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63화 (63/200)

63.스포방지(3)

‘이다한’은 손에 총상을 입은 채로.

‘서지아’는 ‘이다한’의 손을 관통한 총탄에 목을 다친 채로.

“이…… 새끼…….”

하지만 ‘이다한’은 다시 일어서고.

‘서지아’는 일어서지 못했다.

‘서지아’는 목에서 피를 흘리며 숨을 헐떡였다.

그 모습을 본 ‘최형식’이 ‘이다한’을 겨누며 재차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겼지만.

탕, 타앙!

두 발의 총알 중, 한 발만이 나무 뒤로 몸을 숨기는 ‘이다한’의 다리만 스치고 말았다.

‘최형식’은 결국 리볼버를 도로 집어넣은 채 달려갔다.

복부에 입은 상처가 여전히 욱신거렸으나.

해야 한다.

이 지독한 싸움에 종지부를 찍고-

끝을 봐야 한다.

“으아아아아!”

그러나 그때.

나무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이다한’이 ‘최형식’을 덮쳐버렸고.

둘은 낙엽 위를 뒹굴며 뒤엉켰다.

퍽, 퍼억!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육탄전이 펼쳐지고, 한 대 때리면 한 대 맞는, 치열하고도 처절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너만…… 너만 아니었어도!”

충혈되고, 광기에 번들거리는 ‘이다한’의 눈이 증오로 젖고.

‘최형식’은 그런 ‘이다한’을 필사적으로 막는 한편, ‘이다한’이 마지막까지도 녀석답게 행동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절벽이다.’

희미하게 보이는 절벽의 끝.

‘이다한’은 분명 웃고 있었다.

자신을 향한 증오로 점철된 눈이었지만.

녀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이다한’처럼 행동한다.

전혀 망설이지 않고.

그리고 마침내 절벽에 다다랐을 때.

“내가 죽는 게 좋을까, 최 형사 네가 죽는 게 좋을까?”

‘이다한’이 물었다.

“여기서 누가 죽든 네가 지는 거야, 최 형사.”

“너 설마…….”

“그렇잖아? 내가 당신을 죽이면, 난 다시 빠져나갈 테고. 당신이 날 죽이면…… 전국민적인 관심이 끌린 살인마를 죽인 형사가 되겠지.”

‘이다한’이 살며시 속삭였다.

“이 나라에서, 살인마 처단했다고 영웅 대접해 줄 것 같아?”

비릿한 웃음이 ‘최형식’을 엄습했다.

저 말은 틀리지 않다.

여기서 ‘이다한’을 죽인다 한들, ‘최형식’은 기껏 복직한 이 자리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깟 게 뭐 상관이라고.”

“뭐?”

“무슨 상관이냐고.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전염되기라도 한 걸까.

‘최형식’은 ‘이다한’ 못지않은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쫙 펼쳤다.

“우리 둘 다 죽으면 다 끝나.”

그리고 두 배우의 연기는 지금 이 순간.

절정에 다다랐다.

최도윤.

이승원.

극단으로 치닫는 이 상황에서 둘의 연기는…….

정말 끝장을 보자는 것 같았다.

숨이 턱턱 막히고.

여기서 이제는 끊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훈은 그럴 수 없었다.

그건 죄악이다.

지금 저 감정을 “컷”이라는 짧고 간단한 한마디로 끊어내기엔…….

재훈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멈추지 말고 계속 가.”

그리고 재훈의 묵인 속에서.

극도의 긴장감이 유지된 채 촬영은 그대로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마침내.

“어때?”

“너…… 이 미친 새끼.”

“아무렴. 너보다 미쳤을까. 근데 그거 알아? 미친놈을 상대하다 보면…… 나도 미친놈이 되더라고.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는데, 그게 그렇게 되더라.”

히죽.

‘최형식’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짓지 않았던 그 소름 끼치는 미소와 함께 ‘이다한’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이거, 이제 좀 끝내자.”

“어디 네 마음대로 될 것…….”

‘이다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최형식’의 몸이 날았고.

퍼억!

그 순간, 둘의 몸이 뒤엉켜.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 침묵.

연극 무대에서 암전(暗轉) 동안 찾아오는 그 적막처럼.

모두가 입을 다문 채.

서서히, 재훈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세상에.’

재훈은 경악한 상태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긴 호흡의 씬을 단 한 번의 막힘 없이 소화해낸 배우들의 열연에.

아니.

그건 차라리 광기(狂氣)라고 하는 게 어울릴지도 모른다.

최도윤이라는 배우에게서 시작된.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광기.

승원과 유나.

두 배우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그 남자의 메모리>는.

도윤으로 시작해서.

도윤으로 끝을 맺은 작품이 될 것이다.

“PD님.”

그리고 멍하니 있던 재훈을 깨운 건 조연출이었다.

“컷! 커어어엇! 좋습니다! 오케이!”

벅찬 오케이 사인이 터져 나오고.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짝, 짝, 짝…….

박수 소리가 촬영장에 서서히 번지기 시작했다.

* * *

“후우.”

오랜만에 느껴보는 탈진이다.

촬영이 끝난 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감정이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고생했어요, 형.”

옆에서는 성호가 끊임없이 고생했다는 말을 해주고.

“오빠, 인생 연기될 것 같은데요.”

늘 심드렁한 민주조차 오늘만큼은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말해주고 있었다.

그만큼.

대단한 연기였다.

박수 소리가 한동안 촬영장을 떠나지 않았을 만큼.

오늘 도윤은 인생 최고의 연기라 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인생만 따지면 말이다.

‘인생 연기?’

그럴 리가.

아직 해야 할 배역들이 산더미처럼 많고.

펼칠 연기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냥 이건 하나의 연기를 끝낸 것이다.

이것으로-

자신의 배우 인생의 끝을 봤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아직 멀었지.’

할 장르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또한 할 배역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미지?

그보다 더 멋지게 연기해서 바꾸면 그만.

물론.

지금은 이런 생각을 이어가기보다는 쉴 때.

도윤은 힐끗, 승원과 유나 쪽을 바라봤다.

도윤처럼 어지간해서는 차에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지내는 승원도 오늘만큼은 차에서 쉬고 있었고.

유나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 속에서 매니저가 건네주는 물만 연신 들이켰다.

그래.

저런 걸 두고 배우들의 연기 후유증이라 부르겠지.

이번 촬영은 거의 끝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남은 건 간단한 몇 개의 씬밖에 없었기에 마치 마지막 촬영을 끝낸 기분이라 더더욱 그럴 것이다.

거기에.

결말도 충격적이다.

‘최형식’이 끝내 ‘이다한’과 죽었고.

‘서지아’ 홀로 살아남았으니까.

승자가 없는 전쟁.

그러나.

강미나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다한’과 ‘최형식’이란 캐릭터를 통해 분명히 전달되리라.

‘왜 그러셨는지 알겠는데.’

도윤은 문득 광섭의 조언을 떠올렸다.

연기에 매몰되지 마라.

도윤은 연기에 매몰되지 않았지만.

연기에 매몰되면 어떻게 될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나저나.

키스씬이라니.

정말 생각지도 못했지만.

더없이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결국 이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발버둥 치쳤던 ‘서지아’가 택한 최선의 방법.

“잠깐만.”

그러고 보니.

회귀 전과 후를 통틀어 첫 키스씬인가?

도윤은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튼 뭐.

이제 끝났다.

연기 인생 최초의 도전이었던 1인 2역의 주인공 ‘이다한’으로서의 삶이.

이 배역을 위해 준비한 수많은 것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도윤은 당분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편안하게 즐길 때니까.

‘한동안은 좀 쉴까 싶기도 하고.’

영주에 내려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거나.

그간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좋겠지.

그렇게 상념에 잠겨 있던 그때.

“최 후배, 아니 최 배우.”

“PD님.”

재훈이 다가왔다.

“이제 촬영 끝난 거나 다름없는데, 기분 좀 어때?”

“홀가분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요.”

솔직한 마음이었다.

“고마워.”

재훈은 도윤의 어깨를 잡았다.

“진심으로. 강 작가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최 배우 아니었으면, 이거 이렇게까지 못했을 거야.”

“PD님.”

“오글거려도 좀 참아. 하, 내가 원래 배우한테 이런 말 못 하는 성격인데…… 오늘은 해야겠다. 그러기로 마음먹었거든. 오늘 연기 보고.”

도윤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미소만 띠었다.

재훈의 진심이 전해진다.

PD로서.

작품을 완성시켜 준 배우에게 전하고 싶은 고마움이.

그런 한편으로.

“그리고 미안해.”

“네?”

“솔직히, 이렇게 잘 해낼 줄 몰랐거든.”

연기를 잘 해낸 것과.

미안한 것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존재할까.

의문은 곧 풀렸다.

“걱정이야. 최 배우, 이제 다른 연기 못할까 봐. 너무 잘해서.”

“아.”

도윤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난 또 뭐라고.’

그거야.

걱정하지 않는다.

물론 어떤 배역 때문에 그 이미지가 고정되어 평생 다른 배역을 해보지 못하는 배우들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도윤은 이미 그런 것까지 모두 생각하고 이 배역을 맡았으며-

이미 다음 장르를 정해둔 상태였다.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괜찮습니다. 이런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배우 인생에 큰 영광이었습니다.”

“……고마워. 정말로.”

재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윤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그리고 뒤쪽을 돌아보며 피식거렸다.

“봐라? 와서 어떻게 하는지?”

“네?”

슬쩍 뒤를 보니 미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잔뜩 상기된 얼굴로.

그러고는 도윤 앞에 서더니.

“……나 이제 최 배우 때문에 미니시리즈 더 못 쓸 것 같아. 책임져.”

그만 도윤을 멍하게 만들어 버렸다.

“에이 씨…… 이렇게 재미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쓸걸. 아, 절대 비하 아니다? 그냥…… 천직 찾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미래가 확실하게 바뀌는 셈인가.

‘그럼 내가 아는 작품이 몇 개가 사라지는 거야?’

도윤은 회귀 전 보았던 강미나 작가의 작품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그 작품들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아쉽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된다.

이렇게 마음을 바꾼 강미나 작가가 어떤 작품을 써낼지.

그리고 어쩌면.

그 작품 중 하나에…… 또 한 번 도윤이 주연으로 들어갈지도 모르는 일.

“그러니까 다음에도 꼭 같이하는 거다? 오케이?”

“강 작가. 이제 어디 그게 쉽게 되겠어?”

그때 재훈이 미나의 말에 슬쩍 어깃장을 놓았다.

“이제 최 배우 캐스팅하려면 줄 서야 할걸?”

* * *

촬영을 마친 뒤.

주연 배우 셋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술자리를 만들었다.

누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도 자연스레 만들어진 자리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셋은 휴대폰을 각자 매니저들에게 맡겨버리곤.

처음 1시간 동안은 아무런 말도 없이 술잔을 끊임없이 비웠으며.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야 유나가 처음으로 운을 뗐다.

“너 키스씬 처음이지?”

“네?”

“그런 것 같았어. 자식, 소심하더라?”

도윤이 어처구니가 없어 웃더니.

“거기서 그럼 적극적으로 했어야 하나요?”

지지 않고 받아쳐 버렸다.

그러자 유나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뺨에는 홍조가 솟았다.

생각지도 못한 반격이다.

“저, 적극적?”

“그 상황에서 그러는 것도 웃기잖아요. 대본이 그런데.”

“……그, 그거야 그렇긴 한데! 아무튼 너 키스씬 처음 맞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요.”

이제는 능글맞게 웃기까지 하는 도윤의 모습에 유나는 부들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에이, 됐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뭔가 아쉽다는 듯, 투덜대는 유나.

그 모습을 보더니 승원 역시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잘하던데, 두 사람.”

순간 째려보는 두 개의 시선이 승원에게 향했다.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

승원은 승원답지 않게 깨갱하며 쪼그라드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난 연기 말한 건데…….”

그리고 다시 불이 붙었다.

“도윤아, 누나가 알려줄게. 그런 키스씬에서는 원래 마음을 가다듬고…….”

“로맨스 드라마도 아니고.”

“얘 봐라? 그래, 너는 양반이라 이거지. 하긴, 키스씬 찍을 때 양치가 뭐야, 담배 피우면서 커피 마시다 스탠바이하러 온 인간도 있었는데.”

유나는 투덜거렸지만.

도윤과의 키스씬이 썩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다.

‘상황만 맞으면 더 좋았을걸.’

‘기억을 잃은 이다한’과 그렇게 플래그를 세우더니 하필 엔딩씬에서 키스라니.

뭐, 납득되는 키스씬이었지만.

아쉽다.

도윤이라서 더더욱 아쉽…….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유나는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는 그때의 상황에 얼른 고개를 젓고 술잔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

탕!

“한 병 더 주세요!”

술집이 떠나가라 외쳤다.

그리고 도윤과 승원은 그때만큼은 둘도 없는 사이가 되어 한마음으로 멍하니 유나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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