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62화 (62/200)

62.스포방지(2)

<그 남자의 메모리>는 이제 촬영 끝자락에 다다랐다.

촬영장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피곤에 찌든 얼굴이다.

특히.

재훈과 미나가 그랬다.

“강 작가. 다음부터는 스릴러 맡지 말까봐. 아주 죽겠어.”

“할 때는 죽겠는데, 원래 또 끝나면 하고 싶죠. 드라마는 게 그런 거 아니겠어요?”

미나는 요새 신이 났다.

작품에 대한 스트레스보다 자신의 작품이 이렇게 잘 된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쁨이 더 큰 모양이다.

재훈은 직접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니기에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미나가 얼마나 기뻐하는지는 알 수 있었다.

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촬영장에서 유일하게 생기가 넘치는 사람이 미나니까.

“앞으로도 아주 승승장구하겠어.”

“그럼요. 다음 작품도 잘하고, 그다음 작품도 잘해야죠. 가급적이면 최 배우랑.”

재훈은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미나의 도윤에 대한 집착 때문이 아니라.

요즘 들려오는 어떤 사람의 소문 탓이다.

‘유 작가가 신작 준비한다던데…….’

유정연.

미나에게 뺨을 맞은 장본인이자.

이 바닥에서도 유명한 라이벌.

<악마의 세계>의 실패로 최근 잠잠하다 했는데, 다시 신작을 준비한다는 소문이 들려온 것.

문제는…….

유정연 작가가 그 신작의 주인공으로-

도윤을 점찍었다는 소문도 들려온다는 사실이다.

‘뭐, 안 말하는 게 좋겠지.’

굳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을 언급해서 기분 나쁘게 만들 일 있나.

재훈은 자신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나의 눈치만큼은 꼭 살핀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왜 그래요?”

“아냐. 잘해봐.”

이런 한편.

배우들도 피곤한 건 마찬가지다.

촬영이 힘든 탓도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시달린 게 더 컸다.

“……죽을 것 같아. 종탁 오빠, 주변에서 막 안 물어봐요? 미치겠어요.”

“안 그래도 죽겠다. 아니, 뭔 놈의 집착들이 그렇게 강하냐? 어제는 기자 세 명이 전화했어.”

“자기가 대기업 상무라고 말하면서 알려달라고 하던 인간도 있던데요.”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스포일러 방지 전쟁.

현재 <그 남자의 메모리>는 12화 기준 시청률 16%를 돌파한 상태.

케이블 최고 기록.

지상파로 따지면, 30%를 넘기는 수준이라고 해야 할까?

말 그대로 역대급 인기를 구가하는 드라마다.

장르도 스릴러고, 강미나 작가의 탁월한 대본 구성 덕분에 시청자들은 매 편 매 편이 끝날 때마다 다음 편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승원 선…… 아니, 승원 오빠는요?”

“……난 집 밖으로 안 나가. 폰도 끄고.”

“아, 그런 방법이.”

심지어 10화 이후부터는 아예 예고편도 안 내보내고 있었다.

편집을 못 해서가 아니라, 그냥 시청자들을 안달 나게 만들기 위해 작정한 것이다.

그래서.

배우들은 지금 이렇듯, 주변 사람들에게 쉼 없이 시달리고 있었다.

“도윤이 너는?”

도윤도 마찬가지.

“저도 뭐.”

이솔의 전화는 사실 애교다.

아주 사방에서 결말을 물어대는 통에 요새는 아예 귀를 닫고 지냈다.

그리고 가급적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는 술도 자제하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스포일러라도 하는 날엔, 기껏 회귀한 보람이 없어지는 셈.

‘오래오래 연기하자, 도윤아.’

도윤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한편.

“근데 나는 사실 ‘이다한’보다 ‘서지아’가 더 궁금한데.”

“누나가 연기하는 배역이니까요.”

“그치. 근데…… 혹시 ‘서지아’가 ‘이다한’을 놔줄까? 도망칠 수 있게?”

도윤은 그 말에 잠시 고민했다.

현재 촬영분까지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현시점에서 ‘이다한’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서지아’의 공개석상 폭로로 지명수배자가 되어 쫓기는 상태.

그리고 ‘서지아’는 ‘이다한’이 사이코패스가 될 수밖에 없었던 계기와 사연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다.

“모르죠. 근데 제가 ‘서지아’라면 놔주진 않을 것 같아요.”

“‘서지아’가 만약 ‘이다한’을 좋아한다면?”

“네?”

도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지아’가 ‘이다한’을 좋아하긴 한다.

아니, 했었다.

‘톱스타 시절의 이다한’을.

하지만, ‘사이코패스 이다한’의 인격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는 그러지 않았다.

“이게 신파극도 아니고.”

“그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상하게 아쉬워 보이는 얼굴.

유나가 한숨을 쉬었다.

‘결국 키스씬은 없겠지?’

종종 배우들이 그러듯.

유나는 키스씬을 기대했다.

정확히는, 도윤과의 키스씬을.

하지만 스토리상, 그리고 장르상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에이 씨, 내가 미쳤지.’

유나는 ‘서지아’가 ‘이다한’을 좋아했다는 설정을 알게 된 뒤로…….

이상하게 도드라져 보이는 도윤의 입술.

유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어유, 잘한다. 잘해.’

그리고 도윤은.

“누나, 어디 아파요?”

“아니. 안 아파.”

“아픈 것 같은데.”

당연히 그런 유나의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아무튼, 서지아는 그렇다 치자. 도윤이 네가 보기에 ‘이다한’은 어떻게 될 것 같아? ‘이다한’의 심경으로 생각해 보면?”

“글쎄요.”

도윤은 말을 아꼈다.

예측하는 것도 좋지만.

굳이 추측하고 싶진 않았다.

그저, 대본이 나오면 온전히 곱씹은 뒤 그대로 움직이고 싶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아이고, 우리 강 작가님 때문에 궁금해 미쳐 돌아가시겠네.”

도윤은 앓는 소리를 흘리는 유나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 * *

수능 시즌 때마다 꼭 나오는 뉴스가 있다.

바로 시험지 수송 관련 뉴스다.

시험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절대 분실되어도, 노출되어도 안 되는 중요한 물건이기에 철통같은 보안과 경호 속에서 이송되는 물건.

<그 남자의 메모리> 마지막 화 대본도 그랬다.

배우들이 감정을 끌어올릴 틈을 주고, 마지막까지 완벽한 퀄리티로 찍어야 한다며 쪽대본만큼은 안 된다고 결사반대한 미나.

그래서 <그 남자의 메모리> 16화 대본은 책대본으로 한데 엮여 무려 현금수송 차량에 실려 촬영장까지 배달되었다.

“나 대본 이렇게 수송하는 거 처음 보는데.”

“미쳤다. 이걸 현금 수송 차량에 담아 온다고……?”

“저거 지금 팔면 수백에도 사갈 사람 분명 있을 거야. 내가 말했지? 대기업 상무라는 양반이 전화 왔다고. 결말 말해주면 자기가 오백을 주겠대요.”

“와…….”

재훈의 진두지휘 속 현금수송 차량에서 상자에 겹겹이 포장된 대본이 내려지는 걸 보니-

마음이 절로 경건해진다.

“손권이 지키는 성이 저랬을까요.”

이번만큼은 민주의 말에 도윤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도윤은 손권의 이름만 알지 어떤 사람인지는 여전히 잘 모른다.

여하튼.

철통 보안은 철통 보안이다.

박스를 아직 뜯지 않은 지금, 저 대본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저기 있는 재훈과…….

배우들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피곤해 보이는 작가 미나뿐이었으니까.

“종방하면…… 술 마실 거야…… 술…….”

좀비처럼 중얼거린 미나는 박스로 다가가더니 커터칼로 사정없이 박스를 난도질했고.

마침내 마지막 화 대본의 웅장한 자태가 드러났다.

“와, 드디어…….”

“도윤아, 나 이거 보면 눈물 날 것 같아.”

주연 배우들이 먼저 대본을 배부받았고.

그다음은 조연들이었다.

그리고 도윤은 일단 차에서 성호부터 내쫓은 뒤 경건한 마음으로 대본을 바라봤다.

그리고 조심스레-

대본을 펼쳤다.

“하…….”

대본의 내용을 확인한 도윤은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묘한 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유나와 다시 만난 자리에서.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복잡한 표정 속에서 침묵에 빠졌다.

그러다 잠시 후.

“이거 괜찮겠지?”

유나의 걱정스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납득 가는 결말인 것 같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황당하단 유나의 표정을 바라보며.

도윤은 쓰게 웃었다.

다만.

지금만큼은 도윤이 아니라.

자신의 최후를 미리 알게 된, ‘이다한’의 심정으로 쓰게 웃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배역, ‘최형식’의 결말을 알게 된 승원 역시 비슷한 표정을 한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배우에게 가장 시원섭섭한 순간을 고르라면 역시 마지막 촬영일 것이다.

끝났다는 해방감.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맡은 배역을 떠나보내는 슬픔.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섭섭하기는커녕.

‘막방 나갔을 때 어떻게 되려나.’

궁금해진다.

도대체 시청자들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도윤은 대본을 받은 뒤 그 자리에서 한번 완독했고, 이후로도 수십 번을 반복해서 읽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충격적인 결말이다.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아직 감이 안 잡힐 만큼.

그래서 그 충격적인 결말의 당사자인 세 주연 배우는 아침부터 극도의 긴장 상태였다.

그나마 도윤만이 제정신을 붙잡은 채 대사를 곱씹으며, 나머지 두 배우와 리허설까지 마쳤다.

“……이거 장난 아닌데.”

“그러게요.”

“누나, 선배님. 마지막까지 잘해보죠.”

여하튼.

결말은 나왔고.

이제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다.

“자, 스탠바이 들어갑니다! 다들 준비해 주세요! 이제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 사람은 카메라 앞에 선다.

장소는 산자락의 폐가.

도피 끝에 ‘이다한’이 숨어들고.

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장소.

여기서 ‘서지아’는 ‘최형식’보다 먼저 ‘이다한’을 찾아오고.

‘최형식’은 뒤늦게 폐가를 찾아온다.

그리고 그 씬 촬영은 감정의 유지를 위해서라도 중단 없이 쭉 이어진다.

원래는 잘게 잘라 촬영할 예정이었지만.

여기 있는 세 명의 주연 배우가 그걸 거부했다.

그래서 재훈과 미나 및 이하 스태프들도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

‘미치겠네. 배우들보다 내가 떨리면 어쩌자는 거야?’

재훈은 손에서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다.

마침내 무전기를 들었다.

그리고.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레디…… 액션!”

촬영의 시작을 알렸다.

극도의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저벅, 저벅.

‘서지아’가 천천히 폐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딸깍.

손전등의 희끄무레한 불빛이 음산한 폐가를 비추고.

“이, 이다한 씨……?”

‘서지아’의 떨리는 음성이 폐가를 부유하다.

쾅!

“아악!”

갑자기 튀어나온 무언가가 서지아를 벽으로 강하게 몰아붙였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떨림 가득한 음성.

“당신…… 또 당신이야. 왜! 왜! 또 너냐고!”

이제는 ‘서지아’를 마주할 때마다 자아의 갈등을 일으키는 수준을 넘어선 ‘이다한’.

‘서지아’는.

‘기억을 잃은 시절의 이다한’이 유일하게 강력히 작용하는 대상이다.

그래서 ‘사이코패스 이다한’은 그때 ‘서지아’를 공격한 이후로 ‘서지아’를 볼 때마다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없음에 분노했고.

지금도.

철컥.

잭나이프를 뽑아 들기만 했을 뿐, ‘서지아’를 차마 찌르지 못한 채 손을 떨고 있었다.

‘서지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당신…… 당신의 마음 속에는 아직 ‘이다한’이 남아 있어요. 내가 아는 ‘이다한’이……. 그러니까 제발…… 여기서 멈추고…… 나와 같이 가요…….”

“닥쳐. 닥쳐어어어어어!”

광기와.

분노와.

슬픔이 한데 뒤섞이는 외침.

복합적인 감정이 저렇게나 명확히 드러난다는 게.

과연 연기로 가능한 영역일까?

이제는 모두가 숨을 멈추었다.

‘최도윤’인지.

아니면 ‘이다한이 된 최도윤’인지.

그도 아니면, ‘이다한이자 최도윤’인지 모를 배우의 연기에-

무거운 공기가 주변을 잠식하고.

마침내.

“읍!”

이 씬의 하이라이트가 펼쳐진다.

눈물을 흘리는 ‘서지아’가 ‘이다한’에게 키스를 하는 것이다.

‘사이코패스 이다한’의 자아를 억누르고.

‘기억을 잃었던 이다한’의 자아를 꺼내기 위해서.

그래야.

모두가 산다.

‘서지아’는 ‘이다한’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고, 이렇게 행동한 것.

하지만.

“서 기자!”

그 광경을 ‘최형식’이 목격하면서.

철컥.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눈다.

‘최형식’은 결심했다.

명예를 회복하고 복직하여 다시 받은 이 총을, ‘이다한’을 끝장내는 데 쓰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이다한’을 자수시키기 위해 그와 키스하는 ‘서지아’와.

그런 둘을 바라보는 ‘최형식’을 서서히 아웃포커싱시키며.

마침내.

타앙!

총소리가 울려 퍼지고.

핏물이 튄다.

“안 돼!”

‘서지아’의 비명과.

부르르, 몸을 떨다 ‘서지아’를 밀어내고 천천히, 총을 쏜 쪽을 바라보는 ‘이다한’.

‘서지아’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이다한’은…….

“그래…… 네가 왜 안 오나 했지.”

끝내 ‘사이코패스’의 자아로 되돌아오고야 말았다.

히죽.

그리고 그의 입가에는 오늘 ‘서지아’가 끝까지 보지 않길 바랐던 소름 끼치는 미소가 걸렸고.

“오늘 드디어 끝을 보겠네. 그렇지?”

철컥.

더 이상 다른 자아로 방해받지 않게 된 ‘이다한’은 주저 없이 ‘서지아’를 붙잡고 잭나이프를 목에 겨눴다.

“이다한, 칼 버려!”

“최 형사. 알잖아. 이제 다 끝난 거.”

“지금 여기서 그 칼 안 버리면, 넌 괴물인 채로 죽는 거야!”

‘최형식’의 외침에도.

‘이다한’의 표정에 서린 광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서지아’는.

“이, 이다한 씨…… 제발…… 이러면 안 돼요.”

“이제 와서 목숨이 아까워?”

“내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당신이 불쌍해서 그래요…….”

불쌍하다.

호소하듯 말하는 ‘서지아’의 그 모습에.

‘이다한’은 불현듯 멍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래. 그놈의 동정 때문이었군. ‘그놈’이 널 죽이려는 걸 번번이 막은 이유 말이야.”

“이다한 씨…….”

“근데 이젠 아니야.”

꾸욱.

잭나이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칼날이 ‘서지아’의 목에 다가가는 그 순간.

시간이.

느릿하게 흘러간다.

슬로우 모션.

짧은 순간, ‘최형식’을 바라보며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서지아’와.

흔들리는 눈빛으로 ‘서지아’를 바라보다 결국 결심을 마친 ‘최형식’.

그리고.

타앙!

총성 소리와 함께.

“끄으으윽.”

“아악!”

‘이다한’과 ‘서지아’가 동시에 나동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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