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종신계약
그야말로.
살벌한 분위기다.
아무리 케이블이라지만 처참하기 그지없는 1% 초반대의 시청률로 막을 내린 <악마의 세계>.
그 실패를 만회하겠다는 듯-
“배역에 대한 불만 제기 받지 않습니다. 대사에 대한 이의 제기도 받지 않습니다. 여기 계신 PD님과 합의한 사항이니, 아무쪼록 따라주시면 좋겠습니다.”
<대책없는 로맨스> 첫 리딩 날.
유정연이 배우들과 한 명씩 눈을 마주치며 꺼낸 말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조연들은 물론.
조연 배우들조차 입 하나 뻥긋하지 못했다.
유정연이 이번에 이를 갈았다는 사실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기 있는 배우들 중 이 상황에서 이의를 제기할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 괜찮을까?’
그리고 저번 작품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유정연의 캐스팅 제안을 조금의 고민도 없이 받아들인 배우 한 명은.
뭔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원래 이러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유정연의 성격이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나-
이렇게 강압적이진 않았다.
왜 이의 제기를 받지 않겠다는 강수를 둔 까.
단순히 강미나 작가에게 밀려서 이제는 ‘침몰하는 배’ 소리를 듣는 걸 참을 수 없어서?
그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을까?
이런 가운데.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유 작가님.”
유일하게 입을 연 배우가 있었다.
“그럼 배우로서 자신이 연기할 배역에 대해 자율적인 해석조차 제한하겠다는 건가요?”
바로 이옥주였다.
여기 있는 그 어떤 배우들보다 경력이 긴 원로 배우이자, 배우들에게 존경받는 배우 중의 배우.
그러자 유정연은 움찔했지만.
“이옥주 선생님, 저희는 그저 이번 작품을 촬영함에 있어 좀 더 철저하게 만전을 기하자는 의도로 말씀드리는 겁니다.”
더욱 힘주어 이야기했다.
경력 긴 배우와.
제작진의 기싸움이야 드물지도 않은 일.
때문에 여기서 얕보여선 안 된다.
유정연은 불안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로 작품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저번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면…….
일부러 자신보다 아랫급의 PD를 고른 것도 바로 그 이유.
하지만.
이건 예상 외다.
이옥주의 경우 도저히 안 뽑을 수가 없어서 캐스팅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바로 반발하고 나선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아니라 생각하는데요. 배우가 국어책 읽는 사람도 아니고, 배역, 대사에 대해 의견 하나 못 내는 건 못 들어봤는데. 혹시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신인인가?”
팔짱을 낀 채 날카로운 표정으로 묻는 이옥주의 모습.
말은 안 했지만-
배우들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선생님, 말씀드렸지만 어디까지나…….”
“그 말은, 여기 있는 배우들 수준이 떨어지니까 우리라도 철저히 준비해서 차질 없도록 하겠다. 뭐 그런 말처럼 들리는데요?”
다소 과한 해석이었으나 유정연을 당황시키기엔 충분하다.
애초에 그럴 목적으로 입을 연 것이기도 하고.
그러나 유정연은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오히려 옥주를 도발했다.
“이걸 쓴 건 저입니다, 선생님.”
“각본만으로 어떤 의미가 있죠, 유 작가님? 그 각본에 쓰인 지문대로 움직이고 대사를 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 배우들 아닌가요?”
그러나 옥주는 연륜 넘치는 배우답게 간단히 받아넘기더니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다 늙은 마당에 굳이 누가 수발들어 주는 거 원하지도 않고 나이 대접받을 생각으로 온 건 아닌데, 최소한의 예의는 있어야지. 안 그런가요, 이 PD?”
이학제 PD는 우물거렸다.
‘에이 씨, 그러니까 하지 말자니까!’
이건 전적으로 유정연의 제안이었고, 유정연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력이 짧은 이학제는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역시나 이런 일이 생겨버렸다.
“이 PD? 내가 물어본 것 같은데.”
“아, 그. 네. 선생님, 저희가 말씀을 잘못 드린…….”
그러나 유정연은 굽힐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뇨. 그대로 갈게요. 이의 제기, 안 받겠습니다.”
옥주는 그 말에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싸늘한 눈으로 유정연을 노려봤다.
“내가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유정연은 망설임 없이 답했다.
“같이 못 가는 거죠.”
“그럼 결정 났네.”
드르륵.
옥주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잘 알지? 유 작가, 그런 방식으로는 오래 가기 힘들어. 다른 배우들은 몰라도 나는 당신 같은 사람이랑 일할 생각 없어.”
차분한 목소리지만.
안에 깃든 분노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러다 별안간.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가볍게 쏘아붙인다.
“이번에는 좀 괜찮게 쓴 것 같아서 해볼까 했는데…… 작가가 작품 수준에 못 미치네.”
그 말에 유정연이 발끈했다.
“지,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충분히 화를 낼 법한 발언이나.
유정연은 작가가 작품 수준에 못 미친다는 말에 눈에 띄게 반응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쓴 거는 나랑 좀 안 맞는 기분이었는데, 그래서 이번 거는 기대했거든. 원래 작가야 어떻든 대본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주의라서. 그런데…….”
옥주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대본을 들어 올리더니.
쾅!
테이블을 내리쳤다.
“이건 아니지.”
사방이 고요해지고.
주변을 감싼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는다.
혹시 몰래카메라는 아닐까.
다른 배우들은 차라리 이게 어떤 예능 프로그램에서 기획한 몰래카메라이길 바랐다.
꿀꺽.
넘어가는 마른침.
“더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을 것 같으니까, 새 배우 알아봐. 유 작가.”
<알고 있는가>를 함께 촬영할 때만 해도 웃음 많고 다정한, 그야말로 어머니 같은 선배님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난 빠질 테니까.”
무섭도록 냉정하게 내뱉은 후 몸을 돌렸다.
쾅!
문이 닫히고.
모두가 침묵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왜 저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이옥주가 아니라.
유정연이 말이다.
하지만 그 의문은 당장 풀리진 않을 듯했다.
유정연은 이옥주가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려 들었으니까.
“또 나가실 분, 계신가요?”
침착함을 가장했지만.
떨리는 목소리.
하지만 배우들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다.
그러자 유정연은 자신의 표정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고개를 돌린 뒤 이학제 PD에게 말했다.
“바로 새로운 배우 알아보세요.”
“네, 네?”
“못 들었어요?”
이학제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설득도 안 한다고?’
이학제는 막 뛰어나가 옥주를 붙잡고 죄송하다고 사과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유정연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아예 쐐기를 박아버린 것이다.
그것도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 * *
유정연의 <대책없는 로맨스>와 같은 시간대, 같은 요일에 붙는다는 소식에-
<그 시절의 우리> 팀은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편성 이렇게 하면 죽으라는 이야기밖에 더 됩니까? 네? 이미 정해졌다고요?”
김창용 PD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제작사에 항의했지만, 돌아오는 건 방송국이 이미 정해 어쩔 수 없다는 대답뿐.
풀이 죽어 있긴 박정훈 작가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정연이다.
다른 요일도 아니고, 동 시간대 같은 요일에 자신 같은 신인 작가가 나서야 한다니.
하지만 박정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최도윤 배우님이 계시잖아?’
도윤에 대한 믿음은 그야말로 신앙이었다.
솔직히 왜 다른 제안들을 마다하고 자신의 작품을 택한 건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지만…….
‘내가 이렇게 기죽어 있으면 안 되는 거지.’
정훈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어차피 편성은 정해졌고.
자신은 좋은 각본을 써내고, 김창용과 함께 드라마를 만들어가면 된다.
“후우. 기왕 이렇게 된 거, 우리 해봅시다.”
“네, PD님.”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창용 역시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한편.
“형, 이옥주 선생님 드라마 하차하신다는데요.”
이엔 엔터 사무실에선 기사를 검색하던 성호가 막 뜬 기사 하나를 언급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도윤의 코디를 구상하던 민주가 성호에게 휴대폰을 받아들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인 사정이라고 적혀 있는데.”
“어디 몸 안 좋으신가? 나이가 있으셔서…….”
도윤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회귀 전에도 <대책없는 로맨스>에 합류했던 옥주는 유정연과 불화를 일으키고 드라마에서 중도 하차했다.
이번에는 시기가 좀 앞당겨진 것일 뿐.
물론.
옥주의 커리어에는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때문에 도윤은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는다.
여기 있는 성호가 아무리 호들갑을 떨어도 말이다.
“근데 형, 드라마 괜찮을까요? 동시간대 편성인데…….”
그래서 분위기도 바꿀 겸.
도윤이 제안했다.
“내기할까? 어떤 드라마 시청률이 더 잘 나올지?”
“에이, 갑자기 내기는 무슨…….”
“쫄리면 뒈지시든지.”
도윤의 도발적인 한마디에 성호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화르륵.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유정연 대 신인 작가. 이거 완전 불 보듯 뻔한 싸움이잖아?’
참고로 <알고 있는가>는 <악마의 세계>와 동시간대에 편성됐던 작품이 아니다.
즉, 그때와는 상황이 분명히 다른 것.
물론 도윤의 선구안과 실력을 의심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방금 도윤이 했던 저 한마디에 성호는 이성을 상실해 버렸다.
“좋아요. 해요, 내기.”
그러자 도윤은 기다렸다는 대본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뭐 걸래?”
위험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성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소원 들어주기.”
“오케이. 만약 네가 이기면 원하는 거 뭐든 사줄게.”
“지, 진짜요?”
“말만 해. 차 한 대 뽑아줄 수도 있으니까.”
성호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자신 있게 나오는 걸 보면 뭔가 있다는 뜻인데…….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왜, 쫄리냐?”
“해요! 한다구요!”
재차 걸어온 도발에 성호는 그만 홀라당 넘어가 버렸고.
“그래서 넌 뭐 걸래?”
“어…… 그게…….”
“종신계약. 어떠냐?”
“네?”
“내가 싫다고 할 때까지 나랑 일하는 거지.”
성호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했지만.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완전 남는 장사 아니냐?”
양팔을 벌리며 묻는 도윤의 모습에.
성호는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고.
민주가 자진해서 지옥불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성호의 결연한 모습은 마치.
“아두를 구하러 가는 조자룡 같은데. 훌륭해.”
“네?”
“신경 쓰지 마. 쓸데없이 비장해 보여서 그래.”
여기 팝콘이라도 있으면 와작와작 씹었겠지만.
민주는 그 대신 솔잎의 눈 한 캔을 따고 단숨에 들이켰다.
여하튼.
내기는 시작되었다.
만약 <대책없는 로맨스>의 시청률이 높다면 성호는 소원 자유이용권을 얻는 거고.
반대로 <그 시절의 우리>의 시청률이 높다면 도윤은 성호를 평생동안 부릴 수 있게 된다.
뭐, 겉으로야 투닥거려도 사실 저렇게 사이 좋은 연예인과 매니저도 없을 것이다.
민주가 보기엔 말이다.
그나저나.
‘아이 씨, 불안한데.’
도윤은 뭘 믿고 저렇게 자신만만할까?
이 바닥 사람들이 보기에 불 보듯 뻔한 싸움인데 말이다.
의문이 남은 가운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마침내 첫 리딩 날이 다가왔다.
그리고 도윤은 앞으로 몇 달 동안 같이 촬영할 한올과 리딩 장소에 들어서며-
수많은 시선에 둘러싸였다.
“안녕하십니까, 최도윤입니다.”
“오. 최도윤 배우.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태규가 엄청시리 칭찬하드마.”
“아이고, 우리 최도윤 배우. 반가워요, 나 김형남이라 합니다. 주연 합류한다고 할 때 안 믿었는데, 진짜였네?”
이제는 완전히 바뀐 시선 속에서 호의적인 인사들이 이어졌고.
설령 도윤을 향한 좋지 못한 감정을 품은 사람이 있을지언정.
이제는 그게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없었다.
도윤은 주연 배우다.
그것도 드라마 두 개와 영화 하나를 흥행으로 이끈 주연 배우.
20대 배우들 중 이런 경력을 지닌 배우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래서 오히려 쭈뼛거리면서도 먼저 다가오는 후배들도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최도윤 선배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런 가운데.
도윤을 가장 반긴 사람은…….
“최도윤 선배니이이임!”
유준이었다.
“떨어져, 더워.”
“지금 가을이지 말입니다. 춥습니다.”
“너 진짜 오디션 지원했었구나?”
“제가 또 선배님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가지 말입니다.”
헤실헤실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도윤은 강아지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유준의 모습에 그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살 만하냐?”
“당연하지 말입니다. 선배님이 그때 <청춘 에세이>에 추천해 주신 덕분에 요새 저 엄청 바쁩니다.”
참고로 유준은 <청춘 에세이>에 출연해 녀석의 성격을 그대로 빼다박은 듯한 비글미 넘치는 배역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시청률 역시 지상파 기준 15%를 기록하며 선방했고, 대중들에게 ‘박유준’이라는 이름 석 자를 조금씩 알려가는 상태.
광고도 하나씩 출연하고 있고.
얼마 전엔 유명 잡지 표지모델도 했다.
쉽게 말해.
도윤 덕분에 원래의 미래보다 훨씬 더 빠르게 빛을 본 것이다.
지금, 도윤의 뒤에서 쭈뼛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한올처럼.
“참, 이쪽은 채한올 배우. 이번에 데뷔할 친구. 나랑 같은 소속사.”
“아, 그 소문의 엄청난 신인 배우…… 허억.”
순간 한올을 보자마자 헛숨을 들이켜는 유준.
도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너, 너무 아름답지 말입니다.”
초면에 아름답다는 말이라니.
한올은 그만 얼굴을 붉혀버렸고.
“아, 안녕하세요. 시, 신인 배우 채한올이라고 합니다…….”
터질 것 같이 빨개진 얼굴로 간신히 인사했다.
그리고 유준은…….
‘얘 봐라?’
도윤이 생전 처음 보는, 부끄럽다는 얼굴로 한올처럼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저, 저도 신인 배우 박유준…… 이, 이게 아니라. 신인 배우 박유준입……니다.”
쭈뼛쭈뼛.
쑥쓰러워 서로 다음 할 말을 찾지 못하는 신인 배우 둘의 귀여운 모습에.
도윤의 웃음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