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잊어버렸으니까
<그 남자의 메모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물론 드라마는 아직 방영 중이다.
다만 모든 촬영이 끝나고.
제작진과 배우들은 조촐하게나마 자리를 만들었다.
그래도 지금 아니면 언제 기회가 있겠냐며 술 대신 저녁을 같이하는 자리를 만든 것이다.
“고생했어요, 최 배우.”
“유종탁 선배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술이 빠져 다소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모두가 이해했다.
그리고 시청률이 이렇게 잘 나오는데 어디 술이 대수겠는가.
당장 시청률 17%를 기록해서 마지막 화 즈음에는 19%도 넘보게 생겼는데 말이다.
<알고 있는가>의 최고 시청률 기록은 이미 넘어선 지 오래고, 지상파로 따지면 30%는 훌쩍 넘는 수준.
쉽게 말해.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역사의 중심에는…….
저기,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와 축하를 받는 도윤이 서 있었다.
‘대단한 배우야, 대단해. 지금도 이런데, 서른 넘으면 더 대단해지겠지.’
재훈은 솔직한 감상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너무 많이 칭찬해서 더 칭찬하기 민망할 정도다.
도대체 어디까지 성장할까?
‘운이 좋았다’라고 치부하기엔, 도윤은 드라마 두 개와 영화 하나를 연달아 성공시켰다.
각본도 각본이지만, 주연 배우의 매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
그렇기에-
아쉬웠다.
이제는 정말 같이할 기회가 많지 않을 것 같으니까.
흔히 말하는 페르소나(Persona)처럼 도윤과 계속 작품을 할까 생각도 해 봤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저런 배우가 과연 감독 한 명, PD 한 명에만 만족할까?
글쎄.
자신이 보기에 도윤은 연기혼이 넘쳐흐르는 나머지 연기를 하며 살아가는 이유를 얻는 타입이다.
20대 배우가 어떻게 저런 절박함을 가지게 됐는지.
재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선배님, 마지막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번 촬영, 잊지 못할 겁니다.”
이런 가운데 도윤은 촬영을 함께했던 배우 한 명 한 명에게 인사하고 있었고, 지금은 승원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승원은 묘한 표정으로 도윤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것 같기도 했었고.
저 정도 경력으로 주연을 차지한 도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의 과거가 부정당하는 기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아니, 꽤 오래전부터 인정했다.
도윤이 왜 주연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래서 승원은 이렇게 답했다.
“고맙다.”
간신히, 간신히 쥐어짜듯이.
“많이 배웠다.”
도윤은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씩 웃으며 고개만 끄덕일 뿐.
이런 한편.
‘키스씬 언급할까? 그러면 안 되는데!’
속으로 망상의 나래를 펼치던 유나는 마침내 도윤이 자신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누나, 아니 한유나 선배님.”
“응, 으응?”
“감사했습니다.”
“…….”
다소 김이 새는 도윤의 말에 그만-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내가 뭘 기대한 거야.’
방금까지 펼치던 망상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야 말았다.
* * *
<그 남자의 메모리>의 마지막 화는 예상대로 시청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 아니 최형식이랑 이다한이랑 같이 죽는다고???
-와... 생각도 못했음;;
-그럼 이거 해석을 어떻게 해야 함? 최형식이 자신이 괴물이 되는 걸 막으려고 이다한이랑 같이 죽은 건가?
-최형식은 절벽에서 이다한 죽일 기회가 있었음. 이전 씬에서 총알 여섯 개 챙기거든. 근데 그게 다 실탄이었고. 근데 딱 다섯 발만 쏘고 한 발 남았는데...
-ㄹㅇ 그거 안 쏜 거 보면... 자기랑 딱 같이 가자는 그거였을 듯
-결말 존나 씁쓸하다;; 이다한 죄악도 밝혀지고, 최형식은 영웅이 됐는데...
-그럼 서지아만 살아남은 거네... 아, 기분 진짜 꿀꿀하다.
-결말은 좋은데, 기분은 이상함. 하, 후유증 장난 아닐듯;;
-후유증 미침... 이다한에 치이다가 막판에는 최형식에 치이네...
총알 하나가 남아 있음에도 ‘최형식’이 ‘이다한’과 함께 죽고, ‘서지아’는 살아남아 진실을 전하는 결말.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야 ‘서지아’는 지금까지 ‘이다한’을 조사하며 느꼈던 위화감과 ‘최형식’의 자료를 종합한 결과-
‘이다한’이 왜 사이코패스가 되었는지를 깨닫고.
원래부터 그랬던 게 아닌, 그가 만들어진 살인마였음을 깨닫는 것으로 마지막 화는 막을 내린다.
이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고.
심지어 전문가들이 방송에 출연해 ‘사이코패스’를 주제로 토론을 벌였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명작 드라마가 하나 탄생했다는 것.
로맨스는 하나도 섞지 않고, 그나마 있는 거라곤 ‘이다한’의 다른 인격이 ‘서지아’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사실 정도.
그것조차 급박한 상황에서 편집과 배우들의 연기로 살려낸 키스씬으로 잘 드러냈다는 평을 받았다.
여하튼.
<그 남자의 메모리>는.
기어이 최고 시청률을 달성했다.
20.5%.
20%의 벽을 넘겨버린 것이다.
[‘웰메이드’ 드라마 탄생!]
[또 케이블 신화 썼다! <그 남자의 메모리>, 시청률 20.5%로 막 내려]
[‘이제는 케이블 시대’, 지상파, 발등에 불 떨어져……]
찬사를 이끌어 내기엔 충분한 성과였고.
[최도윤, 이제는 명실상부한 블루칩으로!]
[‘최고의 20대 배우’ 최도윤, 다음엔 누가 채갈까?]
[제작사 및 스튜디오, 특명 내렸다…… “최도윤 잡아라”]
[<그 남자의 메모리> 출연 배우들, 몰려드는 제안에 ‘행복한 몸살’!]
도윤은 물론이고, 조금이라도 <그 남자의 메모리>에서 비중 있게 출연한 배우들은 제작사와 스튜디오의 다음 타겟이 되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큰 타겟인 도윤은 지금…….
“건배!”
“건배!”
오랜만에 뭉친 <알고 있는가> 팀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 남자의 메모리>도 끝났겠다.
마침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시기에 촬영을 마쳤기에 어렵사리 자리가 만들어졌다.
해영.
선우.
석준.
그리고 태규까지.
“옥주 누나…… 아니 선배님은 못 오신대. 일이 바쁘셔서.”
“아쉽네요. 같이 자리하면 좋았을 텐데.”
“그래서 우리 회식비 보내주셨어.”
태규의 말에 도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회식비를요?”
“응. 못 가서 미안하다고. 내 몫까지 마시라고.”
이거 참…….
“도윤이 너 덕분인 줄 알아. 한 달에 한 번 꼬박꼬박 안부 전화 드리는 후배 요새 몇 없다고 얼마나 예뻐하는데.”
도윤은 그 말에 멋쩍게 웃었다.
“아무튼 잘하고 있어. 드라마도 또 잘 됐고, 영화는 500만 넘었고. 이만하면 뭐, 20대 배우들 중에서는 원톱이야, 원톱.”
“선배님! 저희는요?”
“너희는 <그 남자의 메모리>랑 시간대 안 겹쳐서 다행인 줄 알아. 시간대 겹친 드라마들 싹 다 죽 쑨 거 알지?”
“히잉…….”
<청춘 에세이>에 출연한 해영과.
<그 남녀의 방식>에 출연한 선우.
그리고 <내 마음의 목소리>에 출연한 석준까지.
세 사람 모두가 앓는 소리만 낼 뿐,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건 정말 사실이었으니까.
“솔직히 사기야. 석준 오빠, 안 그래요?”
“안 그래도 촬영장에서 도윤이 이야기 많이 들리더라.”
“형, 너무 부러워요.”
도윤은 선우를 보며 뭘 그렇게 부러워하냐며 한마디 툭 던졌다.
“너도 드라마 잘됐잖아. 아무리 지상파 요새 부진하다지만 18퍼센트나 찍었는데. 광고도 많이 들어온다며?”
“그거야 그렇지만, 형이 너무 넘사벽이니까 그렇죠.”
“맞아. 도윤 오빠는 진짜…… 말이 안 돼. 근데 오빠, 안 힘들어요? 이제 잠깐이라도 좀 쉬는 게 어때요?”
“도윤아, 얘 봐라. 벌써 견제 들어온다.”
석준의 말에 도윤이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그런 것치곤 해영이도 잘했는데요, 뭘.”
참고로 도윤의 추천으로 <청춘 에세이>에 합류한 해영은 현재 차세대 20대 배우 중 하나로 꼽히고 있었다.
귀염상 마스크와 더불어 이번 <청춘 에세이>에서 주목받은 술 취한 연기가 엄청난 화제가 된 것이다.
여기에 석준은-
“그리고 다들 조용히 해. 나만큼 망한 사람 어디 있다고.”
이번에 출연한 드라마가 망한 관계로 눈물을 삼켰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가> 출연 전에 계약을 맺은 배역이라 해영이나 선우의 경우처럼 도윤이 개입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오빠…… 미안해요.”
그 모습에 해영은 위로를 하고.
“형…… 저는 다음 작품 하고 군대 가요.”
선우는 위로를 갈구했다.
그 비보에 주변이 조용해진 가운데.
“잘 생각했다. 미리미리 가두면 좋지. 나중에 괜히 연기니 면제니 잡음 생기는 것보다 훨씬 깔끔해.”
선우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도윤이 물었다.
“벌써 정했어?”
“네…… 사장님이랑 이야기했는데, 아무래도 지금이 적기일 것 같다고 하더라구요. 이제 주연 제안도 들어오고 하니까 하나 골라서 한 다음에 광고들 쫙 땡겨 찍고 들어가자고…….”
“잘 생각했어. 선배님 말 맞아. 미리 다녀오면 그것만큼 홀가분한 게 없지.”
“전 요새 세상에서 형이 제일 부러워요. 아! 대한민국 싫다! 이 창창한 나이에 군대라니!”
석준이 핀잔을 던졌다.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라. 몰매 맞는다. 안 그래도 연예인들 돈 많이 버는데 그깟 2년 대수냐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무튼 뭐, 선우는 군 문제에 대해 확실히 결정을 내린 듯했다.
“그래서, 포병은 아니지?”
“사나이답게 해병대 수색대 가려구요. 그래도 해병대 정도는 나와 줘야 나중에 술자리에서 할 이야기가 있지 않겠습니까?”
도윤은 더 말하지 않았다.
본인이 사서 고생한다고 고집을 피우는데 굳이 말릴 건 없어 보인다.
이참에 가서 후회도 하고 말이다.
“참, 오빠는 다음 작품 뭐 해요? 정했어요?”
이런 가운데 화제는 다시 도윤에게 돌아왔다.
“아니, 아직.”
“하긴, 그런 연기 하고 나면 힘들죠. 후유증도 장난 아니고. 저도 이번 작품 찍고 캐릭터에서 못 빠져나와서 고생 좀 했어요.”
“유준이랑 연기 좋던데?”
“어우, 유준이 걔 말은 하지도 마세요. 열정도 그런 열정이 없어요. 나중에는 PD님도 포기하긴 했는데…… 근데 오빠는 왜 유준이 말 많다고 미리 말 안 했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싫진 않은 표정인 걸 보니.
그래도, 해영의 상대 배역으로 유준이 잘해낸 모양이다.
“그냥, 재미있잖아.”
“걔랑 하루 종일 붙어 있으니까 입에 침이 마를 정도였어요.”
“그래서, 싫었어?”
도윤의 은근한 물음에 해영은 마지못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데.”
“그럼 됐지 뭐. 유준이도 잘하더라.”
“인기 대박이에요. 팬클럽도 생긴 것 같던데.”
“그래?”
아무래도.
해영과 함께 유준을 <청춘 에세이>에 추천했던 건 아주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유준은 그 특유의 비글미를 잘 살려 <청춘 에세이>에서도 보호 욕구를 자극하는 배역을 잘 소화해낸 것이다.
“근데 유준이는 결국 안 왔네?”
“제가 와도 된다고 그렇게 말했는데, 예전 멤버들 뭉치는 데 자기가 방해할 수 있냐고 하더라구요. 그러고 쌩 가버렸어요.”
도윤은 피식거렸다.
하여간 녀석답다.
“아무튼 오빠, 진짜 고마워요.”
“고맙긴, 네가 잘한 건데.”
“에이, 그래두요. 사장님도 얼마나 고마워하시는데요. 제가 번호 드렸으니까 조만간 연락하지 않으실까요?”
뭐, 마다할 이유는 없다.
“근데, 그래서 오빠는 다음 작품 언제 들어갈 건데요?”
도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몰라. 들어온 제안도 보고 있고, 드라마 할지 영화 할지도 아직 안 정했어.”
사실 정했다.
다만.
아직 타이밍이 안 왔을 뿐.
“이참에 좀 쉬어라, 도윤아. 벌써 세 작품이나 연달아 뛰었는데.”
“석준아, 내가 봤을 때 도윤이 얘는 연기 쉬면 안 돼. <알고 있는가> 찍을 때도 아주 그냥 대기 시간에도 대본만 냅다 팠던 거 생각하면…….”
그러면서 태규는 불현듯 한마디 덧붙였다.
“서태주 그 새끼가 사고를 쳐서 그렇지, 도윤이만큼만 열심히 했으면 주연 배우 연기 어색하다고 그렇게 욕은 안 먹었을걸.”
서태주 이야기가 나오자 해영이 기다렸다는 듯 보탰다.
“서태주 선…… 아니. 서태주 걔, 요새 슬금슬금 나오려고 하는 것 같던데. 석준 오빠, 알죠?”
석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영이 네가 알 정도면 뭐…… 그룹 반 해체당하고 솔로로 나오는 거 간 보다가 끝났지.”
“하여간, 정신이 나갔어. 그 난리를 치고 나온다고?”
“배우로는 망했어도, 가수로는 안 죽었다고 생각한 거지. 아무튼 조만간 계약 해지한다는 이야기도 들리던데, 이제 끝났지 뭐.”
서태주와 같은 소속사인 석준이 덤덤하게 전해준 소식.
석준의 말처럼.
서태주는 이제 끝이다.
단순히 마약만 했다면 모를까.
촬영장에서 PD에게 보인 무례함과 추태는 이미 업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
그리고 대중들은 이전보다 더욱 엄격해졌다.
서태주 사건으로 인해 소속 그룹 V.I.C의 복귀 계획이 물거품이 됐고, V.I.C의 팬덤도 서태주의 퇴출을 강력하게 요구할 정도였으니.
그런 의미에서-
도윤은 이제 더 이상 서태주라는 이름에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알고 있는가>가 끝난 시점부터.
서태주를 바로 잊어버렸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