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이엔 엔터 오디션(2)
더듬거리면서도 확실하게 지원 동기를 밝힌 한올.
심지어 그 지원 동기가 도윤이라는 말에 동민과 수철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도윤이 안 불렀으면 어쩔 뻔했어?”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서 도윤은 웃고 있었다.
그 바람에 한올이 더욱 긴장해서 문제지만.
‘우, 웃으셨다. 잘 말한 거겠지?’
한올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집에서 연습할 때는 이 정도까진 긴장하지 않았지만.
막상 우상이나 다름없는 도윤을 보고 있자 숨이 턱턱 막히고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최도윤.
20대 배우 중에서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말도 안 되는 성과를 이룬 배우이자.
한올과 같은 연기자 지망생들의 워너비다.
쉽게 말해.
‘나도 저렇게 빠르게 뜰 수 있다!’라는 꿈을 품게 만들어 준 장본인이라고 해야 할까.
거기에 도윤이 극단 경력도 없고, 연극영화학과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도 한몫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모른다.
도윤이 펼친 연기에는 재능뿐만 아니라-
지독하게 길었던 인고의 시간과.
피를 토하는 노력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도윤은 궁금해졌다.
현시점의 채한올은 과연 어떤 배우일까?
앞선 지원자들은 동민과 수철, 그리고 도윤을 사로잡지 못했다.
발음이 부정확하거나.
대본 숙지가 안 되어 있거나.
너무 떤 나머지 결국 오디션을 포기하거나.
그도 아니면.
태도가 불량하거나.
그런 의미에서 채한올은…….
‘너무 떠는데.’
‘비주얼은 청순해 보이는데…….’
동민과 수철에게 큰 기대감을 안겨주지 못했다.
오로지 도윤만이.
묘한 미소를 띤 채 한올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진짜 말도 안 되는구나.’
그 바람에 한올은 더욱 긴장해 버렸다.
<그 남자의 메모리>를 며칠 사이 정주행해서일까.
눈빛만 봐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이 기분.
‘배우는 정말 저런 눈이구나.’
그때 도윤이 물었다.
“극단 출신이죠?”
“네, 넵. 그렇습니다.”
“여기, 극단 <호연>에서 1년 동안 활동한 걸로 되어 있는데…… 현재 극단 활동 중에 오디션을 지원했군요?”
한올의 말문이 막혔다.
‘적응하기 힘들어서 그랬다고 하면…… 안 좋게 볼지도 몰라.’
한올은 소심하다.
배우 지망생들이 저마다 ‘끼’를 지닌 것과 달리, 한올은 소심하다 못해 자기 의사를 제대로 피력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러니까, ‘극단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선배들 수발과 수시로 이뤄지는 집합.
암암리에 이뤄지는 언어 폭력.
그리고 매일은 아니어도 잊을 만하면 날아드는 ‘소소한’ 폭력과.
수시로 날아들던 단장과 몇몇 선배들의 성희롱까지.
한올이 이 자리에 온 건.
도윤을 보고 싶어서란 이유도 있었지만…….
사실, 더 이상 극단에 머무를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거기선 연기가 아니라.
그냥 버티고 복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 같았다.
무대에 오르는 건 아직 꿈도 못 꾸고.
대본 대신 손에는 대걸레와 빗자루를 들어야 하며.
선배들의 기분에 따라 그날 퇴근 시간이 결정되는, 바깥에서 보면 참 이상한 사회.
“그렇……습니다.”
때문에 한올은 결국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대답만 했지만.
의외로 도윤은 별다른 추가 질문 없이 넘어갔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되는 대로 시작하죠.”
다행이었다.
그사이 수철이 말을 이었다.
“아, 그리고 연기 상대가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아, 그. 네. 알겠습니다.”
“어떤 연기를 준비했죠?”
“사랑 고백…… 장면입니다.”
그 대답을 듣자 동민이 껄껄 웃었다.
“사랑 고백이면 이 팀장보다는 도윤이가 상대역으로 좀 더 낫겠네. 아, 도윤이라면 너무 떨려서 고백을 못 하려나?”
수철이 입술을 삐죽이는 사이.
“제가 할게요.”
“그래라. 나 참, 서러워서.”
도윤이 일어나 한올 앞에 섰고.
한올은 헛숨을 흡, 들이켰다.
떨리지만.
이상하게도…….
“오디션에서 이런 말 의미 없을지도 모르지만…… 부담 가지지 마세요. 잘할 수 있을 겁니다.”
도윤의 저 한마디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네.”
한올은 곧바로 눈을 감고, 감정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자신의 우상이자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눈앞에 있고, 심지어 만으로도 떨려왔지만…….
그래서 더 합격하고 싶었다.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 아니어야만 하니까.
“저 그럼…… 선배님. 부탁드리겠습니다.”
“대사는 필요 없나요?”
“그…… 그게…… 제가 시작하면 받아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고백을요?”
천진하게 ‘고백’이라 묻는 도윤의 말에 한올의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다.
“네, 네엡!”
도윤이 싱긋거리자.
한올의 심장은 정말 사랑 고백을 앞둔 사람처럼 쿵쾅거렸다.
그러나 곧.
감정을 끌어올린 한올의 눈빛이 바뀌더니.
첫 대사가, 한올의 입술 사이로 서서히 흘러나왔다.
“……좋아해요.”
그 순간.
오디션장은 마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바다의 백사장이 된 것 같았다.
흔들리는 음성.
떨리는 눈빛.
그리고.
대사를 친 뒤 입술을 앙다문 채 도윤을 바라보는 한올의 애절한 표정까지.
“정말…… 좋아해요, 대리님.”
이어진 대사에.
동민은 제법이라는 듯 옅은 숨을 내뱉었고.
수철은 안경을 고쳐 썼으며.
도윤은-
‘역시.’
자신의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단 두 줄의 대사만으로도 절절하게 전해지는.
당신을 좋아한다는 감정.
과연 방금까지 말을 더듬으며 극도로 떨던 그 사람이 맞을까?
만약 여기가 촬영장이라면, 분명히 모두가 눈을 떼지 못했을 것이고.
PD는 제대로 된 컷을 건졌다는 생각에 흥분했으리라.
“제가…… 제가……. 정말 좋아하는데…… 말을 못 했어요……. 근데…… 이제는 놓치기 싫어서…… 지원팀 유미 씨랑 친하게 지내시는 거 보고…… 놓칠까 봐…….”
또르르.
한올의 흰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맑은 눈물이 도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마침내 한올은 고개를 든 채, 도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대리님. 진심으로.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어요. 자상하고, 세심하고, 말도 잘하고…… 그, 그러니까…… 그래서 좋았다구요…….”
마지막에 서서히 내려가는 목소리와.
부끄러움에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옷깃을 만지작대는 손.
더 이상.
이 연기에 대해서 말이 필요할까?
방금까지 떨던 사람이 맞을까?
“그래서…… 대리님은요?”
그렇기에 도윤은 답했다.
“한올 씨. 근데…… 왜 이렇게 늦게 말했어요?”
한올의 연기를 더 보기 위해서.
배역에 몰입한 배우는 때때로 배역에 휩쓸린 나머지 대본에 없지만 ‘그 배역이 할 법한’ 대사를 치기도 한다.
바로 지금처럼.
“그게…… 말하면…… 더 이상 대리님을 못 볼까 봐…….”
사실 지금의 이 연기 자체가 도윤과 한올이 즉석에서 분위기만 가지고 만들어내는 즉석 연기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도윤의 대사에 조금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대사를 만들어내는 한올의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다.
도윤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네?”
도윤은 곧장 수철과 동민을 바라봤다.
“어떠세요?”
그 순간.
한올은 안도인지 실망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대사를 받아준 걸까?
아니면 연기가 좋다고 한 걸까?
“이 팀장. 어때?”
“음…….”
와중에 고민하던 수철은 결국.
“좋네요. 도윤이가 앞에 있어서 그런 건진 몰라도, 느낌 있네요. 그래도, 하나 더 보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수철의 말에 도윤이 한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나 더, 가능해요?”
불가능하다고 말할 턱이 없었다.
이미 계단을 하나 올랐는데, 여기서는 불가능해도 된다고 해야 한다.
“네, 네! 가능합니다!”
“좋습니다. 그럼…… 가장 자신 있는 걸로 해보세요. 대사는 각자 알아서.”
도윤은 두 걸음 뒤로 물러났고.
그 모습에서 한올은 묘한 아쉬움을 느꼈다.
방금 연기했던 상황이 이어진 것처럼.
‘미, 미쳤어!’
한올은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사무실에서 부당한 대우를 따지는 후배와 선배의 상황은…… 어떨까요?”
도윤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없어요?”
“아, 그, 그게 아니라…….”
“좋습니다. 그럼 제가 후배 역할을 하죠.”
한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계획에 없었다.
당연히 자신이 ‘후배’를 하고 도윤이 ‘선배’를 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네, 그,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런 한편.
도윤은 기대하고 있었다.
상황을 보면 보통 ‘후배’가 따지기에 ‘후배’ 역을 맡은 배우가 감정을 보여주기 쉽다.
한올도 그걸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윤은 다른 걸 기대하고 있었다. 저 순해보이기만 하는 얼굴로 하는, 부당한 지시를 하는 ‘선배’의 연기를.
그 의도를 깨달은 수철은 피식거렸다.
‘녀석, 바라는 것도 많아요.’
물론 수철도 기대하긴 마찬가지.
이런 가운데.
드디어 한올의 대사가 시작되었다.
“최 대리. 나 좀 보자.”
역시나.
방금까지 어쩔 줄 모르던 것치고는 제법이다.
아니.
왜 떨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연기만 시작하면 확 달라지는 건가?’
이런 한편.
이에 맞서는 도윤은 ‘부당한 지시에 맞서는 후배’에 맞춰 대사를 쳤다.
“예, 무슨 일이신데요?”
“무슨 일? 야, 너 미쳤어? 니가 뭔데 하청을 이따위로 선정했어! 내가 말했지. 내가 정한 이원기공, 이쪽으로 진행하라고!”
깊은 곳에서 응축되어 있다가 터져 나오는 외침.
도윤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 정도였나 싶어서.
‘허.’
그다지 크지 않은 체구와 순진해 보이는 외모의 한올이 펼치는 저 대사는.
어울리지 않기는커녕, 오히려 찰떡같이 들어맞는다.
“너, 도대체 뭐냐? 나랑 해보자는 거야? 어? 니가 뭔데 멋대로 하청 선정해서 일 진행하냐고! 내가 분명히 세 번이나 말했지. 이원기공으로 진행하라고!”
“과장님. 이원 얘들 납기일 못 맞춘 게 그동안 무려 세 번입니다. 신용도 바닥이고, 매번 이런저런 핑계 대면서 차일피일 납기 미루는 업체랑 도대체 무슨 하청을 합니까?”
그리고 여기에 맞서는 도윤.
‘선배’의 성질을 긁으려는 듯.
전혀 물러서지 않는 표정으로 대사를 치자.
이에 자극을 받은 한올은.
“네가 뭘 알아? 너 여기서 몇 년 있었어? 그 업체랑 일 몇 년 했어? 페이퍼 몇 장으로 업체 전체를 판단해? 엉?”
‘선배’ 배역을 갑자기 맡아 당황한 것이 무색하게도 정말 상사라도 된 양 콕콕 찌르는 대사를 내뱉는다.
만약 여기가 진짜 회사였다면, 사방이 분명 조용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도윤은.
“과장님, 혹시 이 하청에 제가 모르는 뭐 특별한 거라도 있습니까? QC를 1초 만에 끝낸다든가, 아니면…….”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마침내 한올을 폭발시키며 제 역할을 다했다.
‘좋군.’
카메라도, 세트장도, 대본도 없는 상황에서 즉흥적으로 대사를 쏟아내고 이 정도 수준의 연기를 보여준다는 건-
“물건이네요.”
수철의 중얼거림처럼, 한올이 범상치 않은 재능을 지녔다는 뜻.
동민은 도윤과 수철의 반응을 보며 씩 웃었다.
‘역시, 도윤이 데려오길 잘했지.’
그런 한편으로는…….
물끄러미 수철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언제쯤 다시 시작하려나.’
동민은 기대했다.
오늘 신인들이 펼치는 연기에 수철이 자극을 받기를.
그렇게 받은 자극으로 다시 연기를 시작하기를.
이엔 엔터로선 우수한 팀장 하나를 잃는 셈이지만…….
‘그까짓 거 뭐 대수라고.’
수철을 오랫동안 봐 온 동민은 수철이 다시 연기만 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런 기미가 안 보였다.
“오케이. 거기까지 하죠.”
이런 가운데 오디션은 종료되었고.
도윤이 다시 자리에 앉자 한올은 방금의 그 강렬한 연기를 펼친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긴장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괘, 괜찮았을까?’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고.
자신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시선이 마치 불합격을 알리는 전조 같았다.
“채한올 지원자, 고생 많았습니다. 며칠 내로 중으로 결과 통보 예정이니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그래도 한올은 마지막까지 힘차게 인사한 뒤 고개를 꾸벅, 숙이고 오디션장을 나왔다.
그리고 문을 닫는 순간.
“흐아아아…….”
다리가 풀렸는지 괴상한 소리를 흘리며 벽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가 이 자리에 있던 덕분에.
이미 합격한 줄도 모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