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흥행, 또 흥행
술자리의 좋은 기억을 뒤로하고.
도윤은 다시 ‘이다한’으로 돌아왔다.
<그 남자의 메모리> 10화가 촬영 중인 현재.
도윤은 오늘도 촬영장에 1시간 일찍 나와 대본을 살피고, 의상팀과 논의를 마치고 돌아온 민주와 코디에 대해 의논한다.
“오빠, 이거요.”
“뭔데?”
“오늘 액션씬 있잖아요. 혹시 다칠 수 있으니까 대보세요.”
그러면서 도윤의 무릎과 팔꿈치에 밴드를 대주는 민주.
덤덤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지만, 그래서 더 믿음직스럽다.
“고맙다.”
그리고 믿음직스럽…… 아니, 이젠 좀 믿음직해지나 싶은 녀석도 있다.
“형. 커피요.”
“아, 고맙다.”
그리고 성호가 사 온 커피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성호가 직접 이름을 붙인 도라떼 2호.
먹을 만하다.
아니, 요새는 이것만 마시고 있다.
달지도 않고, 유청 없는 우유와 디카페인 덕에 부담도 없다.
“이제 잘 드시네요.”
“……이것만 사 와서 그런 거잖아.”
“와. 반 넘게 마셔놓고 아닌 척하시긴.”
커피는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도윤은 애써 모른 척했지만.
“제가 안 그래도 밑밥 깔고 있어요. 커피 주문할 때마다 2호 레시피라고 하면서요. 나중에 혹시 도라떼 2호 광고 찍으시면, 제 덕인 거 아시죠?”
성호는 이미 착실하게 작업을 진행 중인 것 같았다.
‘이번 거는 먹을 만하니까 뭐…….’
도윤은 애써 부정하려다 결국 포기했고.
“아, 형. 시간 됐어요.”
성호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무술감독을 찾아갔다.
오늘 찍을 씬은 ‘이다한’과 ‘최형식’이 서로 추격전을 벌이는 액션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무술감독에게 계속해서 액션 지도를 받던 차였다.
물론 강미나 작가가 액션씬을 그리 많이 넣은 게 아니라 액션스쿨에서 본격적으로 배운 건 아니지만.
“아, 최 배우님. 오늘은 좀 빡셀 겁니다.”
무술감독, ‘김한성’은 그런 짤막한 액션씬에도 최선을 다해 지도하는 사람.
그래서 가끔은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지만…….
도윤은 마냥 즐거웠다.
“역시, 오늘도 좋네요. 합 다시 맞춰봅시다.”
“네, 감독님.”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참 열심히 해요. 액션씬은 거의 처음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습니다.”
“처음인데 이렇게 몸 안 사리는 사람은 또 오랜만이야.”
한성이 흐뭇하게 웃었다.
잘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의미.
사실,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배우의 태도다.
“그래, 이런 패기가 있어야지. 요새는 대역이다 뭐다 하면서 간단한 액션까지 그냥저냥 가려는데, 너무 몸 사리는 것도 보기 안 좋단 말이지.”
사실 <그 남자의 메모리>에 나오는 액션들은 한성이 보기엔 굳이 대역을 쓸 필요도 없는 수준.
하지만 요새 몇몇 배우들은 그런 간단한 액션조차 다칠 수도 있다며 대역을 꼭 고집하는 경우가 있는 것.
그런 의미에서 뭐든지 일단 해보려고 드는 도윤은 한성의 마음에 쏙 드는 배우였다.
“자자, 여기서는 몸에 힘을 빼는 겁니다. 잘못하면 다쳐요. 오케이. 그렇게. 달려가다 양팔로 얼굴을 보호하면서, 허리를 둥글게 말고…… 그렇지. 낙법 좋네.”
덕분에 칭찬이 줄을 이었다.
물론 몸을 별로 써본 적이 없었기에 도윤의 액션이 아주 대단한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나.
이런 열정적인 태도는 한성을 만족시키기 충분했다.
다만.
스탠바이 전.
합을 맞춰보는 과정에서도 도윤이 몸을 안 사리자 한성은 안절부절못했다.
“근데 살살 좀 해요. 최도윤 배우 다치면 저 PD님한테 죽습니다. 유 PD가 신신당부했단 말이야.”
그러다 오늘 예정된 씬의 리허설 시간이 다가왔고.
“오케이! 좋습니다!”
도윤은 승원과 함께 완벽하게 액션씬을 선보였다.
“자, 그럼 이제 본촬영 스탠바이하겠습니다! 최도윤 배우님, 이승원 배우님. 의상 준비해 주세요!”
아무튼 이제 다시 ‘이다한’이 되러 갈 시간.
“무리하지 마라.”
“선배님도요.”
도윤은 승원의 말에 속으로 씩 웃었다.
‘녹음실 같이 다녀온 뒤로 그랬었나?’
그때 녹음 마치고 술 한잔하면서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술 한잔하면서 가까워진 게 아니라.
녹음하는 도윤의 모습 때문에 승원이 경계심을 풀었다고 하는 게 정확하지만.
여하튼.
도윤만 모르는 그 이유 덕분에 배우들은 서로 더욱 가까워져 있었고.
카메라 앞에서의 케미 역시 촬영 초반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끈끈해져 있었다.
케미가 좋아졌다는 건, 연기의 합이 더 잘 맞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셈.
“자,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레디…… 액션!”
스탠바이때부터 감정을 끌어올린 도윤과 승원은.
감독의 사인에 곧바로 ‘이다한’과 ‘최형식’의 표정이 되어 격렬한 대사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야, 이다한. 내가 지금 옷 벗었어도 너 같은 새끼는 꼭 잡을 거거든. 조금만 기다려. 증거만 찾으면…….”
“증거 좋지. 증거. 그래서 증거가 어디 있는데? 이제 옷도 벗으셔서 총도 없고, 믿을 건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분이. 아, 하나 더 있네. 허세.”
“그거 알아? 내가 형사 시절에도 이 몸뚱이 하나랑 니가 말한 그 허세로 범인만 수십을 잡아 처넣었어. 너도 똑같이 그렇게 될 거고.”
빈 창고.
드럼통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이다한’과 ‘최형식’.
10화가 진행되는 동안 ‘이다한’과 치고받다 ‘이다한’의 함정에 빠져 ‘비리 형사’가 되고 옷을 벗은 ‘최형식’.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형사’가 아닌 ‘최형식’을 향해 ‘이다한’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보통 그렇더라고. 너 같은 놈들은 금방 죽어. 그러니까 왜 쫓았어. 응? 그렇잖아. 나 안 쫓았으면 지금쯤 옷 벗을 일도 없을 거고, 마누라랑 자식새끼 저기 어디 지방으로 가서 살 일도 없었을 텐데. 인생이 아쉽지 않아? 응?”
‘이다한’은 양팔을 넓게 펼치더니 히죽거렸다.
“이제 당신 말은 아무도 안 믿어요, 형사님.”
“아니, 내가 믿게 만들 거다.”
“어떻게? 비리로 옷 벗은 당신 같은 아저씨랑, 좋은 집에 좋은 차 타고 다니는 나를?”
주르륵.
그때 울컥, ‘최형식’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
아까 ‘이다한’의 기습으로 배에 칼을 맞은 뒤 서서히 의식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최형식’은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지만.
금이 간 창문이 보인다.
‘저기다.’
여기선 살아야 한다.
그래야 다시 ‘이다한’의 살인행각을 밝혀낼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최형식’은 비틀거리는 척, 신음을 흘리다가.
퍼억!
순식간에 땅을 박차고 ‘이다한’을 밀친 뒤 깨진 창문이 있는 2층을 향해 사다리에 매달렸다.
“이 새끼가…….”
그 뒤를 쫓는 ‘이다한’은 이를 갈았다.
여기서 놓치면 그때는 아무리 자신이라도 마냥 자신만만하게 나설 수 없다.
하지만.
“거기 서!”
전직 형사답게 ‘최형식’은 독종처럼 사다리를 타고, ‘이다한’의 손끝은 그의 발을 스칠 듯 말 듯하다.
“이런 개 같은 새끼가!”
와장창!
기어이 창문을 깨뜨리고 밖으로 몸을 던지는 ‘최형식’.
하지만.
“도망갈 수 있을 것 같아?”
‘이다한’ 역시 남은 유리를 깨고 뛰어내리며 바닥을 구른 뒤, 곧바로 산속에서 둘의 추격전이 벌어지는 그 순간.
“오케이, 좋습니다!”
1차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앞서가던 승원이 털썩, 주저앉으며 숨을 헐떡이고.
도윤은 나무에 기댄 채 숨을 골랐다.
재훈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좋아졌는데.’
흔히들 액션씬에서는 합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다.
몸을 날리고, 무기를 휘두르고, 무언가를 피해야 하는 액션씬에서는 합이 맞지 않으면 자칫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저 둘이 딱 그랬다.
촬영 내내 서서히 좋아지더니 이제는 굳이 맞춰볼 것도 없이 딱딱 합이 맞아떨어진다.
특히, 도윤은 액션씬 경험이 한 번도 없다고 했음에도 재훈이 흡족해할 만큼 잘 해내고 있었다.
물론 액션에 익숙한 배우들처럼 몸이 날쌔거나 유연한 건 아니지만 처음 하는 것치고는 준수한 수준.
이제 곧 2차 추격 씬 촬영이 시작된다.
재훈은 도윤과 승원의 눈빛을 바라봤다.
카메라가 잠시 꺼졌음에도, 절대 질 수 없다는 듯 눈빛을 불태운다.
참.
건전한 라이벌 의식이다.
‘저런 배우들이 또 어디 있을까.’
둘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배우들보다 프로다웠다.
배역상 극한으로 대립하니 카메라만 돌면 불을 켜고 서로를 몰아붙이다…….
카메라가 꺼지면 흔한 선후배 배우 관계로 돌아간다.
왜, 그런 거 있지 않은가.
배우들끼리 꼴사납게 신경전을 벌이는 거.
리딩 첫날 앉는 위치부터.
심지어 스태프들이 간식을 나눠주는 순서로 기 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하지만 저 둘은 그런 게 없다.
마치…….
서로의 가치를 더욱 높여주는 느낌?
그래서일까.
보고만 있어도 흐뭇한 표정을 절로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두 배우가 내뿜는 열기 덕에, 촬영장이 후끈해지는 것 같다.
그래.
스릴러라는 장르 특성에도 케이블 시청률 10%를 넘기려 하는 지금 이 성과에는, 저 둘의 저런 노력이 포함되어 있으리라.
특히나.
도윤의 사이코패스 악역 연기는 이미 한계를 넘어선 수준.
‘기억을 잃은 톱스타 이다한’.
‘사이코패스 살인마 이다한’.
현시점에서는 둘의 인격이 서서히 합치되고 있었고.
기억을 하나둘 찾아갈 때마다 인격 간의 싸움이 점점 더 격렬해진다.
그리고 도윤은 이제 도윤이 아니면 상상하기 힘들 만큼 완벽 그 이상의 ‘이다한’을 연기하고 있다.
특히.
얼마 전 방영된 6화에서 화제가 된, 내면에서 벌이는 두 인격의 싸움을 연기한 건 정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지.’
물론.
2차 추격씬에 투입될 ‘서지아 기자’ 역의 유나와 오늘 도윤의 연기에 맞춰 ‘최형식’을 연기한 승원 역시 마찬가지.
“한 배우! 너무 무리하지 말고 살살하라고!”
“걱정 마세요, PD님!”
힘차게 답하는 유나의 모습에 껄껄 웃는 재훈.
여하튼.
스토리는 점점 고조되고.
대본상 후반부에 다다른 이 촬영.
기대된다.
이 촬영분을 확인한 시청자들은 과연 또 어떤 충격에 빠질까.
“자, 다시 봅시다. 걸려 넘어지는 지점이 여기니까, 네. 여기 낙엽 아래 스펀지 깔아주세요. 그리고 최 배우! 넘어지면서 잡을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목 졸리면 안 되니까요.”
“네, 확인했습니다.”
그사이 2차 촬영 리허설이 이어지고.
스탠바이를 마친 배우 3인방이 감정을 끌어 올리며 카메라 앞에 선다.
‘이다한’이 추격하고.
‘최형식’이 쫓기며.
‘서지아’가 중간에 끼어든다.
‘과연.’
기대되는 씬이다.
잘만 찍으면 역대급 장면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구성.
그리고 시작된 촬영에서.
‘이다한’은 추격 도중 문득 ‘서지아’의 환영을 보고 괴로워한다.
“제발…… 꺼져 있어!”
‘서지아’는.
기억을 잃었던 시절의 ‘이다한’이 유일하게 사랑이란 감정을 품게 만든 사람.
지금의 ‘사이코패스 이다한’의 인격은, 이런 감정을 견디지 못한다.
하지만 중간중간 터져 나오는 그 인격에.
‘이다한’의 얼굴은 사이코패스의 소름 끼치는 표정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는 아련한 표정을 오가고 있다.
‘대단해, 할 말이 안 나오는군.’
실로 놀라운 연기력이다.
하나의 표정만 저렇게 실감 나게 연기하기도 힘든데.
두 개의 표정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오가며 괴로워하는 연기라니.
특히.
저 그리움 가득한 아련한 눈빛을 담은 표정을 보고 있던 강미나는.
‘와 진짜…… 말이 돼?’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도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훈도 마찬가지.
문득 얼마 전 사적으로 만나 술잔을 기울였던 후배 한 명을 떠올렸다.
녀석은 신인 드라마 작가였다.
얼마 전 제출한 대본이 드디어 제작사의 선택을 받아 제작이 결정된 것이다.
‘어찌나 신나서 떠들던지.’
술이 들어가더니 잔뜩 흥분해서는 시나리오를 줄줄 읊어주더니, 몇 달 안에 캐스팅 작업에 착수한다는 말을 했었다.
장르는 로맨스.
<5월 이야기>, <지금 만나러 갈까요>, <내일의 연애>, <비포 문라이즈>처럼 서정적이고도 감각적인 로맨스 장르를 꿈꾼다고 한다.
물론 위의 예시들은 모두 영화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분위기 좋은 남배우를 찾고 있다던데…….
왜일까.
그 생각을 떠올리니 이상하게도…….
도윤에게 눈길이 간다.
지금 사이코패스 연기를 하고 있는 도윤에게 말이다.
‘아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상이야.’
로맨스?
저 사이코패스 ‘이다한’ 그 자체가 된 도윤이 로맨스?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상상된다.
도윤이 아련한 눈빛으로 여주인공을 바라보며 석양 아래 손을 뻗는 장면이.
분명 지금 맡고 있는 배역이 ‘사이코패스 살인마’인데.
왜 그런 장면이 상상될까?
그건.
지금까지 도윤이 해 왔던 다른 연기들을 모두 잊을 정도로…….
지금의 저 눈빛이, 너무도 아련하기 때문이 아닐까.
‘이거 참.’
재훈은 그만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