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70화 (70/200)

70.하나만 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생긋, 웃던 한올이 꺼낸 첫 대사에 모두의 말문이 막혔다.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보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나오는…….

그런 목소리.

“잘 지냈지? 많이 컸네.”

정말 동네에서 함께 자란 누나와 10년 만에 마주치면 이런 기분일까?

“키도 엄청 큰 것 같고…… 내가 알던 꼬맹이랑 다른데?”

묘한 향수가 세 사람의 감성을 건드리고.

“어떻게 지냈어?”

한 줄 대사에 불과한 그 말에, 대사를 받아주던 조연출은 그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긴장해서.

“나야…… 잘 지냈지. 누나는?”

“그냥. 가끔 한국은 지금 어떨까, 내가 알던 사람들은 어떻게 지낼까, 그리고 넌 어떻게 지낼까. 이런 생각들 하면서 지냈지.”

부드럽고 싱그러운 웃음을 띤 그 모습에.

조연출의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나?’

그는 지금까지 이런 종류의 오디션을 진행하며 수많은 지원자의 대사를 받은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렇게 눈앞에서 대사를 주고받는 것만으로 사람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오래전에 함께 지냈던 동네 누나와 마주친 이 기분.

분명히 어떤 격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장면임에도, 콩닥거리는 이 가슴은…….

그래.

첫사랑의 기억이다.

보기만 해도 얼굴이 붉어지고.

눈을 마주칠 수 없는 이 느낌.

물론 지금 조연출이 맡은 상대역이자 도윤이 연기할 ‘서윤재’는 전혀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납득하고 있었다.

지금 조연출이 보이는 반응을.

‘이거…… 물건이잖아?’

모래사장을 뒤지다 누군가의 편지가 담긴 유리병을 발견한 이 기분.

도대체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온 걸까?

격하게 화를 내는 장면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장면도 아니다.

그저, 10년 만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마주한 장면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달달한 느낌은 뭘까?

‘이거다. 이거야!’

이런 와중 캐스팅 디렉터는 흥분하고.

‘완전히…… 똑같잖아?’

이 각본을 쓴 박정훈 작가는 자신이 상상했던 ‘이성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이, 이상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올이 모든 대사를 마치고 예의 그 겁먹은 표정으로 돌아가자.

“어디서 연기를…….”

“분명 극단에 1년밖에…….”

“이엔 엔터에는 이번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 명이 동시에 입을 열었고.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큼, 크흠.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김창용입니다. 이번 작품 연출을 맡았습니다. 채한올 지원자. 얼마 전까지는 극단 <호연>에 있던 걸로 적혀 있는데, 이엔 엔터에는 언제 들어온 거죠?”

“그게…… 2주 전이었습니다.”

김창용 PD가 할 말을 잃은 가운데.

“그럼 들어오자마자 보신 첫 오디션이 바로 이건가요?”

“그,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연기 경력, 그러니까 어디 뭐 드라마나 영화에 출연한 경력이 아예 없는 건가요?”

“네, 넵.”

중간에 치고 들어온 캐스팅 디렉터 역시 할 말을 잃어버렸고.

“최도윤 선배님이…… 떨어져도 좋으니 한번 경험 삼아 꼭 나가보라고 해서 이렇게 지원하게 됐습니다.”

막 입을 열려고 하던 박정훈 작가는 한올의 말에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할 말을 잃었다.

최도윤.

또 그 이름이다.

갑자기 찾아와 <그 시절의 우리>의 주연을 맡으며 드라마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켜 지금 이 규모의 오디션을 만들어내더니.

이런 배우까지 보내줄 줄이야.

“허허.”

김창용 PD의 웃음소리가 오디션장에 울려퍼졌다.

카메라 앞에서 단 한 번도 연기해 본 적 없던 배우가.

모두의 마음을 완벽하게 뒤흔든 순간이었다.

* * *

한올의 합격 소식이 전해지고.

“으아아앙…….”

한올은 소식을 전해준 도윤 앞에서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도윤은 한올이 울음을 멈추길 기다렸다가.

“누구 힘도 아닌 채한올 배우의 힘으로 된 겁니다. 자신감을 가지세요.”

혹시나 다른 생각을 할까 미리 선수를 쳤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저, 정말 열심히 할게요!”

기대된다.

캐스팅 소식이 밝혀지고 의문을 품을 시청자들이.

한올의 연기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저 아무것도 모르는 페이스로 연기할 ‘이상아’는.

과연 어떤 느낌일까?

여하튼.

예상대로 한올은 오디션에 합격했으며 계획은 성공했고.

도윤은 이제 다시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집중했다.

“후우…….”

호흡에 따라 어느덧 제법 붙은 근육이 오르내린다.

드니로 어프로치(De Niro's approach)라는 말이 있다.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로버트 드 니로(Robert De Niro)의 연기에서 비롯된 단어.

자신의 외부적인 조건을 변화시키며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몰입하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도윤은 지금 그 방식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다소 포근하게 안길 수 있는 느낌의 남성상을 원해서요.]

미팅 당시, 작가와 PD가 어렵사리 꺼낸 제안.

도윤은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며 지금 이렇게 전문 트레이너의 도움을 받아 몸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좋습니다. 더더더. 하나만 더! 하나만 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하나만 더’를 외치는 트레이너가 가끔 미웠지만.

전체적으로 아주 순조로웠다.

“아주 좋네요. 초보자치고 자세도 잘 나오시고, 예전에 운동한 적 있으세요?”

해보긴 했다.

회귀 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할 때 헬스장 아르바이트를 해봤으니까.

일이 끝나고 관장의 배려를 받아 잠시 운동한 경험 덕분이다.

“군대에서 전역하기 전에 잠깐…….”

“하긴. 남자분들은 그때 보통 헬스를 처음 접하시죠. 근데 그때 제대로 배우셨나 보다. 자세가…….”

그렇게 운동을 마무리하고.

사무실로 돌아오자 수철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윤이 왔냐?”

“네, 어쩐 일이세요?”

“어쩐 일은. 합격했다면서? 내가 다 좋다. 오디션 내가 합격한 기분이야.”

바로 한올의 오디션 합격 사실을 듣고 도윤을 찾아온 것이다.

“좋네요. 앞으로 더 좋아질 테고.”

“근데 무슨 합격할 줄 알았던 것처럼 말한다?”

도윤은 이상하다는 듯 묻는 수철을 향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수도 있고요.”

“그때 네 말 듣고 뽑았길 천만다행이지. 어우, 다른 데 갔을 거라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다른 데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한올의 성격상…….

떨어졌다면 한참을 절망하다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용기를 냈을 테지.

어쨌건.

한올은 도윤 덕에 자신의 재능을 좀 더 일찍 펼치게 되었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가능성도 줄어든 셈.

“아무튼 잘됐지. 우리 이러다 진짜 몇 년 뒤에는 상장할지도 모르겠다.”

상장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도윤으로 확실한 가능성을 엿보았고.

여기에 한올을 비롯한 다른 재능 있는 배우들이 하나둘 더해진다면 꿈은 아니리라.

“잘될 거예요.”

“암, 잘 되어야지.”

“잘 돼서 팀장님도 연기하셔야죠.”

그 말에 순간 수철은 멈칫했지만.

“이제 와서 무슨.”

이내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겼다.

하지만 도윤은 봤다.

수철의 눈빛에 어린 망설임의 빛을.

“복귀하면 난리 날 것 같은데요. 저 그때 놀랐잖아요. 거기 있던 극단 배우들 싹 굳는 거 보고.”

“다 옛날 일이야.”

“정말 복귀할 생각 없으세요? 단 조금이라도?”

“…….”

침묵하던 수철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말고. 나중에, 정말 나중에.”

그리고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화제를 돌렸다.

“근데, 이번 작품 어떠냐? 할 만하겠어?”

“할 만하고 말고가 뭐 있어요. 당연히 하는 거죠.”

“아니, 솔직히 그렇잖아. 지금까지 까칠하거나, 차갑거나, 소름 끼치는 배역만 맡았는데. 이미지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괜찮겠냐는 거지. 대본 읽어보니까 분위기 엄청 달달하더만.”

도윤은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되물었다.

“그럼 계속 그런 배역만 해요?”

“꼭 그런 말이 아니라……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정말 괜한 걱정이다.

도윤이 누군가.

신인 주제에 연기의 깊이는 10년 이상 연기한 베테랑 못지않다는 평가를 받는 배우다.

팬들은 물론, 같이 연기했던 배우들조차 입을 모아 칭찬할 정돈데.

“괜한 걱정이지. 그럼.”

도윤은 멋쩍게 웃는 수철을 보며 실없이 피식거렸다.

“걱정 마세요. 잘해볼게요. 로맨스는 처음이지만요.”

“참,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조심해라. 아직 주연 캐스팅 누가 된지는 모르겠는데…… 꼭 말해주기다?”

“뭘요?”

“몰라서 물어? 연애하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는 미리 말하라고.”

도윤은 순간 미간을 좁혔다.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흘러가는데요?”

“얌마, 내가 그걸 모르냐? 로맨스라는 게 말이에요, 찍다 보면 배우들끼리 눈이 안 맞을 수가 없어요. 내가 차마 말을 못 해서 그렇지 보고들은 썰만 풀어도 일주일 밤낮을…….”

수철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고 도윤을 바라봤다.

“설마, 지금 연애하는 건 아니지?”

“안 해요. 그리고 하면 꼭 말할게요.”

“하긴, 끝나면 바로 집 가서 대본만 본다고 하니 내가 안심이 되긴 한다만…….”

울컥했지만.

사실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뭐, 어디 가기도 그렇다.

어떻게 얻은 기횐데.

가끔 가족들을 찾아가고.

시간이 나면 동료 배우들을 만나고.

그것만으로도 도윤에겐 충분한 여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수철이 걱정하는 건 따로 있었다.

“그리고 혹시, 혹시라도 나쁜 제안 하는 사람 있으면 잘 거절하고. 분위기상 안 되겠다 싶으면 나한테 전화하든가.”

바로.

온갖 어두운 제안들.

연예계에 비일비재한…… 그렇고 그런 제안들 말이다.

굳이 멀리 갈 것도 없이.

서태주라는 훌륭한 선례가 있다.

소속 그룹까지 폭파시켜 버리고 지금은 거의 은퇴한 거나 다름없는 그 녀석.

아무튼.

그야말로 안절부절이다.

수철은 언제나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부모의 심정처럼.

그래도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진 않다.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니까.

“너도 보고들은 게 있으니까 잘 알겠지만, 이 바닥이 좀 그래. 더럽게 노는 놈들도 많고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인간도 많아. 그리고 그거 들었지? 주형진 촬영장에서 쫓겨난 거.”

“주형진이면…….”

<기적의 레시피>를 함께 찍었던 배우이자.

도윤의 라이벌 셰프역으로 출연한 배우다.

별로 신경을 안 둬서 그럴까.

이상하게 얼굴이 가물가물하다.

“감독한테 자기 대사 늘려달라고 요구하고 스태프한테 욕하다가 난리 났었어. 아직 기사는 안 났는데, 조만간 아마 터질 거다.”

생각보다 빠르게 빛을 보는 배우들이 있는 반면.

이렇듯 서태주와 주형진처럼 도윤이 아는 미래보다 빠르게 몰락하는 배우도 있는 것이다.

“걱정 마세요. 잘할게요.”

“그래, 믿는다. 너니까. 그리고 채한올 씨…… 아이고, 아직 안 친해져서 이렇게밖에 못 부르겠네. 아무튼 그 친구는 네가 잘 좀 가르쳐주고.”

연신 신신당부하는 모습에 도윤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팀장님, 제발 가서 좀 쉬세요. 매일 새벽에 나와서 밤에 퇴근하시는데 안 힘드세요? 그러다 병나요.”

그 말에 수철은 기다렸다는 듯 씩 웃었다.

“힘들긴, 회사가 점점 커지고 있는데 힘들겠냐? 오히려 쌩쌩하다. 얼마 전에 건강검진도 받았는데, 결과 보더니 와이프가 셋째 물어보더라.”

“그래서요?”

“대답 안 하고 도망갔지.”

큭큭대던 수철은 도윤의 어깨를 툭 치고 방을 나섰고.

도윤은 그런 수철을 바라보며 빠르게 달라지는 미래에 새삼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감정도 잠시.

도윤은 다시 대본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몰입하기 시작했다.

서윤재.

도윤이 맡을 배역이자-

지금까지 도윤이 맡았던 배역과는 확실히 다른 캐릭터.

따뜻하고 사람 좋지만.

아픈 과거를 품은 남자.

이른바-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펼쳐 나가는 로맨스 성장 드라마라고 해야 할까?

아주 자극적인 소재도 없고, 보는 사람이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내용도 없지만.

잔잔하고 담담한 스토리가 가슴을 울리는 느낌이다.

실제로 회귀 전, 도윤이 아는 미래에서 박정훈 작가가 써낸 작품들은 대부분 이런 잔잔한 분위기가 주를 이뤘다.

느긋한 일상을 다루거나.

소박한 이야기를 그리거나.

보는 사람의 입에서 잔잔한 웃음이 떠나질 않게 만드는 부담 없는 드라마.

‘성공하겠지. 분명히.’

도윤은 <알고 있는가> 이후 미래엔 나오지 않았을 <기적의 레피시>와 <그 남자의 메모리>를 거쳐 이미 알고 있는 작품으로 돌아왔다.

이 작품은 원래대로라면 엄청나게 큰 성공까지는 거두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신인 작가의 작품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준수한 성적을 거둔다.

그런 작품에 도윤이 합류했다.

그것도 주연으로.

그리고.

예정되지 않았던 또 한 명의 배우까지.

“도윤아.”

그렇기에 도윤은 수철이 다시 돌아와 꽤 심각한 표정으로 전해준 소식에도-

“유정연 작가 <대책없는 로맨스> 말인데…… <그 시절의 우리>랑 동시간대에 편성될 것 같다.”

“상관없어요.”

성공을 확신했다.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아주 자신감 넘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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