정.
이엔 엔터가 신경 써야 할 건 <그 시절의 우리>에 출연 중인 도윤과 한올에 대한 지원뿐이다.
“두 사람한테도 말해. 괜히 기자들 유도질문 한다 싶으면 그냥 대답 피하라고.”
“이미 말해뒀습니다.”
“잘했어. 근데, 두 사람은 좀 어때?”
“채한올 배우야 뭐…… 신인이니 생각할 틈도 없을 테고.”
“그야 그렇겠지.”
“그리고 도윤이는…….”
수철은 당연하다는 듯 양손을 펼쳐 보였다.
“잘 아시잖아요?”
* * *
촬영장의 분위기를 만드는 건 역시 주연 배우들이다.
PD나 작가의 성향이 분위기를 좌우하는 경우도 있지만, 창용은 그리 까다롭거나 신경질적인 사람이 아니다.
신인 작가인 정훈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기에 <그 시절의 우리> 촬영 현장은 제작진이 아니라 배우들이 그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셈.
도윤이 그랬다.
도윤은 여기서 가장 경력이 긴 배우는 아니지만, 경력 긴 배우 못지않은 인지도와 인기를 지니고 있고 무엇보다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배우였다.
여하튼.
본을 보인다고 해야 할까.
“그 부분은 답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드라마와 관련된 내용만 질문을 주셨으면 합니다. 양해 부탁드릴게요.”
촬영장을 찾은 기자들이나 리포터들의 질문에 영리하게 답하며 다른 배우들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가 하면.
“안녕하세요,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항상 일찍 촬영장에 와서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하고 웃는 얼굴로 다니는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덕분에.
신인 배우들은 물론.
도윤보다 경력 긴 배우들도 은연중에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고 해야 할까.
배우가 흘리는 아우라와 영향력이란 그런 효과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물론.
촬영을 마치고 차로 돌아온 도윤은 촬영장에서의 모습과 딴판이었다.
“우리 성호, 요새 살 좀 빠졌나?”
성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약 2년 가까이 도윤을 분석한 결과.
자신을 부를 때 앞에 ‘우리’가 붙으면 뭔가 위험한 일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도 그런 것 같다.
“아까 카드 결제 문자가 날아오더라고. 아, 내 카드 썼다고 뭐라 하는 건 아니야. 필요할 때 쓰라고 준 거니까. 근데…… 콜라 사 마실 거면 개인 카드로 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
조곤조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추궁.
“제로콜라도 아니고, 응? 내가 다큐를 봤는데, 콜라를 증발시키니까 설탕이 이만큼 있더라고. 혹시 봤어?”
“……형 제가 진짜 안 마시려고 했는데.”
“알지, 알지. 연예인 매니저 하는데 스트레스는 받고 풀 데는 없고. 그치?”
그렇다고 하는 순간.
지옥이 찾아올 것이다.
성호는 필사적으로 대답을 억눌렀다.
이런 가운데 도윤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고혈압 오기 싫으면 관리 열심히 하자? 응? 어차피 우리 종신계약 맺을 건데, 나보다 먼저 가면 좀 그렇잖아.”
“조, 종신계약이요?”
“벌써 까먹었어? 시청률 내기 했잖아.”
성호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잊고 있었다.
시청률 내기.
성호가 이기면 도윤이 원하는 소원을 들어주고.
도윤이 이기면 성호는 도윤과 매니저 종신계약을 맺어야 한다.
“아, 그, 그거…….”
“잘하자. 응?”
“…….”
그때 민주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삼국지에서는 군신관계를 맺어도 자주 배신하더라구요.”
“나 그거 알아. 동탁하고 여포였나?”
“그쪽은 양부모하고 양자. 오히려 군신관계보다 더 끈끈했어야 했는데 여포가…….”
뒤의 말은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도윤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들었지? 인감 준비해라. 아니다, 포기각서도 같이 작성할까?”
“혀엉.”
“아니면 빼든가. 선택해.”
지은 죄가 있으니.
성호는 결국 반박도 못 하고 울상만 지었다.
하긴.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적당히 통통한 것도 아니고, 성호 같은 경우는 진짜 1년 사이 살이 어마어마하게 쪘으니.
그래서 도윤이 자기 카드까지 줘 가면서 헬스장 좀 다니고 다이어트하라고 한 것이다.
회귀까지 한 마당에.
이번엔 반대로 매니저가 먼저 훅 가선 되겠는가.
성호는 도윤에겐 동민만큼이나 고마운 사람이다.
회귀 전, 도윤이 누명을 썼을 때 끝까지 같은 편에 서서 자신을 옹호해 주던 사람이었으니까.
너무 미안하고 비참한 나머지 이제 제발 나 말고 다른 연예인 찾아가라고 사정하고 욕을 해도 끝까지 옆에 남아 있었던 녀석.
그래서.
도와주고 싶었다.
방법이야 성호 입장에서 ‘살짝’ 마음에 안 들겠지만 말이다.
물론 뭐.
이것도 본인이 끝까지 싫다고 하면 더 이상 안 할 생각이다.
삶을 살아보니.
결국 본인이 싫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법이더라.
여하튼 그렇게 성호가 다시 살을 빼는 걸로 합의를 본 가운데.
“근데요, 형. 진짜 뭐 있는 거 아니죠?”
성호가 대뜸 화제를 돌렸다.
“뭐가?”
“아니, 그렇잖아요. 맨날 보면 다 아시는 것 같아서. 제가 콜라 사 먹은 것도 그렇고…….”
“그건 성호 네가 부주의해서가 아닐까?”
도윤의 팩트폭력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성호는 조용해졌지만.
“유정연 작가 표절 건 터지고 솔직히 저도 좀 놀랐어요. 오빠가 선구안이 엄청 좋구나 싶어서.”
민주가 한마디 보탰다.
물론 도윤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냥 웃기만 했다.
당연히.
유정연 작가의 작품을 무려 두 번이나 거절한 이유를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유정연의 <대책없는 로맨스>라는 작품을 거절한 건.
<대책없는 로맨스>가 곧 표절 논란을 비롯한 각종 악재에 휩싸일 것임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락.
지금 손에 들린 이 <그 시절의 우리>가 너무 탐이 났을 뿐.
그리고 예상대로.
<그 시절의 우리>는 확실한 상승세를 탔다.
검증된 주연 배우 둘에.
신선한 마스크의 신인 둘.
총 네 명이 이끌어가는 극은 시청자들에게 아주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안 그래도 자극적인 <대책없는 로맨스> 같은 드라마를 싫어하는 독자들은 잔잔하고도 옛 감성을 자극하는 <그 시절의 우리>에 극찬을 보내고 있었고.
이는 3, 4화 시청률 평균 18%라는 수치로 증명되었다.
다시 말해.
도윤은 지금 쉬지 않고 성공가도를 달리는 셈.
여기에.
신인 배우 두 명의 미래와 인생도 바꿔 버렸고 말이다.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다.
<대책없는 로맨스>는 이제 조기종영을 앞둔 상황이고.
더 이상 거기 신경 쓸 이유는 없다.
이제는 <그 시절의 우리>에 다시 집중할 때.
지금까지 해본 적 없던 로맨스 연기였기에 간단하게만 생각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
연기니까.
도윤이 그토록 하고 싶었던 연기.
“근데요, 형. 어제 촬영장에서 느낀 건데…… 혹시 채한올 배우님 무슨 일 있대요?”
그런 가운데 들려온 성호의 말.
도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아…… 제가 잘못 봤나 봐요.”
성호는 얼버무렸지만.
도윤은 그 말을 그냥 흘려듣지 않았다.
“구체적으로 말해봐.”
“그, 그게요…… 음. 불안해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냥 지나가다 본 건데…….”
민주가 한마디 거들었다.
“성호 눈치가 좀 빠르긴 하죠. 중요할 때 눈치가 없어서 그렇지.”
“…….”
시무룩해진 성호.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도윤은 성호가 한 말을 조용히 곱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